지관을 수행하려면 ‘결정심’이 분명해야
선정의 마음이 바로 지혜, 지극한 일념으로 정진을
二者精進 堅持禁戒 棄於五蓋 初夜後夜 專精不廢 譬如鑽火未熱 終不休息 是名精進善道法
두 번째는 정진 수행하는 방편이다. 정(精)은 잡되게 섞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진(進)은 물러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수행인은 한결같고 전일한 마음으로 잡되지 않고 혼란하지도 않으며 쉬지 않는 상태에서 용맹하게 정진을 해야만 한다.
어떤 종류의 공부를 하던 중요한 점은 부지런하게 수행하는데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염불을 했다가 다음날은 경전강의를 듣고 또 때로는 참선을 했다가 어떤 때는 주력을 하는 등 ‘정’을 잡됨이 없이 수행하지 않고 마음이 들쭉날쭉 수시로 바뀐다면 종일 수행공부를 한다 해도 한 가지 일도 성취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찌 크게 가련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허물을 추구해보면 잡되지 않고 물러나지 않는 정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인이 불도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용맹하게 정진해야만 한다.
정진이란 무엇인가. 견고하게 금계를 지녀 안으로는 탐 진 치 만 의 등 다섯 번뇌와, 밖으로는 색 성 향 미 촉 법 등 육진을 버리고 안과 밖이 동시에 청정해야만 몸과 마음을 정진하는 것이 된다.
초저녁, 새벽, 한밤중 쉴 사이 없이 정진하면서 성성적적하고 적적성성하게 지관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를 비유하면 나무를 마찰하여 불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무를 마찰하는 일을 끝내 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를 두고 용맹한 정진이라고 하며, 지관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도법이라고도 한다.
三者念 念世間爲欺可賤 念禪定爲尊重可貴 若得禪定 卽能具足 發諸無漏智 一切神通道力 成等正覺 廣度衆生 是爲可貴 故名爲念
세 번째 염(念)이란 분명하게 기억하는 마음인데, 올바르게 기억하여 마음속에 환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간의 오욕법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 사람을 기만하고 현혹시키기 때문에 천박하고 증오스럽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야만 한다. 또 출세간 선정지혜는 수승하고 오묘하여 존귀한 법이라는 것도 기억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서 모든 선정을 얻게 되면 즉시 무루의 지혜와 일체 신통력이 빠짐없이 발현하여 등정각을 성취하게 된다.
무루지는 무생지(無生智)이다. 무생으로서 일어남이 없다면 소멸함도 없는데, 이것이 바로 불생불멸하는 무루지혜이다.
신통은 육신통(六神通)이며, 도(道)는 칠과도품(七科道品)이며, 역(力)은 여래만이 지니는 열 종류의 지혜의 힘[十力]이며, 등정각을 성취한다함은 무상불도를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정각(正覺)에 대해 말해본다면 범부는 망상으로 지각하고, 외도는 사견으로 깨닫고, 이승은 공에 치우쳐 깨닫고, 보살은 단지 중도를 깨달을 뿐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진실한 등정각이 아니다.
오직 여래만이 진실한 등정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래의 등정각은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끝까지 다하였고 공간적으로는 우주법계를 포괄하였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여래의 등정각만이 일체 만법과 평등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는 삼지(三智)가 원만하게 밝고 오안(五眼)이 훤출하기 때문에 정각이라고 부른다. 지극한 묘각을 깨달은 이후에는 생멸망상이 끊어진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일으키고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운행하여 육도의 세계에 형체를 나투고 일체 중생을 광대하게 제도하신다.
수행인은 이같은 수승하고 오묘한 법을 항상 올바르게 사유하고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가장 존귀하다. 따라서 이를 두고 ‘염’이라고 말한다.
四者巧慧 籌量世間樂 禪定智慧樂 得失輕重 所以者何 世間之樂 樂少苦多 虛不實 是失是輕 禪定智慧之樂 無漏無爲 寂然閒曠 永離生死 與苦長別 是得是重 如是分別 故名巧慧
네 번째로는 뛰어난 지혜를 실천하는 방편이다. 무릇 수행자라면 반드시 훌륭한 지혜로 세간의 쾌락과 출세간의 선정과 지혜에서 얻어지는 쾌락 가운데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명료하게 밝혀 걸림이 없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생사에 염증을 내고 열반의 세계로 향상하는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과 거짓을 구별 못하고 사견과 정견이 분간이 되지 않아 기로에서 방황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반드시 뛰어난 지혜로 관찰해야만 한다.
세간의 즐거움은 유위법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닌 무상이며 설사 즐거움을 얻었다 해도 그 즐거움 역시 끝내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 때문에 세간에서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은 것이다.
이처럼 법신과 혜명을 살상하는 법을 즐긴다면 이는 경솔하고 천박한 법이다.
출세간 선정지혜의 즐거움은 무루법이고 무위법이다. 무루는 생사에 누락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무위법은 유위법의 조작함이 없어 담담하고 고요하여 생사의 속박에서 영원히 떠날 수 있다.
이같은 법이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법이다. 이와 같이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지혜라고 말한다.
五者一心分明 明見世間可患可惡 善識定慧功德可尊可貴 爾時應當一心決定 修行止觀 如金剛 天魔外道不能沮壞 設使空無所獲 終不回易 是名一心 譬如人行 先須知道通寒之相 然後決定一心涉路而進 故說巧慧一心 經云 非智不禪 非禪不智 義在此也
이상에서 이미 세간의 유위법은 모두가 환란이고 악이라는 것을 뛰어난 지혜로 분명히 구별했고 아울러 출세간 선정 지혜는 존귀한 법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 때 즉시 지극한 일념으로 지관을 수행하는데, 이 일심은 결정적인 일심이지 선정에 들어간다는 일심이 아니다. 즉 전일한 마음으로 하나의 문으로 깊숙이 들어가 공부하는 마음인 것이다.
금강은 가장 견고하고 날카로워 일체 사물은 파괴할 수는 있을지언정 일체 사물에 파괴를 당하지는 않는다.
지관을 닦는 마음도 마치 금강처럼 견고하고 날카로워 다른 사람에게 유혹을 당하지 않으면 마구니 외도에게도 파괴되지 않고 설사 전혀 얻은 바가 없다 해도 끝내 마음을 바꾸지는 않는다.
이를 비유하면 참선하는 가운데서 매우 좋은 소식을 얻은 것과 같으며, 염불수행을 할 때 지극한 일심으로 수행하여 중도에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마음을 뒤바꾸지 않는 것과 같다. 이를 두고 일심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마치 길을 가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도로가 막혔는지 통하는지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과도 같다. 생사의 길은 막혔기 때문에 가서는 안 되며, 열반의 길은 통했기 때문에 그 길로 간 뒤에야 결정적인 일심으로 그 길을 따라 전진할 수 있다.
일심이란 사량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수행하는데 있어서 이 마음이 가장 요긴하기 때문에 절대로 생각을 뒤바꾸어 가는 길을 되돌려서는 안된다. 그러한 마음을 두고 뛰어난 지혜로서의 일심이라고 말했다.
경전에서는 말하기를 “지혜가 아니면 선정에 들지 못하고 선정에 들지 못하면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지와 관 수행이 두 모습이 아님을 뜻한다.
지관을 수행하려 한다면 우선적으로 결정심이 분명해야만 하는데 선정의 마음이 바로 지혜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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