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으로 가득한 적멸보궁로의 초대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인 최승호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고비>는 황량과 적막과 고요와 죽음과 텅 빔으로 가득 찬 불교적 상상력의 시집이다. 고비사막 여행을 시로 형상화한 이 시집은, 고비사막 여행을 잘 끝내고 돌아온 것 같은 뿌듯함과 만족감을 준다.
시 ‘그림자’에서는 해골이 뒹구는 적막한 사막을 걸어가면서 “위로는 나는 새 한 마리 없고/ 아래로는 기어다니는 짐승 한 마리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할 뿐/ 가야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모르지만/ 죽은 이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지표가 되었다”는 오래전 서역을 드나든 중국 법현 스님의 시를 인용한다. 시 ‘한 토막 뼈’는 사막에 뒹구는 뼈 토막에서 짐승의 전 생애에 대한 행위를 유추하고 생명의 무상성을 형상화한다.
이 뼈는 한때
뿔 달린 짐승이었다
털가죽을 뒤집어쓴 채 풀을 뜯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네 발로 걸어다녔을 것이다
이 뼈는 한때 피 따뜻한 짐승이었다
제 눈에 멋져 보이는 이성과
짝짓기를 해보려고 무척 애썼을 것이며
제 모습을 빼닮은 어린것들에게
젖을 먹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한 토막 뼈다
말의 등뼈인지 낙타 목뼈인지
아니면 양의 다리뼈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략
- ‘한 토막 뼈’ 中
이렇게 생명은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흩어진 것이니, 바로 백골관이다. 육체가 무상함을 알고 몸에 집착하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송장의 피부와 근육이 다 없어지고 백골만 남거나 백골마져 흩어진 모습을 보는 것이다. ‘사막의 아이들’에서 화자는 천진불을 본다. 사막의 마을에서 만난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은 어린 지구인/ 같이 놀고 싶은” 천진불이다. 그러나 화자를 포함한 “우리는 천진불이 아닌 어른”이어서 같이 놀 수가 없다. ‘고비’에서 화자는 자신이 “고비였다면 나에겐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눈도 귀도 코도 없이 나는 늘 삼매에 빠져 있었을 것이고 돌의 혀가 있었다 해도 침묵했을 것이”라고 한다. 너무나 많은 것을 죽였다고 비난해도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고 양과 낙타들이 자신의 품안에서 죽어가도 그저 무심, 무자비로 일관했을 거라고 한다. 그는 사막을 장엄한 ‘적멸보궁’으로 인식한다.
별이 가득한 지붕
모래 드넓은 마루
사막만큼 장엄한 적멸보궁이 있을까
여기서는 얼굴 있었던 것들이
얼굴 없이 고요 속으로 들어가고
이름 있었던 것들이 이름 없이
큰 고요 속으로 들어가 고요하다
낙타의 열반
늑대의 열반
공룡의 열반
사막만큼 장엄한 적멸보궁이 있을까
모래 끝없는 마루
별 가득한 지붕
어느 구석에 풍경을 걸어놓으면
뎅그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텐데
오늘은 바람도 적멸에 든 듯하다
- ‘적멸보궁’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