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비구니가 혜암(惠菴, 1886~1985) 조실스님께 찾아와 고하였다.
“제가 통도사 극락암으로 경봉 스님을 찾아뵈니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네가 어느 길로 왔느냐?’ 하셨습니다. 제가 이에 대답을 못 하였는데, 만일 스님께서 이 공안을 질문 받으셨다면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어찌, 가서 그 스님에게 묻지 않느냐?”
수개월 후 마침 도리암에 불사가 있어서, 이 비구니가 경봉 스님을 모시고 산길을 올라가다가 갑자기 질문했다.
“스님, 도리천에는 길이 없거늘 어느 길로 가십니까?”
경봉 스님께서 머뭇거리시더니, 비구니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이 놈 봐라, 이 놈 봐라!” 하시었다.
뒷날, 혜암 조실스님께 찾아와서 이 문답을 여쭈니, 조실스님이 스스로 대답하였다.
“그 길로 왔다.”
경봉 스님은 극락암을 극락으로 비유하면서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느 길로 왔느냐?’ 고 학인스님에게 낚시밥을 던진다. 그러나 학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길이 없는데, 어느 길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여기서 극락은 ‘깨달음으로 가는 외길’을 상징한 말일까? 마치 ‘문 없는 문의 관문(無門關)’처럼 입구가 보이지 않는 꽉 막힌 은산철벽처럼, 문을 찾을 수도 없고 열 수도 없기에 철벽같은 관문으로 남아있는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문 없는 문, 길 없는 길은 영원히 막혀있는 것일까. 혜암 스님으로부터 선문답의 되받아치는 법을 배운 학인스님은 이번에는 도리암을 도리천에 비유해 경봉 스님께 카운트 펀치를 날린다. ‘도리천에는 길이 없는데, 어느 길로 가시냐?’고. 제법 당돌해진 학인이 대견했던지, 경봉 스님은 멱살을 잡고 ‘이 놈 봐라!’ 하며 도리천 가는 길을 일러준다.
얼마 뒤, 이 문답을 들은 혜암 스님은 ‘그 길로 왔다’고 평을 한다. 길도 없는 곳에 나타난 그 길은 도대체 어떤 길이란 말인가. 김영삼 前 대통령이 즐겨 쓰던 휘호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출전인 <무문관>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偈頌)에 힌트가 보인다.
“대도를 깨닫는 고정된 문은 없지만(大道無門) 그 문은 또한 어떤 길에도 통하고 있으니(千差有路), 이 문이 없는 관문을 통과한다면(透得此關) 그 사람은 천지를 활보하며 자유자재하리라(乾坤獨步).”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가 <무문관> 서문에서 읊은 이 게송은 대도의 문은 문을 찾기 어려워 ‘무문’이요, 문 아닌 곳이 없어 시방세계가 그대로 ‘무문’이라는 이중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조주 선사는 “큰 길은 장안(長安:서울)으로 통한다”고 하였다. 어느 길이든 깨달음의 세계로 통하지 않는 길이 없다는 뜻이다. 전도된 고정관념과 망상ㆍ집착을 여의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볼 수 있다면 문 아닌 곳이 없고, 길 아닌 길이 없다. 대문 밖을 나서면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건만, 이정표를 잘못 보고 가면 삼천포로 빠지는 법. 정법(正法)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갖추는 일이 시급한 이유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