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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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도 즐거워도 그냥 빙긋이 웃고 마세요!
부처님 오신 날에 대해서
저의 친구가 요즘 시대는 자식들이 부모님의 생신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 시대인데,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생일을 이렇듯 성대하게 치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저는 절에 오랫동안 다니면서도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참다운 의미를 일러 주십시오.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 새벽예불에 팔상성도를 염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우리는 밖으로 부처님의 탄생을 기리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을 탄생시켜 준 부모의 은혜와 법의 부모의 은혜도 둘이 아니게 갚기 위해서 항상 각자 마음에다 관(觀)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육의 부모들도 자식과 둘이 아닙니다. 그걸 볼 때, 자신의 생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낳아 주시고, 또 일러서 가르쳐 주신 그 뜻을 기리면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우리가 촛불 하나라도 켜 드리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로따로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법의 부모도 육의 부모도 둘이 아니게 한마음으로, 은혜를 갚기 위해서 지극한 마음으로 관하면서 촛불을 켜신다면 그 촛불이 바깥으로는 형식이 되지만, 형식만이 아니라 정성이 되고 안으로는 진짜 촛불을 켜는 것이 됩니다. 마음의 촛불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월초파일만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평상시에도 항상 그렇게 해야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팔상성도(八相成道)라고 하는 그 자체는 도솔내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 이렇게 여덟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렇게 여덟 가지로써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모든 과정과 그 시대에 간곡하게 가르쳐 주신 그 뜻을 기리면서 우리는 수행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걸 ‘사무 사유(四無四有)가 둘 아니게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셨다’고 한다면 팔상성도의 그 여덟 가지 문제를 다 함축해서 한마디로써 충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그 과정을 거치는 자체를 뼈 한 무더기로 비유해서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항상 들어서 아시다시피, 사생자부(四生慈父)라고 하는 그 뜻도 역시, 태로 낳고 알로 낳고 화(化)해서 낳고 질척한 데서 낳고 하는 사생들을 모두 자기 아님이 없이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 아닌 게 없이 했고, 자기 아픔 아닌 게 없이 했고, 자기와 더불어 같이 한도량에 있는 것을 제시했고, 또 모든 것을 둘 아니게 흡수해서 인연을 지으셨으니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겁니다. 모두가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불가에선 나유타 겁이라고 합니다마는, 나는 광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거치면서 우리가 지금 이 생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미생물에서부터 부모가 돼 보기도 하고 자식이 돼 보기도 하고 형제가 돼 보기도 하고, 그렇게 나오면서 자기 근본으로 인하여 진화를 해서 바로 형성되고 또 진화되고 형성되고 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업적이 얼마나 컸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거를 볼 때, 우리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 공기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고 바로 수억겁 광년을 거친 그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고, 미래로 돌아갈 수도 있고, 현재 또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인생살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공부를 함으로써 바로 그 뜻을 잘 파악해서, 바깥으로만 탄신을 기리고 팔상성도를 이름으로 기릴 게 아니라, 그 마음과 내 마음이 항상 직결돼 있다는 사실을 믿고 행한다면 그것이 곧 실천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팔상성도를, 부처님께서 태어나시고 열반하시고 그런 과정에 대한 것만 달달달달 외우고 알면서 바깥으로 끄달리면 아니 되겠죠.
그건 왜냐하면 부처님의 마음은 내 마음과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죠. “너부터 알아야 내 마음도 알아서 둘이 아니게 되느니라. 그래서 일체 사생이 너와 더불어 둘이 아니니라.” 했단 말입니다. 그러한 고로 이것은 내 마음의 부처님을 항상 관하며 ‘주인공’이라고 하면 벌써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의 부모도 법의 부모도 일체 가정의 모든 분들도, 한 식구 한 형제라 할지라도 앞에 닥치는 대로 걸리는 대로 거기다 놓고 합류시켜라. 하나로 만들어라. 동일한 한마음으로 결부를 시켜라. 그렇게 된다면 걸림이 없어서 어떠한 난국도 대치하고 나갈 수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가에서 이렇게 말하죠. “부(父)와 자(子)가 상봉해야만이 저승의 공부를 한다. 보이지 않는 정신계의 공부를 한다.” 하고요. 부의 손을 잡아야만 자는 무(無)의 세계에서 공부를 하거든요. 그래서 상봉치 못하면 아니 되는 거죠. 법의 부모란 나를 형성시켰고 또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자기의 근본 뿌리인 불성입니다. 불성 자체가 바로 자기의 원래, 법의 부니까요. 육신을 낳아 준 이는 육신의 부모고요. 그것은 내 근본의 법의 부모로부터 그 육의 부모를 빌려서 낳은 거지 내 영원한 그 자체의 불성이 아니었더라면 그 부모도 정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사월초파일이 돼서 촛불을 켜시더라도 육의 부모와 법의 부모가 둘 아니게 켜야 합니다. 내 주인공이 법의 부모니까요.

화내는 제 자신이 싫습니다
화를 내는 저 자신이 너무 싫습니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한번 화를 내게 되면 물건도 던지고 입에선 험한 말이 나오고, 생각으론 ‘주인공’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닌데도 화내고 싶어 하니 이대로 가다간 아이에게 상처가 될 것 같습니다. 생각 따로 몸 따로 감정 따로 행하고 있습니다. 요즘 딸아이가 저를 때리고 물건도 던지고 제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습니다. 스님, 도와주세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실도 없다 이랬죠? 왜 그런가. 한 찰나의 살림살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한테 항상 말하죠. 우리의 살림살이는 한 찰나요, 한 인생 살아나가는 것은 한 철이라고. 여러분이 한 찰나의 살림살이를 지금 하고 가는 겁니다. 요리 변덕 조리 변덕, 변덕쟁이거든요. 변덕쟁이, 도깨비장난, 귀신 장난감 이렇다고. 그러니까 그걸 말로 하려니까 그렇지 여러분은 변동이 무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공(空)에 들어서 가만히 있다면 그건 목석인 거죠. 또 너무 말을 하고 너무 아는 척을 해서 한데 떨어뜨린다면 그건 귀신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그냥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내는 겁니다, 그냥. 거기도 걸리지 마세요. 생각이 자꾸 나걸랑 그대로 그냥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 버려두란 말입니다. 버려두는 거예요. 왜? 자기가 이렇다 저렇다 할 자리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붙지 않는 자리라고요. 그런데 여기서, 괜히 고(苦)덩어리 속에서 그 의식이 들고나면서 괴로움을 주고 또 즐거움을 주고 이러는 거니까, 즐겁더라도 그냥 빙긋이 웃고 말고, 괴롭더라도 빙긋이 웃고 마세요, 거기서밖에 해결 못하니까요. 이열치열, ‘네 속에서 나온 거는 네 속에서 해결해야지 딴 속에서 해결 못한다. 나는 거기에 속을 필요가 없어. 네가 무체(無體)로서, 즉 말하자면 큰 부처로 보이더라도 난 거기에 속지 않아.’ 이렇게 속지 않으셔야 돼요.
여러분은 그 전자의 종 문서에 의해서 자기가 한 것대로 짊어지고 나온 데서 들고나는 것에 속지 마시라 이겁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좋은 소리가 들린다 하더라도 거기에 속지 말고, 말하자면 세 가지를 똑바로 보시라는 겁니다. 하나는, 말·뜻·행 이 세 가지가 동일하게 진실한지를 알게 되면 그냥 따르라고 그랬지, 믿으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따르라 이거죠. 나도 마찬가집니다. 왜 따르라고 그랬느냐. 그건 당신네들 주인공 안에 나와 더불어 같이 모두 일체 만물만생이 다 같이 한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생각이 자기를 구덩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그런 묘법이 스스로 돼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창살 없는 감옥에다가 옹쳐매 놓고 있고, 병자로 옹쳐매 놓고 있는 거지 누가 병을 갖다 준 겁니까, 뺏어 갑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달린 거예요. 과거 자기가 한 대로 문서를 가지고 나와서 그렇게 가난과 병고와 그 모진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한생각에 그 고통과 그 문서를, 종 문서를 한꺼번에 태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정말로 아셔야 하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법이라는 게 따로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부처님 법이 주어지는 거죠. ‘일체제불의 마음은 내 한마음이다’ 이런 노래 아시죠? 아마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화가 나면 그 노래를 부르세요. 그러면 그 화가 다 없어지죠. 화나면 주인공에다 맡기시고 화내지 마세요. ‘화내게 하는 것도 너다. 화 안 나게 하는 것도 너야. 즐겁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관하세요. 아셨지요?
욕심내는 만큼 행복해지면…
스님, 욕심이라고 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게 욕심이 되는 것이지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살다 보면 더 욕심을 내게 되니까 되지 않는 것들이 자꾸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짜 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다면 욕심내는 게 없으니까 행복해지겠지만, 저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장소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욕심내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죽어서, 또는 잘못을 저지르고 죽어서 딴 모습으로 가면 시궁창도 돼지우리도 좋은 집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꽉 찼으니 볏짚단도 금으로 보일 수밖에요. 볏짚단도 금으로 보이고, 누렇게 마른 풀들도 금으로 방석을 해 놓은 건 줄 알아요. 그러니 좋아서 그리로 들어가면 짐승이 되는 겁니다. 욕심이 많은 고로 눈이 어둡고, 그릇된 행을 저질러서요. 똑바른 밝은 눈을 갖는다면, 한마음의 청눈을 갖는다면 여러분은 조금도 잘못됨이 없을 겁니다. 진짜 자유인인 것입니다. 오늘 살아있는 이 몸을 가지고 만약에 진짜 사람이 못된다면 요다음에 어떠한 모습을 가지든 쳇바퀴 돌듯 또다시 돌아가야죠? 그러니 몇 바퀴나 돌아왔을까요?
재밌는 얘기 하나 또 해 드릴까요? 잘 생각하세요.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 한 점을 주니까, 그 고기 한 점을 보고서 고기로 보았습니다. 한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고기가 고기로 보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 한 점을 주니까, 고기로 보는 게 아니라 사생(四生)의 그릇으로 보았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생의 그릇 즉, 소 한 마리로 보았다 이 소립니다. 소 한 마리로 보이니까, 그 고기 한 점이 소 한 마리면 사생으로부터 모든 생명체들이 그렇게 많은 숫자가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생각 하나에 고기 한 점이 수십억이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고기 한 점을 딱 보는 순간에 소로 몇 바퀴나 돌았는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소로만 몇 바퀴 돈 게 아닙니다. 짐승으로 얼마나 돌았으며, 얼마나 쫓고 쫓기고 먹혀 왔으며 이렇게 돌아왔는가 하는 걸 한눈에, 한 찰나에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탁 입에다, 보는 순간 벌써 자기는 요리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소 한 마리를 탁 해치워 버린 겁니다.
그렇게 소 한 마리를 잡아먹고 치워 버렸으나 자기가 됐더랍니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죠. 소 한 마리를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았죠? 이걸 깨닫지 못하고 이론적으로만 알아선 안 됩니다. 소 한 마리를 다 먹고 보니까 자기가 돼 버린 거죠. 자기가 됐으니깐 두드러지지도 않았죠? 자기가 또 거기서 소 한 마리를 꺼내니깐, 소를 꺼내도 소가 아니라 이제는 사람을 꺼내는 겁니다.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됐으니까 사람으로 생산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소를 넣었는데 사람으로 생산이 돼서 나왔습니다. 사람을 꺼냈어도 소의 사생이 들어있는 그릇이나 사람의 그릇이나 똑같이 그 사생은 마찬가지이나, 사람이라고 하는 거하고 짐승이라는 거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짐승은 새끼를 여러 마리 낳고 그럴 수 있지만 사람은 드물죠.
내가 각각 나라는 습성! 한마음에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이치를 모르고 각각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여러 숫자를 많이 낳죠? 알도 많이 낳고 새끼들도 많이 낳고, 이런 거는 벌써 내 마음속에 흐르는 피의 그 생명들이 내가 나라고 하고 싸우면서 서로 나오거든요. 서로 나와! 양보심이 없어요! 양보심이 없으니깐 그냥 나올 수밖에. 다섯도 좋고 넷도 좋고 열도 좋아요. 그러나 인간이라 하면 양보성입니다. ‘당신에게 모든 걸 다 주리다’ 하는 양보성이 있어요. 그래서 불성이 다 같은 생명이라 할지라도 독특한 생명이다 이겁니다. 고등생명이다 이거죠. 고등동물이다 이겁니다. 생명은 다 마찬가지지만, 차원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 자체가 그렇게 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한생각을 잘못하느냐 잘하느냐에 의해서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잠재의식 속에, 카세트에 얽히고설킨 게 그냥 몰락 벗어지는 겁니다. 벗어지느냐, 더 지지하게 짊어지고 다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뭐가 그렇게 원통해서 놓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뭐가 원통합니까? 이 몸뚱이가 공(空)해서 한 찰나에 살다가 한 찰나에 구름이 흩어지듯 흩어지는 몸뚱이, 내일 죽으면 어떻고 오늘 죽으면 어떻습니까? 나라는 욕심 때문에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는 욕심 때문에. 나라는 욕심이 없다면 싱그럽게 사실 수 있을 텐데, 한 찰나찰나 사람이 넓게 볼 수 있고, 넓게 들을 수 있고, 넓게 일할 수 있고 지혜의 샘물은 골목골목에서 솟아 흐르듯이 좋은데 말입니다. 그 샘물이 싱싱하고 좋은데 그걸 모르시고선 자꾸 몸 하나에 끄달리니 전체에 끄달릴 수밖에요.
지금 여러분이 사는 겁니까? 여러분 몸속에 수만 생명이 들어 있으면서 오르락내리락, 피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고 살 속에도 오르락내리락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렇게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시나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제일이라고 할까요? 그 중생들이 다 받쳐 줘서 내가 이렇게, 부처가 눈코가 의젓하게 달리고, 손발이 있어서 평발을 해 가지곤 턱 딛고 다니는 건데, 그래 내가 제일이라고 하시겠어요? 누가 지금 그렇게 딛고 다니게 해 드리는데 상구보리라고만 하시겠습니까? 하화중생은 모르고요?
내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거고 부처가 있기 때문에 내 몸뚱이가 있는 겁니다. 길을 지나가다 보면 벌레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동시에, 기댈 데가 있으면 좀 덜하고 기댈 데가 없으면 아주 역력히 자기 살 궁리를 합니다. 그런 거를 볼 때에 홀홀단신으로 모든 거를 집착하지 않고 일어선다는 것은 참 어려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점을 감안해서 귀도 떠야 하고 눈도 밝아야 하고 폭도 넓혀야 하니까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우리 머리 위에도 세계가 있고, 우리 발밑에도 세계가 있고, 사방팔방에 세계가 있습니다. 전체 ‘대천(大千)’ 하면 벌써 그렇게 있다는 말이고, ‘대천’ 하면 그런 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있다는 증겁니다.
그러니 요만한 한 지구의 우물에서 ‘우리가 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땐 참으로 답답한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답답한 게 아니라 여러분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우물에서만이 자기 집이라고 하고, 자기 거라고 하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서로 뺏고 빼앗기고 하는 싸움을 계속 하는 그런 정신계의 문제와 육신계의 물질세계와 이 모두가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새도 보십시오, 전쟁 아닌가! 내가 생각할 때는 거저 줘도 싫다고 할 텐데 말입니다. 돈을 갖다 주고 하라고 그래도 싫다고 할 텐데 말입니다. 이 문제들이 모두 겉면에 탐착을 해서 그런 거죠. 그것도 과한 욕심이죠. 진짜 욕심을 부리려면 우주세계 천차만별을 다 집어먹으려고 해야지 그것이 당연하겠죠. 영원치도 않은 걸 가지고 싸우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고등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하치않게 생을 버리다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아이에게 마음공부를 가르치려면…
초파일이 되어서 그런지 젊은 법우들이 절에 나와서 열심히 참여하고 공부해 나가는 것을 보면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와 보살은 자주 나와서 봉사도 하고 공부도 해 나가는데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하고 이끌어 줘야 이 좋은 공부를 배우게 해 줄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스님, 가르침 주십시오
우리가 바쁘게 일을 해도 그것도 행선이다, 내가 항상 그렇게 얘기하죠. 행선이다. 그것이 참선이 아닌 게 아니다. 행선이다. 서 있으면 입선이다, 누워 있으면 와선이다, 앉아 있으면 좌선이다. 이러니 모두를, 동서남북을 다 한데 합쳐도 그냥 참선입니다. 하다못해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어도, 물 흘러 내려가는 걸 보고 있어도 참선이에요. 앉아서 하질 않고 섰으니까 입선이지요. 그러니까 모두가 참선 아닌 게 없어요. 우리가 일을 하면서 애에게 먹으라고 뭐를 주는 것도 참선이에요. 공식이면서 참선이라고요.
이렇게 좋은 공부를 지금 못하시면 어느 때 하시렵니까. 우리가 죽고 나면 또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도 어려운 겁니다. 또 육체가 없으면 공부 못해요. 그러니 육체가 있을 동안에 해야죠. 그런데 내가 좀 아쉬운 건, 남편이 안 나오는 분들은 남편이 나오게끔 자기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달라져야 남편도 나오게 됩니다. 그건 정한 이치죠. 자식들도 그렇고요. 또 자식들에게 관하는 도리부터 가르치면서 자기가 배운 대로 자꾸 이렇게 이끌어 간다면 어디다가, 공중에다 갖다 세워 놔도 살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돈을 들여서 가르치는 것만 가르치는 걸로 아니 이걸 어떡하면 좋죠?
세 살 먹은 아이가요, ‘주인공, 낫게 해 줘.’ 이렇게 하라고 그러니까 감기가 들어서 그냥 일어나지도 못하고 콧물을 줄줄 흘리는 고 세 살배기가 “주인공, 낫게 해. 주인공, 낫게 해.” 그러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걔가 그냥 부신 듯 부신 듯 일어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걔가 자라서 다섯 살이 됐어요, 지금. 다섯 살이 됐는데요, 엄마가 “아이구, 아파서 죽겠다. 감기가 들어서 죽겠다.” 이러면 “흥, 엄마는 아직 멀었어.” 그런대요. 그러니 애들 중에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그런 애들이 드문드문 있단 말입니다. 그런 애들이야 아주 여기에 박혀서 이다음에 자라도 그냥 거침없이 해 나갈 거란 말입니다.
어떤 아이는 지금 중학생이 됐는데 초등학교 다닐 때 말입니다, 저희 아버지 목 뒤에 혹이 나 가지고 병원에 가니까 악성이라고 수술을 못한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큰아들이 걱정 걱정을 하는데 그게 몇 해가 흘렀죠. 올해 인제 중학교에 들어갔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도 아버지 혹 하나 못 없애니 이거 어떡하지?” 그러더래요. 그러더니 어느 날은 형이 인제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한번 해 본다고 하니까 형더러 그러더래요. “우리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운전수가 진짜 나라면 왜 못하겠어? 하여튼 형은 아직도 멀었어.” 그러더니 불과 한 달이 좀 넘었는데 아버지의 혹이 반으로 줄었더란 얘기죠. 그런데 중학생이 또 학교에 갔다 와서는 착 깔고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걱정 없어!” 이러더래요. 그러더니만 그냥 또 한 반달이 되니까 그냥 싹 없어져 버렸다는 거예요. 없어지고 나니까 걔가 형더러 하는 말이 “뭐는 못하겠어? 형은 아직 멀었어. 취직 못하는 것도 아직 멀어서 그래!” 그러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고런 아이들은 진짜 어려서부터 그렇게 해 가기 때문에 앞으로 어떠한 묵사발이 될 일이 생겨도 끄떡없이 하늘을 받치고 나갈 거라고요.
그러니까 이게 사람의 지혜로운 요량에 많이 달려 있어요. 그런데 부모들은 지금 이렇게 시급한 학생들을 놔두고도 그런 얘기 한마디 안 해 주는 부모들이 많아요. 그거 뭐 돈이 들으니 못해, 재산이 없어지니 못해, 글쎄. 자손들이 아무리 해도 말을 안 들으면 ‘너의 주인공과 나와 둘이 아닌 까닭에 다 너에게도 불이 켜질 것이다. 그저 이거를 배우고 또 앞으로는 점점 잘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관해 줘야 정작 싫다고 하는 사람에게까지도 뜻이 갑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한텐 연방 해 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도 자기 엄마 말을 안 들어서 관하는 내용을 밥 먹는 테이블에도, 벽에도 붙여 놓고, 변소 안에도 붙여 놓고 그랬더래요. 그저 그렇게 하는 거니까 한번 해 보자 했던 모양이지요. 그렇게 해 보고 가니까 살면서 아주 좋거든요. 그러니까 그 후에 엄마더러 그러더래요. “나는 처음에는 ‘어디 정말 되나 안되나 보자’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누가 해 주고 가져가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시시때때로 그렇게 대치를 하고 보호를 하고 그렇게 나가는 겁디다.” 하고 고맙다고 하더래요. 그랬다는 셈으로 우리가 아무리 싫다 그러더라도 마음으로 관해 주고 벽에 붙여 놓고 한번 해 본다면 그건 진저리나게 하는 거는 아니니까, 그리고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요. 하여튼 모든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마음먹기에 달린 건데 마음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분란이 일어나고 그러는 거지, 마음을 제대로만 먹는다면 분란이 날 것도 앞서 대처해서 없애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08-04-28 오전 1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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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