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징자
칼럼니스트
찬란함에는 기쁨이 있을까, 슬픔이 있을까?
생명 근원을 드러내는 그 찬란함은 분명 기쁨에 속할 것이로되, 한편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한 어느 시인의 감각에는 그 찬란함 속에 슬픈 가슴앓이가 보인다.
색깔의 현란함이나 화려하기로는 봄과 가을이 다르지 않으나 사람들은 ‘찬란함’이란 단어를 가을에 비해 봄에 많이 붙인다. 새싹과 함께 온 세상 어디에나 기적처럼 갑자기 펼쳐지는 지상의 꽃 잔치 때문일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은 아름답다”며 <시간의 이빨>이란 책을 쓴 미다스 데커스는 “사람들이 봄에 과수원 꽃구경을 하러 몰려들지만 가을 탐스런 과일을 보러 일부러 과수원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푸념을 한다. 봄과 가을이 주는 느낌의 차이라 할까.
꽃구름 속에서 사람들도 구름처럼 떠돌며 꽃구경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요즘 꽃구름 있는 곳 어디에서나 사람구름이 함께한다.
아무리 작은 꽃 한 송이라도 만개(滿開)의 순간 한번 파르르 떨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고양된 생명감의 절정에서 오는 환희의 떨림인지 아니면 만개를 위한 진력(盡力)의 고통에서 오는 몸부림인지, 그런 떨림이 있고야 열매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그런 떨림이 전달되는 것일까? 그래서 꽃구름 속에 파묻히고 싶어지는 것일까?
봄은 꽃의 계절이지만 계절에 걸 맞는 철새들 로테이션의 계절이기도 하다. 기러기, 북방 까마귀, 청둥오리 등 겨울 철새들의 색깔은 북방에 어울리게 어둡고 그다지 화려하지 못하다. 한편 그들은 귀로에 거대한 떼를 지어 지나가면서 지나는 길 위에 분뇨 성 비마저 뿌리고 간다.
그들이 가고나면 뒤를 이어 꽃들이 피고 꽃 색깔과 어울리는 자못 화려한 깃털을 가진 여름철새들, 꾀꼬리 뻐꾸기 소쩍새 두견이 파랑새 해오라기 물총새 노랑할미새 붉은 뺨 멧새 휘파람새 등이 신록 속을 누비며 알을 깐다. 돌아 온 여름 철새들마저 봄에 찬란함을 더해 주는 것이다.
그런 찬란함에 슬픔이라고?
감정에 대해 연구하는 현대의 뇌 과학자나 신경과학자들이라면 기쁨과 슬픔에 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포근한 기온 등 몸의 건강을 최상으로 유지시켜주는 여러 가지 신체 내 외부의 조화로움, 바다나 일몰 등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경관들, 아름다운 음악, 사랑 하는 것 등에서 오는 느낌이 기쁨일 것이고 여러 종류의 상실감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느낌이 슬픔이라고.
그야말로 과학적인 냉정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봄이야말로 기쁨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 기쁨의 계절에 왜 자살률이 높아질까?
사람들은 안락함을 느끼는 아름다운 환경 속에 있으면 삶의 의욕이 높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살에 대한 한 연구에 의하면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어려운 도전에 부딪쳤을 때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을 더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고자 하는 열망은 전쟁터에서 더 높아지며 개인적으로 극복해야할 극한상황에 처했을 때 생명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 애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안락하면서도 찬란한 계절에 죽음의 유혹을 더 받게 된다는 것은 지극한 기쁨이 지극한 슬픔에 맞닿아 있어서일 것이다.
과연 슬픔이 상실감에서만 느껴지는 감정일까? 꽃이 피어서 기쁘고 꽃이 져서 슬퍼진다는 그런 단순한 구도일까? 그런 슬픔에는 깊이가 없다.
찬란함은 기쁨 속에 슬픔이 더해짐으로 해서 무게와 깊이를 더하고 빛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많은 대중들 앞에 앉으셔서 어찌하여 꽃 한 송이를 꺾어들고 미소를 지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