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지갑의 유혹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정양은 참고서 하나 제대로 사기가 힘들었다. 예쁜 학용품들은 더욱 그림의 떡이었다. 어린 마음에 갖고 싶은 것도 많고 예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의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지갑을 보았다. 순간 눈에 확 들어왔다. 정양이 평소 좋아하던 만화 캐릭터가 들어있는 빨간색 지갑이 너무 좋아보였다. “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며 ‘아, 저 지갑 갖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부모님께 사달라고 말도 꺼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기가 죽었지요.”
점심시간이 되었다. 문득 아까 그 아이 자리로 눈을 돌렸는데 뜻밖에도 그 지갑이 보이는 것 아닌가. 점심 먹고 책상 위에 그냥 두고 나간 것 같았다. 정양은 가까이 가서 좀 더 보고 싶어졌다. 마침 교실엔 거의 아무도 없었고 각자 자기 일 하느라 바빴다. 정양은 그 애 자리로 가서 지갑을 들고 잠시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지갑을 들고 자리로 와서 자신의 가방에 넣어버렸다. “남의 것을 가진다거나 훔친다는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어요. 그냥 예쁜 것을 보아서 내가 가진다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또 그 애가 놔두고 나갔으니까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될 무렵 그 지갑주인 아이가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선생님, 지갑이 없어졌어요. 난 어떡해요.” 그 애는 엉엉 울었다.
제가 했어요
담임선생님은 놀라 “어디에 두었니?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니?” 하고 물었다. “분명히 여기 책상 위에 두었어요” 그러자 옆의 아이들도 “맞아요, 우리도 보았어요” 했다. 담임선생님은 심각해졌다. “그럼 누가 가져갔다는 말이냐. 이럴 수가 있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남의 것을 가져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설명하며 화를 내었다. 정양은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가슴이 떨려왔다. 그렇게 잘못된 일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우선 모두 일어나서 바닥에 혹시 떨어져 있지 않은지 살펴보라고 했다. 그리고도 발견되지 않으면 전부 밖에 나가게 하고 모든 아이들 가방과 소지품을 검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들 바닥과 주위를 찾아보느라고 야단이 났다. 정양은 점점 무서워졌다. 분명히 검사하면 내 가방에서 나올 텐데, 이 일을 어쩐다! 어쩔 줄 모르던 정양의 눈에 옆짝 홍군의 가방이 보였다. 정양은 자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서 홍군의 가방에 넣어버렸다. 홍군도 그것을 보았다. 홍군은 정양을 보고 “너 왜 그러니?” 하고 물었다. 정양은 너무 무섭고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울어버렸다.
홍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선생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교실이 일시에 조용해지며 홍군을 주목하였다. 홍군은 자기 가방에서 그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앞의 선생님께로 들고 가는 것이었다. 정양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제 난 죽었다. 난 도둑이다. 끝장이다’ 하는 생각만 들었다. 앞으로 나간 홍군은 선생님께 지갑을 드리며 “죄송합니다. 아까 지나가는데 책상위에 지갑이 있었어요. 빨간색이 하도 예뻐서 잠깐 보려고 가져왔는데 그만 가방에 넣어버린 것 같아요. 가져갈 생각은 없었어요” 하고 말했다. 선생님은 지갑 찾은 것이 너무 반가웠는지 “그러면 되나. 아무리 잠깐이지만 남의 것을 말 안하고 가져가면 안 돼. 그래도 금방 말해주니 잘했다” 하고 곧 상황을 끝내버렸다.
배려하는 마음이 진짜 보시
그 일은 정양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홍군은 잘못하면 누명을 쓸 뻔 했는데도 자기에게 원망하는 마음도 없이 정양을 감싸주어 아무도 모르게 해주었던 것이다. 당시는 잘 몰랐지만 철이 들면서 생각할수록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진한 감동으로 마음에 다가왔다. 홍군과는 연락이 끊어졌지만 그 사건은 정양을 딴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남의 어려움과 아픔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중고등시절 정양은 반에서 ‘천사표’라고 불릴 정도로 다른 친구들을 감싸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봉사활동에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불교학생회를 하면서 육바라밀의 하나인 보시를 배웠을 때, 아, 홍군 그 친구가 나에게 해 준 것이 진짜 보시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정양은 홍군으로부터 어떤 비싸고 좋은 물건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 아상이 가득하고 존중과 배려가 아쉬운 시절에 한 초등학생이 보여준 남을 생각하는 마음과 용기가 참 아름답고 감사하다. 일부 부끄러운 어른들에 대해서 더욱 참회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황수경(동국대 선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