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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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명이 아까우면 남의 생명도 아까운 줄 알아야!
항상 법당이 좁아 추워도 바깥에서, 이렇게 날이 뜨거워도 바깥에 계시게 해서 참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지, 또 현재에 뭘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똑바로 알아야만 되겠기에 이렇게 항상 도반으로서 한도량에 같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질문하기 전에 한마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사생, 사생 하는데 사생(四生)을 어떤 의미에서 사생이라고 합니까.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사생이라는 뜻을 똑바로 아시고 그 사생의 천차만별로 있는 문제들을 자신들이 잘 직감하고 행동으로 취해나가야만 되겠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생이라는 것은 태로 낳는 거나, 알로 낳는 거나, 화해서 낳는 거나, 질척한 데서 낳는 거나, 이 낳는 것이 습한 데 사는 생명들도 천차만별이고 알로 낳아서 사는 생명들도 천차만별이고 또 화해서 낳아서 사는 생명들도 천차만별이고 태로 낳아서 사는 생명들도 천차만별이란 말입니다. 그 천차만별 가운데에 영혼이 깨끗하게 밝고 정갈하게 사는 영혼들이 얼마나 될까요.
영원한 자기의 근본 불성 자체가 바로 자기를 이끌어 가는 건데, 불성이 있기 이전 영혼이라는 자체가 깨끗해야 되는데 깨끗하지 못한 사람도 많고. 또는 이 육신이 튼튼하고 정상이어서 불구가 아닌 분들도 영혼이 아주 불구가 되신 분이 있고, 몸은 불구나 영혼이 아주 불구가 아닌 분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과거로부터 불구로 나오게 되는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불구로 태어났을 겁니다. 하지만 불구가 된 자체로 인해서 자기의 자책감으로, 어떠한 문제가 닥쳐서 눈물을 흘리고 뼈저리게 울면서라도 자기가 불구라는 걸 자책하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보는 것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자기가 제일 밑에 섰기 때문에 말입니다. 위가 됐으면 잘 보질 못할 텐데 밑에서 보기 때문에 판단을 잘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육신이 멀쩡한 분들도 마음이 불구가 돼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절룩발이고 이렇게 된 분들이 많거든요. 그건 뭐냐하면 모습이 그렇게 돼서 그런 게 아니라 마음 자체가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 벌써 영혼은 아주 불구죠. 그래서 따지고 본다면 육신 불구가 영혼도 불구냐, 그렇지 않으면 육신이 정확한 사람들이 영혼이 불구가 된 사람들이 많으냐 이런 걸 비유를 해볼 때에 이 몸이 불구된 사람일수록 더 영혼은 깨끗하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그 깨끗한 영혼으로 인해서 차원에 따라서 모습이 주어지고 삶이 주어지고 또 복도 주어지고 그러는 것인데 영혼을 그렇게 불구인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지금 불구로 사는 사람들보다도 더 형편없이 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침착하게 생각 안 할 수가 없죠. 우리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사생들이 다 그래요. 날아다니는 새들도, 육지에서 사는 짐승들도, 물에서 사는 고기들도 또 질척한 땅에서 사는 생명들도 다 그렇죠. 그러니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마음의 공부를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마음을 똑바로 가지고 말입니다. 누가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하지 말아라, 저렇게 하지 말아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또 사랑을 하지 말아라 이런 것도 아닙니다. 단 사랑을 하되 자비로 해라. 여북하면 자비라는 것을 ‘비’자를 무슨 ‘비’자로 썼습니까? 슬플 ‘비’자로 썼죠? 그러나 가엾어서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가엾어서 내가 너를 건지겠노라. 너를 건지는 데는 내가 네가 돼주마. 이 마음이 마음 속에 들어가주지 않는다면 건져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차이가 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에도 얘기했지만 서산 대사 얘기를 또 응용해야 되겠습니다. 서산 대사가 날으는 새도 떨어뜨렸다, 이렇게만 듣지 마세요. 서산 대사 마음이 새가 됐단 얘깁니다. 새가 됐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내려앉는 거죠. 그것뿐이 아니죠. 부처님께선 사생, 그래서 자부라고 그랬는데 사생인연을 다 맺어서 그렇게 일대사의 인연을 해놨기 때문에, 둘이 아닌 까닭에 자부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사생들의 과정을 면밀하게 지금 밝은 세상이니까 다 보고 사시죠. 사생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또 우리들의 삶이 어떠한가. 차원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다 뿐이지 삶의 과정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 생명도 둘이 아니요, 바로 마음도 둘이 아니요, 부모 자식이 돼서 형제가 돼서 삶도 또 둘이 아니라. 애통해하고 껍데기가 돼서 자기가 자식을 위해주는 것도 다 똑같고. 그러나 이 법의 부모는, 여러분이 다 법의 부모를 가지고 계십니다. 불성이라는 것이 법의 부모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수억겁 전으로부터 진화해서 형성시켜 나온 장본인이니까요. 이 모습이라는 건 한철 살다가 망가지면 그냥 다시 바꾸는 것뿐입니다. 바꾸는 데는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바꾸어지죠.
그러니 오늘 아무렇게나 살다 뭐 죽으면 고만이지 이러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하나, 각자 하나씩만 잘못돼도 좋은데 그게 아닙니다. 하나가 잘못되면 단추 잘못 끼는 거와 같아서 죽 내려가면서 다 잘못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 안 되면 한 분이라도, 또 전부 다라면 더더욱 좋고요.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데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 많이 생깁니까. 그냥 우리가 편안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가는 거는 누구나가 다 있는 겁니다만 부모를 두고 자식이 그냥 별안간에 죽는 거와 부모도 자식들을 두고서 별안간에 죽는 거 이게 끔찍한 일입니다.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짐승들도 그렇게 해놓고 자식을 못 잊어서 그 죽은 자리를 몇 번이고 가서 울고 그럽니다. 그게 사람과 뭐가 다릅니까?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요, 내 몸 이것도 한철 살다가 버릴 집인데 우리가 뭘 그렇게 남의 거를 걸터듬어서 이렇게 살아야만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가는 거 억지로 잡지 말고, 나한테 닥치는 거 마다하지 말고 모든 거를 흡수해서 나 아님이 없이 해라. 아무리 아랫사람이 강하고 뻣뻣해도 내가 고개를 먼저 숙여준다면 상대방에서도 그냥 숙여준다. 내가 웃사람이라고 숙여주지 않는다면 아랫사람도 겉으로는 숙여줄지 모르나 안으로는 전혀 숙여줄 줄 모른다. 이게 진리의 원 근본이죠. 진리에 살고 진리에서 죽고 진리에서 배우고 이러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어느 회사도 그렇고 또 우리나라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다 유통이 돼서 살아나가지만 첫째, 융통성있게 내 머리를 숙여서 말을 내 속에만 넣고 탁, 자세하게 이해가 될 수 있도록 말을 안 하면 그냥 그건 오해가 생기는 거고, 그러한 문제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자식과 부모 사이도 그렇고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남편들이 나가서 일하는데 여자가 알면 뭘 해?’ 이러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러고는 안에 들어오면 화가 나니까 얼굴이 찌푸려지고 웃지 않고 그렇게 되면 “여보, 왜 그럽니까? 뭐 어쩝니까?” 하면 “몰라도 돼!” 이러거든요. 그러니깐 안에서는 그런 걸 다 모르고 오해가 생기고 감정이 생기고 이러니깐 마음으로 뒷받침을 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잘되겠습니까?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이런데 내가, 이러니까 마음이 괴로워서 그래.” 이렇게 해주면 “어머나, 그렇구나. 저거 어떡하든지 잘돼야지.” 하고 마음으로다 항상 기도하는 것처럼 마음을 써 주는 것이 한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한 가정에서도 이렇게 의합하고 그렇게 하게 되는 거죠. 자식들한테도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런데 가족이 이렇게 모여 있으면 그래도 한달에 서너 너덧 번은 가족 회의를 하면서 이렇게 다 털어놓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면 그것이 화합도 도모할 뿐 아니라 서로 일하는 데 마음이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서 뒤를 받들게 되는 겁니다. 이건 몸으로 뛰고 무슨 말로 하고 이래서만이 뒷받침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마음으로 하는 것에 여러 식구가 한마음이 돼준다면 그냥 이거는 100%를 나갈 수 있는 겁니다.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무서운 건지 모릅니다. 그런데 자식도 아버지가 하는 일 모르고 아버지가 자식 하는 일도 모르고 부부지간에도 모르고 이러니까 나가서 혼자 뛰고 혼자 근심 걱정 하고 이러다보면 몸이 망가지고 하는 일도 잘 안되고, 안에서는 안에 대로 오해를 사고 그냥 뛰다가 병이 들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게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자비가 부족해서요. 우리가 결혼을 해도 사랑만 가지고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조건이 다 맞아서 자비가 돼야 결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대한 문제들이, 이 사생에 관한 건이 같이 더불어 이렇게 전부 살고 있으니 그 모두가 소중하다. 내가 살아보니까 모두가 소중하지 않습니까? 내 생명이 아까우면 남의 생명도 아까운 줄 알아야 되는 거죠. 어떤 때 가만히 보면 이 방생이라고 한다는 그것이 고기를 그냥 산 채로 잡아다가 그렇게 팔아먹으려고 놓으면 또 사다가 거기다 넣어요. 넣으면 넣는 그 즉시 또 그물질 해서 또 잡아다 놔요. 그게 방생이 아니라 지옥고를 당하게 만들어 놓는 거란 말입니다. 방생이 얼마나 할 데가 없어서 그런 방생으로 하겠습니까? 차라리 그냥 놔두는 게 낫죠.
고기 방생이라는 게 언제서부터 생겼느냐 하면 옛날에는 산사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지렁이 뭐 미꾸라지 소라 등이, 하여튼 가재 게 붕어 할 것 없이 늘비했습니다. 뜰 안에 그냥 늘비했어요. 그러니까 물도 없는 데서 모두 죽을 테니까 그릇을 가지고 그걸 담아서 강에다 넣어준 그런 이치상 생긴 것입니다. 물이 없는 데 있는 고기를 물 있는 데 갖다 넣는 게 방생이지 어떻게 물 있는 데서 사는 걸 잡아다가 고생을 기껏 시키고는 죽는 것도 많고 그런데다가 또 잡아다 놓고 또 건지고, 이게 방생입니까, 어디? 그건 방생이 아니죠. 그건 오히려 죽이는 것만도 못하죠. 이, 사람 방생도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우리가 대의적으로 본다면 이런 문제들이 전부 참 여러분이 도와주셔서 잘 지내고 있는데 그런 반면에 아주 모르게 보이지 않게 고생하는 분들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생각해서 만나고 인연이 되면 그런 걸 조금씩이라도 우리 형세에 따라서 도와주면 그게 방생이에요. 물 없이 사는 거 물 있는 데다 갖다 넣어주는 것도 방생이고요. 또 옛날에 제비 다리 해줬다는 것처럼 아, 가다가보면 다리가 부러져서 못 나는 거 감아서 치료해서 날려보내는 것도 방생이고요. 그런 게 진실한 방생이지 어떻게 그게 방생입니까? 그렇게 방생이 잘못돼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다 요즘 텔레비젼에서 들으니까 외국 두꺼비를 갖다가 방생을 해가지고 그렇게 됐다는데 그게, 그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 한국에도 많은데 외국에서까지 사다가 넣어가지고 그 야단입니까?
하여튼 어느 누구든지 겸손하고 둥글고 너무 욕심차리지 마시고, 그저 나한테 닥치는 것만 가져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새 그렇게 야단법석하죠? 과거의 역사를 본다 해도 그렇죠. 그거 뭐 때문에 저렇게 고생들을 하나, 이런 생각을 해요. 아, 뭐 때문에 대통령을 하고 예전에 왕을 하고 그래가지고선 그 난리가 나고 칼부림이 나고 죽고 이렇게 사느냐는 얘기죠. 세상에 돈을 주고 하라고 그래도 나 같으면 안 할 텐데 말입니다. 하하. 그렇게 해가지고 있는 걱정, 없는 걱정 또 자기 영혼도 다 더럽히고 자식들 대까지도 더럽히고 그냥 대대손손이 그게 남아있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신성한 이름을 남기기 이전에 그런 이름을 남긴다면 그건 치욕적이죠.
우리가 평범하게 지극하게 참, 자비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좋습니까? 짐승들이나 날아다니는 새들도 그 추위를 당해도 참고 봄이 올 때를 기다리면서 고생이 돼도 인내를 하고 사는데 우리 사람으로서, 고등동물로서 그런 인내가 없이 질서없이 무분별하게 산다면 우리는 사람 될 가치도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마음공부라는 거를 해야만 되는 거죠. 자기 마음의 근본으로 인해서 육신이 움죽거리고 사는 거니까, 우리가 육신부터 나오고 마음이 나온 게 아니라 바로 내 영원한 나의 근본 때문에 내 육신이 형성됐으니까 말입니다. 알고 본다면 아주 지극한 사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육신이 있어도 또 육신이 많아요. 예를 들어서 부처님 육신은 하난데, 하도 마음이 다른 육신들한테 그냥 모두 들어가서 자기가 돼봤기 때문에, 허허허. 그분은 구더기가 돼도 상관없고 어떠한 게 된다 하더라도 자기는 상관없다고 말씀하신 거와 같습니다. 전부 나 아님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자비하게 모두 평등하게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평등한 것이 똑같아서 평등한 게 아닙니다. 생명의 근본은 평등하지만 이 모습으로서 굴리는 데는 평등치가 않습니다. 천차만별이지요, 용도에 따라서 그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그 융통성을 다 가지고 계시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하신 분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거든요, 또.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생자부가 돼라’ 해서 사생자부의 과정을 가르치기 위해서 뼈 한 무더기를 놓고 그렇게 가르쳤단 말입니다. 수없는 과정을 거쳐올 때 억겁, 천겁, 만겁을 거쳐올 때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또는 형제가 되고, 이렇게 했다가 잠깐 또 진화돼가지고 또 다른 부모가 되고 다른 자식이 되고 또 거기서 부모가 되고 이렇게 해 올라오기를 헤아릴 수 없이 거쳐 올라왔다 이겁니다. 그랬으니 생각할 때는 지금 육신의 부모만 부모가 아니라 전체가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전체가 내 자식 아님이 없고 그냥 순간 모습을 바꿔서 자식이 돼서 나오고 순간 바꿔서 또 부모가 되고 이렇게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교가 있든 없든 하늘이 무너지든 땅이 솟든 간에 눈도 깜짝하지 말고 이 내 주인공이라는 자체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으로 인해서 근본 불성을 돕기 때문입니다. 그 불성만이 내 몸을 움죽거리게 하고,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보디가드가 되고 해결사가 돼주고 모든 거를 다 그렇게 해준다는 걸 딱 믿어야지 딴 데를 믿었다간 만날 속고, 만날 걸리고, 맞고 치욕적인 일을 당하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하시길 바라면서 아주 진정한 자기의 보디가드는 자기한테 있다는 거, 진짜 자기의 해결사는 자기한테 있다는 거, 그거를 꼭 믿으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질문하실 분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여): 스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질문이 두 가지 있어서 왔습니다. 한 가지는 질문이 아니고 제가 애원을 드리러 왔습니다. 뒤에 있는 이 애기가 동생 애기거든요. 그런데 얘가 계속 가출을 하고 있거든요, 초등학교 육학년인데요.
스님: 그런 거는요, 날마다 11시부터 이렇게 여러분이 오십니다. 그때 말씀을 하세요.
질문자1(여): 그때 말씀드리고 그래서 스님이 관하라고 가르쳐주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안되고 그래서 동생은 제가 스님 한 번 더 찾아 뵙고 스님한테 말씀드려라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스님한테 말씀드리기조차도 창피스럽다고 안 나가더라고요. 그래 제가 어쩝니까, 언닌데.
스님: 그 말이 왜 이렇게 안 들립니까?
질문자1(여): 그래 동생 애긴데 동생은 애가 나가면 저한테 전화해서 울면서 그러거든요. 애 또 나가버렸다고요. 나가면 밤새고 들어올 때도 있고 아니면 그 다음날 새벽에 들어올 때도 있고 이러거든요. 그래서 스님 친견하고도 안되고 또 동생이 재를 올린다 그래서 재도 올렸거든요. 그런데도 안되고 이러니까 저도 동생한테 어떻게 가르쳐줄지를 모르겠습니다, 스님.
스님: 이거 봐요.
질문자1(여): 예.
스님: 동생이라고 그랬어요?
질문자1(여): 동생 애기….
스님: 나중에 얘기하세요. 그런 건 한두 마디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러고도 또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질문자1(여): 그리고 스님, 두번째 질문 드리겠습니다. 어젯밤에 꿈을 꾼 거를 제가 스님한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스님: 내가 한마디 묻겠어요.
질문자1(여): 예.
스님: 어디서 사십니까?
질문자1(여): 대구서 왔습니다.
스님: 여기, 그럼 대구에 오신 지 얼마나 됐습니까?
질문자1(여): 제가 나온 지는 삼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스님: 삼 년이 넘었는데 말씀하시는 것 들으니까 상당히 미흡하신데요.
질문자1(여): 중간에 게으름 많이 피웠습니다.
스님: 삼 년이 되면 뭘 합니까? 예?
대중: 잘 안 들립니다.
스님: 뭐? 그러면 나중에 얘기하세요.
질문자1(여): 그러면 스님, 어제 밤에 꿈 말씀 좀 드리고 싶은데요.
스님: 아니 꿈이 무슨, 지금도 꿈입니다, 이거! 하하. 이따가 시원하게 말씀하시고 가세요. 그렇게 하세요.

질문자2(남): 스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왕십리에서 왔습니다. 사실은 제가 마음공부를 하게 된 거는 작년 8월부터입니다. 신촌에 있는 만덕사란 절에서 청년 불자들이 모여갖고 공부를 하는 모임인데요, 여기 선원에 계시는 스님이 지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작년 8월부터 마음공부를 알게 되고 지금 와서는 많은 체험을 하지는 못했지만 제가 불교신자로서의 보람을 조금씩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정말로 감사드리고요,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좀 외람되지만 제가 여기 선원에 나오면서 스님에 관해서 두 가지의 상반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거하고 또 하나는 여자 문젠데요, 첫번째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사실 여기 선원에 다니게 되면서 제가 여기까지 질문하게 되는 것 자체도 저의 뜻이 아니고 한마음 주인공의 뜻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 선원에 나오다 보니까 제가 대행 스님에 대해서 한 가지 좀 나쁘게 생각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스님께서는 방법면에서 실제로 그렇지 않으시지만 많은 제자들과 그리고 저희 신도들을 함께 이끌어주시는 걸 보면 실제로는 크나큰 권위와 카리스마를 갖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좀 외람되지만 사교 집단의 교주와 같은 느낌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렇게 또 생각을 해보면 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이 자기 속에 있는 주인공을 믿고 의지하라고 하니까 그런 걸 생각할 때는 또 그런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런 두 가지 마음이 항상 스님한테 같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여자….
저기 다름이 아니라 제가 얼마 전에 한 여자를 알게 됐는데요, 마음이 참 이쁜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 비록 다르더라도 상대편의 마음을 따라서 같이 해줄 수 있는 그런 여자를 알게 됐는데 사실은 제가 그 여자를 알게 되고 나서 주인공한테 항상 관을 했습니다. 사실은 그전까지는 마음에 있는 여자가 나타나면 저 여자만이 된다, 다른 여잔 안 된다, 그리고 그 여자를 놓치면 어떻게 되나 이러한 집착과 조급함을 가지고서 제 생각만 따라갖고 조급하게 다가감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주인공한테 맡기고 그러다 보니까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너무 쉽게 되면 재미없지 않느냐. 좀 너무 잘되게도 하지 마라. 적당히 좀 어렵게 해라.’ 이런 생각이 들고요. 그 다음에 제가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평생의 동지로서 가족을 한번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큰스님께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그 여자가 저한테 맞느냐 안 맞느냐, 맞으면 맞게 그리고 저한테 어울리지 않으면 어울리지 않게 한마음을 좀 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호에 계속)
2008-04-14 오전 10: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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