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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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기 중심, 심봉처에 의지하고 돌아가라!
근심과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스님, 저는 지난 제 삶의 기억 때문에 무척이나 괴롭습니다. 지난 기억만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너무나도 잘못 살아온 것 같기만 합니다. 항상 인간관계나 여러 가지 것들 때문에 괴로움이 잘 날이 없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근심 고통을 만날 때는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 무엇을 의지하고 무슨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요?
탤런트가 영화를 하다가 영화가 막이 내리면 그뿐이듯이 인생도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다만 오직 자기 중심, 심봉처를 의지해라, 의지하고 돌아가라 합니다. 바람에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인생살이가 돌아가니까 가운데 중심, 그걸 쥐고선 바퀴가 돌아가듯이 심봉을 쥐고서, 심봉은 끄떡도 안 하고 힘을 배출하기 때문에 그 힘을 바로 잡고서 인생이 돌아가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선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잘하고 못하고, 못나고 잘나고, 여자고 남자고, 낮고 높고, 잘살고 못살고 이걸 떠나서, 오직 내 심봉을 딱 쥐고서 그대로 흘러가듯이 돌아갑니다. 이 심봉을 의지한다면 바퀴가 이탈되지 않으니깐요.
그런데 거기에다가만 그렇게, 심중을 굳히고 의지할 수 있는 데는 여기밖에 없다 하고 의지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의지하는 마음보다도 욕심 찬 마음, 탐심, 치심이 더 성하니 될 법이나 합니까. 또 바깥으로 간섭하는 거는 뭐 이루 말할 수도 없죠. 저기 똥 굴러가는 거를 봐도 저 똥이 어디로 굴러가느냐고 또 야단이에요. 허허 참 내! 아이, 어디로 굴러가든지 무슨 상관이에요? 아, 새들도 뭐 먹을 거를 뿌려 주면요, 사람이 안 다니는 데부터 먹어요. 그리고 사람이 다니는 데는 좀 주춤하고 물러서 있다가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면 와서 다 먹어요. 그렇게 영묘한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아리송하시죠? 이렇게 말씀을 해 드려도 아리송하시죠? 한 가질 보면 열 가질 안다고, 우리가 현재의 살림살이를 그렇게 하고 사시면서도 왜 아리송합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그냥 화해서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거를 느끼고 알고 하면서 왜 그게 아리송하냐 이겁니다. 그 생각 하나만 ‘아, 이렇구나! 이러니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하고 탁 놓는다면 그냥 그냥 그대로입니다. 찰나입니다, 그냥!
부처님이 나를 깨치게 해서 올려 주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여러분한테 행복을 갖다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빼앗아 가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업이 많아서 누가 빼앗아 가는 것도 없습니다. 빼앗아 갈 사이가 있어야죠. 그리고 갖다 줄 사이도 없단 말입니다. 자기가 그대로 그냥 그냥 하는 대로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보는 대로 날아가고, 하는 대로 날아가고, 듣는 대로 날아가고 도무지 내가 했다 내가 안 했다 할 수가 없게끔 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어려움이 크게 나한테 벌어졌다, 병고가 생겼다, 뭐 어두움이 다가왔다 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살아오던 관습과 집착과 욕심에 의해서 착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묻지 마라. 미래도 생각지 마라. 오늘도 공했다. 공했으니까 찰나찰나 가 버리는 것에 착을 두지 말라.’ 그랬는데 그것에 착을 가지고선 온통 작년에는 어땠느니 올해는 어땠느니 하고 말입니다. 물론 얘기야 하시겠지만 함이 없이 얘기하고, 속에다가 착을 두고 욕심 두고 그럭하지 말고, 그대로 평범하게 ‘아, 작년에는 이렇게 이렇게 했으니까, 올해는 이렇게 이렇게 해 나가야 되지 않겠어?’ 하고 말을 여여하게 그대로 해라 이겁니다. 꼭 하나 문제가 되는 게 그 생각입니다. 업도 붙을 자리가 없고 고도 붙을 자리가 없고, 병도 붙을 자리가 없고 아무것도 붙을 자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냥 이 심봉을 붙들고 의지하라고 그랬더니 그 생각으로 붙잡고는, 심봉은 주인공이라는 이름만 부르고 정작 붙드는 거는 그 고를 붙드는 거예요. ‘심봉을 의지하고선 바퀴는 돌아가라. 여여하게 돌아가라.’ 그랬더니 심봉은 이름만 부르고, 고를 붙들고 그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걸 놓고 불러야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지하고 부르는 그것도 말일 뿐이죠. 생각으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일거수일투족 거기다 의지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감사함도 거기 있고 즐거움도 거기 있고, 같이 붙들고 울 수도 있고, 뭐 매사 거를 다 할 수 있는 것이 그 보배입니다, 보배!
그러니 이 심봉을 반야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기 주처라고도 할 수 있고, 자아라고도 할 수 있고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부처라고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이름이 다양합니다. 다만 그 의지처만 의지하면서 오직 내가 함이 없이 하면서 돌아간다면 여러분이 한 찰나에 그냥 그대로 그대로 자연스럽게 여여하게 사는 겁니다. 여여한 삶의 보람을 갖는 겁니다.

놓는 것과 포기하는 것!
스님의 자비 가득하신 행보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 해 보지도 못했으면서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포기하듯이 놓는 것 아니냐고 말들을 합니다. 스님, 놓아 버리는 것(방하착)과 포기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여기 내 몸속에 천차만별로 모습을 해 가지고 내 식구들이 있는데 왜 한마음이라고 그러는 줄 아십니까? 내 식구들이 지금 몸에 수십억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수십억 마리가 모습은 각각일지언정 생명은 같고, 내 마음 가는 대로 몸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이 다 따라 줍니다. 그 묘한 법을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여왕벌 하나가 움직이면 벌들이 그냥 다 따라가듯 하고, 국방부장관이 명령하듯 합니다. 국방부장관의 명령이 한번 떨어졌다 하면 뭐, 그건 일사천리니까요.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문지기가 지키고 있으면서 탁탁 치는 겁니다. 그럼 법에 의해서 못 들어가는 거죠.
그렇듯이 이 몸뚱이의 모든 생명들은 내 한생각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다가 망하면 여러분은 ‘아이고, 이제는 죽었구나!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는 신경을 쓰고 속이 상해서 술을 마시고 이러니까 속에 있는 생명체들도 다 타락을 하는 겁니다. 타락을 했으니 몸에 병이 안 날 수가 있나요? 병나서 고통스럽고 식구들도 다 고통스럽게 만들고, 마음이 괴로우니 화합하지 못하고 단란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글쎄, 하늘이 무너져서 금방 굶어 죽게 된다 하더라도 왜 타락을 합니까? 그것도 주인공이 한 건데, 자기가 한 건데 말입니다. 자기가 안되게도 했지만 안되게 했으면 잘되게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도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으니까 겁을 내는 겁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삶의 보람을 느끼려면 그런 거에 얽매이지 마세요. 주인공이 모든 것을 들이고 내는 것이니까요. 가난함도 가난치 않음도, 어떠한 일이 생기는 것도 안 생기는 것도, 아픈 것도 안 아픈 것도 모든 일체를 거기서 하는 거니까 네놈이 알아서 하라 하고 놓으세요. 이열치열이 있죠, 왜? ‘네놈이 이 세상에 네 몸을 내놓고 이렇게 돌아가게 만들었으니 네놈이 해라.’ 이거예요. ‘네놈이 이 몸뚱이도 만들어 놨으니까 네놈이 알아서 해!’ 이렇게 그냥 놔 버려요. 모든 걸 그렇게 믿고 놔 버리세요. 포기하는 놔 버림이 아니라 믿고 놔 버리세요. 잘하고 못하고 죽고 사는 건 너한테 달렸으니 네가 해라 이거예요. ‘난, 몸뚱이는 너 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야.’ 하고요. 그리고 내가 오관을 통해서 바깥의 좋고 그른 거를 다 들여 주기는 한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문간의 문지기나 한가지예요. 보고 듣고 들여 주는 거요, 마음속에. 문지기가 들여 주면 또 안에서 문지기를 통해서 내주죠. 그러니 모두가 둘이 아니에요.
내 한생각에 오장이 꼬여서 틀어진 것도 펼 수 있고, 오장을 꼬이게 해서 피도 통하지 않게끔 만들어 놓을 수도 있어요. 왜 여러분이 그렇게 해 놓고 그냥 병원에 가고, 또 딴 데 가서 갖은 약을 다 써서 오히려 부작용이 나게 해 가지고 이 몸뚱이를, 집을 못 쓰게 만들어 놔요? 진짜 목수한테 맡기지 않고 가(假) 목수한테 맡겨 놓으니까 저희들 좋은 대로 만들어 놓은 거죠. 그런데 내가 살아가는데 나에게 좋아야지 딴 사람에게 좋아서 되겠습니까? 그렇듯이 여러분은 자기 집을 자기가 지키고 스스로 움직이게 해서 모든 점에서 빛나게 살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죠.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좌선시에 졸음이 오는데!
얼마 전에 스님의 가르침을 책을 통해 알게 되고 혼자서 그 가르침에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혼자 좌선을 하고 있으면 이런저런 느낌들도 나오고 그럴 때마다 속으로 한마음을 찾고 맡기고 맡기고 그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름이 아니라 혼자 그렇게 앉아 있다 보면 종국에는 졸음이 옵니다. 그러면 전 대체로 그냥 자버립니다. 그럴 때 그 졸음을 관하면서 이겨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옛날에 선지식들께서 망상과 졸음, 그 두 가지를 상당히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관(觀)할 때는 반드시 졸지를 말아야 하고 망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망상과 졸음을 얘기한다면, 그 졸리고 망상이 난다는 걸림에 걸려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잔다 깬다, 잔다 자지 않는다’가 붙어서는 선(禪)에 즉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망상이다, 망상이 아니다’라는 게 붙으면 거기 직결되지 못합니다.
물론 초발심(初發心) 때는 자경문(自警文)도 읽고, 계율도 엄하게 지켜야 하고 또 망상도 물리치고 졸음도 물리쳐야 되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가 살아나가는 관습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옛 조사들의 뒷발자취를 좇아가도 아니 되고, 못났든 잘났든 자기 발자취가 얼마만큼이나 컸나, 한 짝이 크고 한 짝이 작으니까 한 짝을 얼마나 키웠나 하는 것입니다.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금 불바퀴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네 생활도 다 돌아가고 있습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를 처음부터 졸음을 금하면서 칼을 목에다 대고 하느니보다 모든 것이, 자는 것도 깨는 것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몽땅 생활 자체가 그대로 참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나로 인해서 세상이 벌어진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면 나로부터 벌어졌으니까 나로부터 알아야 하지 않나? ‘졸린다, 졸리지 않다, 졸음을 쫓아야겠다’ 하는 것도 거기 놓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직결로 들어가는 코스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함으로써 이 ‘나’라는 혹성의 본래자성불(本來自性佛)은 그대로 둘이 아니게 얽혀서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감응이 되고 생각이 깊어집니다. 이 말을 또 해야 되겠군요. 말하자면 ‘부모에게 몸을 받는다’ 하는 것은 집만 받은 겁니다. 자기 나오기 이전 영혼과 나오기 이전에 살 때에 악업 선업을 지은 그 인연들이 전부 내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몸속으로 한데 부합이 됩니다. 부합이 되면 그 안에 있는 중생들은 잘되고 잘못되고 그걸 모릅니다. 악업 짓고 선업 지은 그 인연에 따라서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게 그것만이 아주 입력이 돼서 현실로 착착 나옵니다, 현실로. 그것들이 자꾸 나오니까 사람도 죽이게 하고, 강도질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되고, 또는 선한 일도 하게 하고, 욕도 하게 하고, 화도 나게 하고, 병도 오게 하고, 애고도 오게 하고…,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다가오는 그 모든 고를 말입니다.
그러면 그거를 어떻게 해야 녹일 수 있는가! 이 주인공에 놓는 것을 용광로라고도 하고, 불바퀴에 닿기만 하면 탄다고도 합니다. 그것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거기서 일어나는 대로 수없이 일어나는 마음에 왜 간섭을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깐 일어나는 대로, 모든 거를 그 불바퀴에 놔라 이겁니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주인공입니다. 모든 것이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 ‘주인공에서 해결할 수 있다. 주인공에서 낫게 할 수 있다. 주인공에서 이끌어 줄 수 있다. 나 아닌 나가 있다고 깨닫게 하는 것도 주인공이다.’ 하고 진실하게 구하고 진실하게 내가 있다는 소식을 가져오게 하는 거지, 이것이 벌써 졸린다 하면 졸리지 않은 게 따라붙고 망상이다 하면 망상이 아닌 것이 따라붙죠.
이러니깐 수박을 놓고선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 봐도 도무지 그 수박의 맛이 나오지 않고, 첫째로 과거의 씨가 현실의 씨가 됐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씨를 찾으려고 자꾸 과거로만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현상만 생기는 겁니다. 이 모두가 생각해 보면 사람의 한생각에 몰락 벗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돈오다 점수다 할 것이 없이 말입니다. 그것도 이름일 뿐이지만.
여러분께서 스스로 나와 내가 상봉을 해야 그때부터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에 초발심에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고, 셋째도 죽어야 한다. 내가 항상 그런 말을 하죠. 내 집에 전화부터 놔야 남의 집에서 전화도 오고 남의 집으로 전화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해서 통하는 것이지 그럭하지 않는다면, 아니 내 집에 전화도 놓지 않고 전화 올 때를 바라고 전화할 것을 원하고 있으면 그게 됩니까? 천년만년 있어도 안 됩니다.
내가 어두우면 불을 켜는 법이요, 또는 없어서 고생을 하면 일을 하는 법이요. 안 그렇습니까? 졸리면 자는 법이요, 배고프면 먹는 법이요, 똥이 마려우면, 소통이 돼야 하니까 똥을 누는 법이요. 거기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이 모두가. ‘망상이다 망상이 아니다’라는 게 붙으면 직결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조들께서는 진실하게 일념으로 구했습니다. 진실한 일념, 진실한 일념으로 구해야 구해지고, 진실한 일념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나’ 라는 자체에 있다는 그 소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더 높은 차원으로 등장하려면…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된 환영에 불과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마음공부가 산 세상뿐 아니라 죽은 세상에서도 벗어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렇지만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 내가 만약에 한 차원 넘어선다면 좋을 텐데 마음의 중심을 놓쳐서 낮은 차원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스님, 어떻게 마음을 내고 공부해 나가야 사후에 더 높은 차원으로 등장할 수 있을까요?
내가 만약에 여러분한테 들은 글귀로만 이렇게 얘기를 한다면, 이 말 자체가 모두 한데로 떨어질 것입니다. 나는 거짓을 안 합니다. 한마디라도 내가 실험하고 체험하지 않고 하는 얘기는 없습니다. 알고 본다면 한마디도 한 게 없고, 한마디도 한 게 없는가 하면 한생각 한 것도 없고 한 행동 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잘 터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불교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하죠? 저 언덕을 넘어서 만납시다, 또는 요단강을 건너서 만납시다 이러죠? 저편 언덕 뒤에는 항상 밝음이 있고 항상 생수가 있으니 그걸 없다고는 못하죠. 끝없는 밝음이 있기 때문에 컴컴하다 밝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가 있노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여러분은 이 물질세계에 끄달리다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세 마디로 규정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만약에 큰 독사가 여기에 있다고 합시다. 또 거위가 지렁이로 변해서 아주 커다랗게 돼 가지고 곤충이나 세균이 전부 나와서 그냥 늘비하게 있다고 합시다. 또 거기 들어가면 머릴 풀어 산발한 귀신들이 있다 합시다. 그렇다면 의식적으로 벌써 ‘어이쿠!’ 하겠죠? 거기 들어가겠습니까? 내 마음이 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독사한테 물리면 죽는다, 안기면 맞아 죽는다, 또는 귀신한테 말려 죽는다 그럴 겁니다. 모두 징그럽게만 보이고 똥통의 구더기는 그냥 여지없이 크게 보이고, 내 이 사대(四大)가 다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도 내가 배우지 못한 영혼이라면 그냥 거길 못 건너갑니다, 일차적으로.
그럼 이차적은 뭐냐? 기독교 가톨릭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했습니다. 불교에서는 ‘강을 건너 저 언덕에서 우리 같이 한자리를 하고 만납시다.’ 했습니다. 그랬는데 이게 물질세계의 의식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이 도리를 모르면 자기가 그냥 몸이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니 오백 생을 기다린다 할지라도 배가 옵니까? 내 의식이 저 강에 들어가면 물이 깊어서 빠져 죽는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배가 오지 않으면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생각 끄떡 하면 찰나에 갈 것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지금 과학적으로 본다면 블랙홀이라고 한다지만, 부처님께서는 불바퀴라고 했습니다. 그 불바퀴가 세 번째 단계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통로를 넘지 못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벌써 중생들은 거기를 넘어갈 때 타 죽을까 봐 뜨거워서 못 들어갑니다. 벌써 내가 물질세계에서의 그 의식이 꽉 차 있기 때문에, 내가 몸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나 아닌 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통로인데도 뜨거워서 죽을 이유도 없고 뜨거울 이유도 없고, 간다 온다 할 까닭도 없고, 어딜 들어간다 하더라도 들어가는 사이가 없고, 나온다 하더라도 나오는 사이가 없건만, 그대로 여여하게 뚫리고 그대로 여여하건만 몸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첫번에 벌써 내 이 몸속에 있는 그 의식들이 전부 모습을 그렇게 해 가지고 보이니 그 길을 못 간다는 얘기죠. 그게 딴 데서 와서 보이는 게 아닙니다. 이 몸뚱이가 사대로 흩어지니까 내 몸속에서 그 영혼들이 말입니다, 그 의식들이 그냥 쫙 앞을 가리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러한 것이 딱 보일 때 중심을 잡고서 ‘허, 너와 나와 둘이 아닌데….’ 하고서 딱 한생각을 넘기면 그냥 다 보살로 화하고 부처로 화할 텐데, 이건 한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그냥 넘질 못하죠. 재차 말하지만 빠져 죽을까 봐 넘지 못하고, 배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타 죽을까 봐 그 불바퀴 속을 못 들어간다 이겁니다. 그러니 그 도리밖에 없거든요. 우리의 이 마음, 내 마음 빼놓고는 부처를 이룰 수가 없고 내 마음 빼놓고는 도저히 앞뒤 뚫린 용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본래는 여여하고 열려 있는데 자기 생각이 딱 닫아 놓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미운 걸 보면 그렇게 밉고, 잘못하는 걸 보면 그렇게 보기 싫고, 또 부부지간도 그렇고 자식지간도 그렇고 일일이 그거를 미워해요, 잘못하는 걸 보면. 그러나 예쁜 일을 조금 할 때는 좋아서 그냥 발발발발 하고, 누가 좋은 말을 해 주면 좋고, 속이야 어떻게 됐든지 좋은 말을 야불야불 해 주면 아주 좋아하고, 진실로 ‘너는 이렇다’ 지적을 해 주면 그게 듣기 싫어서 왈칵 화가 나고, ‘너 두고 보자’ 이러고 말입니다. 이러는 마음이 자기를 깎아먹게 돼요. 이 세상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있으니깐 모두 내 탓으로 돌리라는 거죠. 그래야만이 내가 공해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요.
불(佛)은 뭐냐. 불바퀴는 왜 불바퀴라고 그랬느냐. 그냥 생명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이 바로 영원하기 때문에 불바퀴라고 했습니다. 불이라고 한 것은 여러분의 생명의 근본, 즉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걸 불이라고 했다 이겁니다. 본래 자성불은 있는 건데, 자기 자성불에서 모든 거를, 나고 드는 것이 전부 그 능력으로 나오는 건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성불은 믿지 않고 저기 계신 딴 부처님을 믿고선 ‘부처님! 날 좀 잘되게 해 주시오.’ 하는데 그건 기복이지 공덕이 아니에요. 공덕이라는 건 무엇 때문에 공덕인가. 한마음으로 돌아가야 공덕이 아닌가. 나 아님이 없으니까 내가 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내 아픔 아닌 것이 없고 내 몸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그게 공덕이 안되겠나. 일체제불과 일체 보살, 역대 조사가, 역대 중생이 진드기 하나 버리지 않고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래서 그 한마음마저 없다는 사실은 한마음이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부처님께서 한마음을 내실 때에 보살로서 화해서, 법신으로 화하시고 그래서 남이 응해 달라는 대로 응해 주시는, 한마음이 돼 주시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큰 호랑이가, 큰 소가, 큰 코끼리가 또는 독사라는 이름을 가졌어도, 어떤 사람이 백정 노릇을 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아! 부처님한테 귀의해서 내 마음 가운데 항상 넣고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이면 그대로 한마음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일을 할 적에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어설 때나 앉을 때나, 바로 내 부처가 내 마음 속에 있는 한마음의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때, 뭐든지 거기다 놓고 갈 때, 모든 걸 놓고 아주 잔잔하게 한데 한생각을 일으키면 그게 법이 된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하면 일체제불이, 일체 보살이, 일체 조사가 다 그냥 한마음으로 들어서, 한 찰나에 드셔서 그 묘법을 가르쳐 주시고 한 찰나에 나신다 이거예요.
이 묘한 도리를, 이 무심도법(無心道法)을 여러분이 그렇게 갑자기, 도심으로써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터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는 것은 아마 나보다도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알기만 하면 뭘 합니까? 행하는 게 문제죠. 백 가지 천 가지를 안다 하더라도 한 가지 행을 못한다면, 그건 한 가지 행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사람은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모습을 바꿀 때는 하나도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칠 게 없이 다 놓고 갑니다. 하나도 가지고 가는 게 없습니다. 재물이나 보물은 방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지고, 집이 아무리 좋아도 대문 안에서 인사를 할 것이고, 친척 부부 지간이나 아무리 좋은 친구다 할지라도 동구 바깥에서 인사를 할 겁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업식은 그림자처럼 따라갈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업식을 짊어지고 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다면 그 고초는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으면 그만이지 하지 마시고 꼭 알아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차원을 높여서 꼭 진실로써 한 걸음 한 걸음, 조그맣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떼 놓을 때에 진실한 실천궁행이 되도록 이렇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2008-04-07 오전 9: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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