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원망했던 선생님 오히려 감사”
돈 없는 설움
박씨는 어렸을 때의 서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산골에서 살던 그의 아버지는 지병을 앓다가 박씨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장례식날 그는 슬피 울면서도 막상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를 보면 “불쌍한 것”하고 말하곤 하였다. 친척들도 “어떡하나, 거 참”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아이와 싸우고 울며 들어오자 어머니는 무섭게 화를 내었다. “너 남을 때렸니!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서 버릇없이 큰다는 말 들으면 안 돼!” 그 때 처음으로 박씨는 똑같은 행동도 아버지가 안 계시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부터는 조심하게 되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박씨 집 형편은 무척 어려웠다. 그나마 조금 있던 돈도 아버지 지병을 치료하는 동안 다 들어가 빚이 많아진 것이었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간 후 박씨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돈이 없어 육성회비를 낼 수가 없었다. 한 달, 두 달이 밀리자 담임선생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일 남의 집 일을 하시는 어머니가 낮에 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박씨는 차마 어머니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설사 말한다 한들 어머니는 육성회비 낼 돈이 없을 것이다. ‘마음만 더 아프실 텐데’ 하며 그냥 학교에 갔다.
전설적 노력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박씨를 앞으로 불렀다. “이 놈, 넌 육성회비가 밀렸어. 그런데 반성도 안 해!” 하고는 앞에 있던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그 슬리퍼로 선생님은 박씨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어린 박씨는 너무 놀랐다. 뺨도 아팠지만 모든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맞고 있는 것이 창피하고 슬펐다. 문득 내가 왜 맞아야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는 건 내 잘못이 아닌데, 하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왜 무슨 사정이 있어 못 내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을까. 그날 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 때부터 박씨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여전히 돈은 없었다. 비용을 내지 못해 수학여행조차 갈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눈물을 삼키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에 가자 성적이 상위권에 들면서 선생님들이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렵게 학비를 벌면서 지방대학에 다녔다. ‘독하게 공부한다’는 말을 줄곧 들었다. 말단으로 취직한 회사에서 돈도 인맥도 없이 오직 진실하게 노력했다. 너무 열심히 하는 것이 사장 눈에 들어 고속승진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인맥하나 없이 그리고 학연도 내세울 것 없는 지방대를 나와 이사자리에까지 오른 박씨는 그 회사의 전설이 되고 있다고 한다.
고는 나를 위한 것
이제야 ‘고가 고가 아니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 때 담임선생님에게 맞은 것, 그 수치감과 서러움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아픔이 배고픈 것도 잊고 놀고 싶은 것도 잊고 공부에 몰두하게 한 셈이었다. “솔직히 오랫동안 그 선생님을 원망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저를 채찍질하기 위해 나투신 관세음보살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마음을 바꾸기까지는 무척 많은 눈물과 땀과 가슴 저린 아픔이 있었다. 신실한 불자로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열심인 박씨는 누구도 슬프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한 가지 걱정은 좀 오래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이제 중년인 그는 씩씩하고 밝게 크는 두 아들을 보면 가끔 목이 메인다. 마흔도 안 되어 돌아가신 아버지, 그 때문에 겪은 설움을 생각하면 자신은 오래오래 살아야겠다고 발원하곤 한다.
“사실 일찍 가신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었지요. 그러나 제가 애비 입장이 되어보니 아버지가 어린 자식들을 두고 얼마나 눈을 감기 어려우셨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 심정을 알 것 같아요. 못 다하신 아버지 몫까지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어요.” 인연법을 알게 된 그는 이제 조상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잊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다.
황수경(동국대 선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