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쥐머리 새우깡 여파가 확산일로다. 분노한 시민들은 새우깡 봉지에 생쥐사진을 담고, ‘생쥐깡’이라고 표기한 패러디물을 만들 정도다. 이 상품이 특별히 집중적으로 비난받는 이유는 사후처리 문제 때문이다. 처음 발견한 소비자의 신고를 받은 후 무려 한 달 가까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이다.
이 사건이후 지렁이 단팥빵, 벨트조각 쌀과자, 칼참치, 곰팡이밥 등 듣기조차 민망한 일련의 서민형 먹을거리와 관련한 위생 안전사고가 잇따라 이어지고 있다. 식품업체마다 안전사고 재발방지를 위해 사력을 쏟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스낵(snack)이란 단어는 가벼운 식사를 가리킨다. 1957년 경식(輕食)을 지칭하는 ‘스낙쿠’라는 말로 일본에서 유행한 이래 우리나라에 건너와서는 부담 없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이나 군것질 식품을 뜻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1960~1970년대 산업화가 한참 진행되던 시기에 간식용 과자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어려웠던 보릿고개가 끝날 무렵 정부의 분식장려 정책과도 맞물려 스낵류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산다. 먹을거리의 경우 삶의 기본 조건이며 식품회사는 어떤 상품보다도 깊은 책임감을 갖추어야 한다. 소비자와의 생명을 담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업은 과연 그러한 책무를 다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유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앵무새처럼 재발 방지책을 내놓지만 잠시 그때뿐이다. 언제까지 마냥 기업가의 양심에만 의지하고 살아야 되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국산품인줄 알았던 새우깡이 중국에서 반죽을 만들고 새우깡 모양으로 커팅을 한 반제품으로 들여온다는 사실도 소비자들로서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재료 원산지 표시와 반제품 제조국 중 한 곳만 표시하면 된다는 규정자체가 편법을 조장하게 한다는 것도 우습다.
이참에 반제품 제조국도 반드시 표시하도록 규정을 바꾸고 강력한 처벌조항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새우깡의 짭조름하고 바삭한 맛으로 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애용해 온 국민 스낵이라는데 분노가 더욱 커지고 있다. 노래방이나 소풍 따위로 새우깡하면 떠오르는 추억을 한 두 개쯤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손이가요. 손이가. 자꾸자꾸 손이 가”라는 중독성에, 가난한 서민들의 술자리 안주로도 한몫했던 과자가 아니었던가.
소설가 최재경씨는 자신의 소설 <숨 쉬는 새우깡>에서 새우깡 개발자인 남자가 과자의 완성을 앞두고 억울하게 죽은 뒤 그 영혼이 여자아이에게 깃든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여자아이는 새우깡과 함께 태어나 새우깡을 먹으며 자란다. 여자아이의 역사는 새우깡의 역사이자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문화사이기도 하다.
이런 새우깡이니 파문이 단순히 먹을거리의 불안에 대한 차원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온다. 새우깡이 불러오는 한 시대, 혹은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의 한 조각이 훼손된 듯한 상실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