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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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상상력 감각의 바다와 만나다
햇볕이 유난히 따스하다고 느낀 날 문득 목련나무가지에 눈이 갔다. 겨우내 단단한 털옷을 걸치고 있던 목련은 살며시 연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햇살이 간지러운 게지….’ 겨울눈이 미소 짓는다는 상상을 하며 나도 따라 입 꼬리를 올려 본다. 봄기운에 나도 모르게 시인 흉내를 낸 것은 음악의 신 건달바의 연주에 마하가섭이 춤 춘 것과 같은, 봄과 나의 반가운 인연이 서로를 맞이하기 때문이리라.
시 안에는 상상의 세계가 있고, 상상의 세계는 시를 통해 구현된다. 문지문화원 사이의 봄 아카데미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로 비상해 보려는 이들로 분주했다.
그 가운데 이원 시인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봄날 우연히 마주친 목련의 미소와 같은 이유 아닐까.

상상력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시는 커다란 장르로 따지면 문학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문학은 예술의 한 방식이지요. 우리가 문학적이라고 말할 때는 언제일까요. ‘색즉시공’이라는 영화는 문학적인가요, 비문학적인가요?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지 않습니다. 제목은 전체 내용에 대한 하나의 장식일 뿐 문학과는 거리가 먼 듯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서 젊은 남녀가 나누는 진실한 연애에 관한 물음은 이 작품을 문학으로 평가하게 합니다. 색즉시공이란 젊은 여성과 남성의 젊은 연애를 대변한다는 것이 감독의 제작 의도인 것입니다. 반면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대다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문학적이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이 여자의 이런 삶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의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지요. 상당히 고리타분하고 지루하지요. 이것이 문학입니다. 인간의 삶, 실존의 물음이 바로 문학의 존재이유입니다. 인간 인류역사에 문학이 존재하는 것은 텍스트 유형의 변화일 뿐 인류가 지속되는 한 문학도 존속합니다.

의 세계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위의 시를 읽고 시의 제목(의 세계)으로 처음 연상되는 단어를 네모 안에 써 봅시다. 둘만의 세상이 너무 좋아서 이 상태가 지속되고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상황입니다. 수평선과 같은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아오를 때 현실로 다시 환기됩니다. 이상의 무의식에 호소하는 감각 이미지의 시를 쓴 사람은 시인 김행숙입니다. 시의 제목은 ‘다정함의 세계’입니다. 다시 한 번 시를 느껴 보십시오. 다정함의 세계로 향하는 느낌이 느껴지는지요. 언어적 형태에 느낌이 있는 감각의 시입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은 참 중요하면서도 어렵습니다. 분야별 개발서가 서점에서 꾸준히 팔려나가는 것이 이런 상황을 증명합니다. 드라마 ‘김삼순’에서 나온 대사입니다만, “죽는 것을 알면서도 살잖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 시대 이 지상에 왜 존재하고, 자아란 무엇일까’라는 실존의 물음은 시적인 표현과 비유로 드러납니다. 실존이 드러나지 않으면 문학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약간의 환상성을 지니고 스스로 다치지 않을 만큼 포장하기 때문에 자아와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시를 쓸 때는 꼭 물어보십시오. ‘나는 마지막에 무엇을 묻고 있는가’를 확인해야합니다. TV드라마는 상업성과 대중성이라는 보편타당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공통 관심사를 다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적이기 힘듭니다. 이 점이 시와 구별되는 차이점입니다. 최종적으로 질문하는 나와 가까워지는 방법, 그것이 바로 시를 쓰는 방법입니다.
시를 쓸 때는 시적 사고가 먼저 선행되고 시적 표현을 합니다. 예를 들면, 큰스님이나 마더테레사 수녀와 같은 분은 항시 웃는 낯으로 찡그리는 경우를 보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오욕칠정의 동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생각의 바뀜 때문이며 실제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감정의 지속은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전부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의 순간 그 세계는 탄생됩니다. 시에 관한 고정관념으로 직접적인 삶의 표현이라거나 아름다운 것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과감하게 바꿔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상상의 세계를 맛볼 수 없습니다. 삶의 긍정이나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잘 진전되지 않는 것은 고정관념을 쉽게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바뀌는 순간 새로운 세상은 열립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온전합니다. 이미 다 갖고 있습니다. 상상력 또한 우리 안에 이미 다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감각을 열고 상상력을 펼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십시오. 개인마다 주파수가 다른 까닭입니다. 어느 순간 내안의 뭔가 꿈틀거림을 느꼈다면 그것이 내 주파수입니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반응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에 고통의 표현이 있는데 읽었을 때 왠지 슬픔을 느꼈다면 내 안에 고통의 정서가 있는 것입니다. 시적인 사고의 강조는 표현으로 그 성장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점차 시인으로서의 삶도 변화합니다.
좋은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현실과 연결되는 건강함이어야 합니다. 가정과 현실, 우연과 필연은 오른발과 왼발입니다. 시적 세계는 바로 오른발의 우연과 왼발의 필연사이에서 탄생합니다. 상상력은 그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운동입니다.
시를 쓸 때는 가장 먼저 관념어를 버려야 합니다. 관념어는 죽은 시 쓰기로 향하는 함정입니다. 다시 ‘슬픔’을 예로 들어봅니다. 슬픔의 자루는 나이와 경험에 비례한다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라는 것은 그 슬픔에 대한 구체적 감정입니다. 어떻게 슬프고, 왜 슬픈지 구체적 장면으로 쓰여 져야 합니다. 저는 어느 날 지독하게 슬픈 적이 있었는데, 목에 심한 고통이 왔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입니다만 인간의 몸에 다섯 챠크라가 있는데 슬픔과 고통의 챠크라가 목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더욱 저를 놀랍게 한 것은 슬픔의 챠크라와 함께 마치 샴쌍둥이처럼 상생하는 것이 기쁨과 환희의 챠크라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나의 활달한 사유방식으로 이 시대를 노래해 보십시오. 언어화할 수 있는 내 안의 감각의 새싹을 맘껏 틔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연숙 객원기자 omflowe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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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31 오전 11: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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