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문무왕(661~681) 때,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란 숨어 사는 두 사문(沙門)이 있어서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 먼저 극락에 가게 될 때에는 서로 알리자고 약속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숨어서 신을 삼는 것을 생업으로 처자를 데리고 살았고,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느 날, 해가 고요히 저물었을 때 창 밖에서 “나는 이미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빨리 나를 따라오게” 하는 광덕의 소리가 들렸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 소리가 들리고 광명이 땅에 뻗쳐 있었다.
다음날 엄장이 집에 찾아가 보니 과연 광덕이 죽어 있었다. 이에,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장례를 마치고 나서 엄장이 그녀에게 이르기를,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하오?” 하였다. 그 아내가 허락하여 마침내 함께 살게 되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 엄장이 정(情)을 통하려 하자 그녀가 말하기를, “그대가 서방 정토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얻으려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엄장이 놀라며, “광덕도 이미 동거했거늘 난들 어찌 안 되겠소?” 하고 물었다.
그녀가 단호히 말했다.
“광덕이 나와 십여 년을 동거하였으되 아직 단 하룻밤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거늘, 어찌 더러운 짓을 하리오?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 일념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십육관(十六觀 : 왕생극락하기 위해 닦는 16가지 관법)을 지어서, 이미 진리에 달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그 빛에 정좌하였소. 그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려고 해도 달리 어디로 가리오. 무릇 천리를 가는 자는 그 첫걸음으로써 규정할 수 있으니, 지금 그대의 신앙은 (서방이 아닌) 동방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엄장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물러나와 곧 원효 대사에게로 가서 가르침을 간절히 구하자, 원효 대사는 정관법(淨觀法: 번뇌ㆍ망상을 맑히는 관법)으로 지도하였다. 엄장은 마음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자책하며 일념으로 관을 닦아, 마침내 극락정토로 왕생했다.
<삼국유사> ‘광덕과 엄장편’에서 일연 스님은 광덕의 아내가 분황사의 종이며, 관세음보살 19응신(應身)의 한 분이라고 기록했다. 노비가 출가수행자를, 게다가 두 지아비를 교화하고 있으니 관세음보살의 응신으로 보고도 남음이 있다. 그녀는 비록 형식적인 결혼생활을 했지만, 한 방에서도 정절을 지킬 정도로 음욕을 조복(調伏)한 수행자이기에 그런 찬탄을 받을 만하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할 때 그녀는 삼독(三毒)의 불을 끈 수행의 경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수행의 목적은 관법ㆍ염불ㆍ화두 등의 방편을 통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을 항복받는 데 있다. 온갖 번뇌ㆍ망상과 분별심을 결단코 항복받을 수 있다면 37가지 수행법이 구지 필요가 없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항복기심(降伏其心)’, 즉 그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법화경>의 ‘절복기심(折伏其心: 그 마음을 절복받음)’, <화엄경>의 ‘조복기심(調伏其心: 그 마음을 조복받음)’도 같은 의미다. 부처님의 구도과정에서 나타나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즉 나무 아래서 마군을 항복 받았다는 것은 곧 그 마음의 모든 번뇌를 항복 받은 것을 뜻한다.
가장 강력한 탐욕인 음욕을 항복받지 못한 채 염불하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욕망을 항복받지 못하고서 무애행과 ‘번뇌 즉 보리’를 말한다면 그는 거짓 수행자일 뿐이다. 그 어떤 수행을 하든 물질과 정신작용으로 이뤄진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요달해, 번뇌ㆍ망상의 속박으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 6바라밀과 8정도를 닦아 마침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4상을 내려놓고 대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