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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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성의 토양
김징자
칼럼니스트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47세 한국 남자에게 시집 온 19세의 베트남 신부가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에게 맞아 죽은 사건을 판결해야했던 판사가 이런 내용의 판결문을 읽으며 눈물지었다는 기사를 읽고 마음 아파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야만성. 그렇다 이 시대에도 야만성이 문제다.
인류 발생 이후 지금까지 인간 속에 야만성은 늘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문화나 문명, 종교, 교육, 사회적 환경, 개인적 수행의 깊이 등 여러 여건에 의해 사람에 따라 그것이 마음 속 깊숙이 보이지 않게, 아니면 표면 가까이 그 존재 위치가 달라질 뿐이다.
인간 마음 속 여러 야만성에 이름이 붙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기축시대(Axial Age)’라 불리는 서기 전 몇 백 년 사이였을 것이다.
서로 간 교통이 있었든 없었든 고대문명세계 모든 지역에서 새로운 가치 체계가 형성되고 독특한 사상이 움튼 이 기적 같은 시대,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모든 성인 학자들은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라’는 불교의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의 첫 연과 비슷한 메시지들을 던졌다. 조로아스터, 노장과 공맹, 석가모니, 모세, 소크라테스 등이 그들이다.
야만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 이 대단한 눈뜸으로 인간은 자기 속 야만성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해 왔고 그동안 성과가 어떠하였든 지금도 그 가능성에 기대 야만성을 다스리려 하고 있다.
그런데, 베트남 신부 구타살해 사건 뿐 아니라 두 어린 소녀의 유괴 살해 암매장, 자신과의 결혼을 기대하고 있던 여성 일가족에 대한 어이없는 살해 암매장 등 요즘 우리 사회에 잇따르고 있는 이 끔찍한 야만성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앞에 나온 판결문의 문구처럼 ‘경제대국 문명국’에서는 좀처럼 드러나기 어려울 그 야만성이 왜 이처럼 쉽게 드러나는가?
어느 시대에서나 인간의 삶에서 안전은 최고의 요구조건이며 그 안전이 최대로 보장된 사회를 태평성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야만성이 쉽게 드러나는 사회에 안전이 보장될 리 없다. 아니 이미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불안한 사회를 살고 있으며, 낮 선 인물 뿐 아니라 이웃마저도 서로를 의심 하게 되는 그런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여기서 우선 국가 사회의 지향성을 한번쯤 점검해 보았으면 한다.
지금은 모두들 경제 우선의 기치에 들떠있다.
경제우선은 자칫 욕망 충족을 개인 영역으로 묶어 가면서 그 욕망을 한없이 확장 시켜 나가는데 몰두하고, 그런 사회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경쟁에 불을 붙이며 이를 위해 다시 터무니없는 욕망을 부추겨야하는, 그런 욕망에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생산을 늘리고 소비를 부추기는 일 뿐만 아니라 소비자 입맛에 아부하는, 그것이 비록 영상물이라 하더라도 폭력과 섹스가 쉽게 누구의 손에 나 잡힐 수 있게 하는 사회. 웰빙(Well-Being)이나 로하스(LOHAS)라는 그럴듯한 단어조차 상업성 속에서라야 꽃피게 할 수 있는 사회. 지금 우리는 못 살고 있고 그래서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 이 때문에 경제에만 솔깃한 세상. 이만하면 야만성의 토양은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에 문명이나 문화 교육 종교 그 무엇도 얄팍한 허울뿐이라면 이 끔찍한 사건들에 새삼 놀랄 수도 없는 일이다.
야만성은 터무니없는 욕망에서 나온다는 가르침은 이미 몇 천 년 전 기축시대의 가르침이다. 인간은 그 가르침들을 아직 소화해내고 있지 못한 것인가?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얼마간이라도 수정하자고 권하고 싶다.
2008-03-24 오전 9: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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