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함께하는 토요예술강좌
‘한국 근대극 100년을 돌아보며’
한국의 공연예술계가 거대 자본의 서포트를 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 영화 상업화의 후속물결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 연극의 1번지인 대학로에 나가보면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인파가 몰리는 곳은 방송국 개그의 오프라인이라 할 수 있는 소극장 몇 곳뿐이다. 그나마 방송과 영화 그리고 연극을 넘나드는 배우들의 공연장은 관객몰이를 한다. 해외의 거대 뮤지컬과 오페라가 고가의 티켓가격으로 한국의 공연예술계를 흔들었던 지난해를 돌이켜 본다.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탄탄한 기획과 제작 시스템 그리고 홍보와 차기 작품으로의 반영이라는 연결고리는 한국의 문화 경쟁력과도 연관된 문화인들의 과제이다.
배우 아닌 사람이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느낌이 색다릅니다. 평생 교육이라 하지 않던가요.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전통예술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분들이라고 봅니다. 연극이 왜 밤에 공연되는지 아시나요? 현실을 반영한 꿈을 그려내기 위함입니다. ‘심청전’만 보더라도 장님이 눈을 뜨는 환상이 연극무대에서는 현실화되지요. 지금부터 제가 강의하게 될 ‘한국의 100년 연극사’는 환상만을 그려내지 않습니다. 개화기로부터 비롯된 연극사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역사를 반만년이라는데 왜 연극사는 100년뿐일까요. 연극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한국에서 연극이란 말을 쓴 것은 근대부터 입니다. 신극 100년, 연극 100년, 근대극 100년, 다 옳은 말입니다.
그 이전에는 판소리, 광대놀이, 산대놀이라고 했지 연극이라는 용어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연극사를 정리하고자 하니 시대구분에 있어 가장 곤혹스럽습니다. 우리 연극사는 서양처럼 사조를 명확히 구분하기 힘든 까닭입니다. 우리 연극을 주도했던 이들에게 연극이란 철학이 아닌 직업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연극이라는 용어 사용이 애매한 것은 사실입니다.
1908년 지금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언저리에 있었던 극장 원각사에서 ‘은세계’를 창극으로 공연했습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한국연극 100년이 됩니다. 창극은 분명 전통극이 아닌 근대극입니다. 반면 당시의 단원들은 기존의 판소리꾼과 기생들이었습니다. 개화의 물결 속에 조금만 다르면 새로울 신(新)자를 붙였기 때문에 유행을 따라 신연극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국립 창극단의 뿌리입니다. 188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신파극이 일제의 한국침략과 함께 이 땅에 스며들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서울에는 종로통을 기준으로 명동 을지로 퇴계로 남대문 등지에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고 돈암동 성북동 계동 가회동 효자동 등 북촌은 한국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남촌 즉 명동이라든가 남대문 등에 그들이 극장을 몇 개 만들어서 자국에서 신파극 단체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19년 3ㆍ1운동은 일거에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젊은이들의 향학열로 문화 역시 지적으로 변화되면서 저급한 신파는 퇴조하고 동경유학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아마추어연극이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이들의 아마추어연극은 미숙하긴 했지만 서구의 근대극을 흉내냈고, 연극을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키려했습니다.
다행히 1930년대 들어 동경유학 출신 해외문학파들이 뭉쳤고 거기서 극예술연구회라는 본격신극단체가 탄생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서구의 근대극 수입과 그 정착을 목표로 하여 헨릭 입센(Henrik Ibsen) 등을 본격 소개했고, 극작가 유치진을 배출하여 이 땅에 사실주의 연극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로써 정통 사실주의 연극 흐름과 동양극장의 대중연극이 병존하면서 연극계는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저항적인 본격 연극은 쇠퇴하고 동양극장식의 대중연극만 번창하게 됩니다. 심지어 창극까지 일본말로 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그때의 상처는 오늘날까지 우리 연극사의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1945년 8월 민족해방을 맞음으로써 연극 또한 어둠의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해방과 함께 기존 극단들은 거의 해체되었고 새로운 극단들이 조직되기 시작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해방이었기 때문에 친일색이 없는 것들이 그대로 무대에 올려지는가 하면 새로 쓴 작품들은 거의가 식민지 시대에 마음껏 쓸 수 없었던 독립운동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좌파연극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작품들도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비판이라든가 토지개혁 문제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1946년부터는 좌우익연극으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평양으로부터의 손짓도 분주해졌습니다. 평양에는 변변한 연극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연극인들이 다수가 월북했는데 북한에서 연극인들을 배려한다는 환상과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탄압, 그리고 경쟁자들과의 인간적 갈등 같은 여러 요인의 작용 때문이었습니다.
1950년 아시아 최초로 국립극장 신협이 문을 연 것도 잠시, 한국전쟁이 터집니다. 모처럼 조성된 연극기반은 완전히 파괴됐고 피난지인 대구와 부산 광주 등에서 겨우 연극의 맥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종전과 함께 3년여 만에 서울에서 연극을 다시 할 수 있었지만 사설단체가 된 극단 신협이 겨우 연극사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게다가 영화가 대중의 인기를 끌면서 연극은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연극계의 대전환기는 1960년대입니다. 1962년 남산에 드라마센터가 개관됨으로써 연극의 중흥을 시도했습니다. 단 1년 만에 문 닫게 됐지만 이 때 전 재산을 털어 심어놓은 유치진의 씨앗은 리얼리즘 희곡의 꽃인 ‘산불’로 피어납니다. 운영과 유지의 빈곤 속에서도 인재를 양성하여 전문 배우를 키움으로써 연극아카데미가 세워졌고 서울연극학교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서울예술대학이 됐습니다. 난해한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명쾌하게 형상화해 스타연출가로 자리매김한 임영웅을 비롯해 무대미술과 의상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서양연극의 때를 벗겨버리고 가장 한국적인 연극을 제작하기 위한 고민이 활발해졌습니다. 박조열을 선두로 오태석, 윤대성 등이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시대의 이슈로 부각된 전통의 현대적 계승 내지 재창조라는 명제가 연극계를 풍미했습니다. 허규 주도의 극단 민예도 등장했고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정치성드라마라 할 마당극 운동도 광범위하게 번져갔습니다. 언론자유가 없던 시대에 마당극은 권력에 가려져있던 각종 부조리와 인권탄압 실태 등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유신독재의 종식과 함께 새 시대가 열리는 듯 했지만 또 다른 군사독재가 등장함으로써 연극계는 여전히 암흑시대를 헤매야 했습니다. 소극장들이 난립한 가운데 임영웅의 산울림소극장 개관과 오태석의 극단 목화와 극단 미추의 창단, 그리고 부산지역의 연희단거리패의 상경은 연극계의 미래를 낙관케 했습니다. 연극이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산울림소극장의 활약은 당시 연극계의 사건이었습니다. 산울림소극장이 일련의 페미니즘연극을 시도함으로써 중년의 인텔리 가정주부들을 대거 극장으로 끌어냈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들어서면 연극계가 심하게 요동을 칩니다. 대형연극, 이를테면 서양풍의 뮤지컬과 토속적인 마당놀이 같은 상업성 짙은 연극양식이 무대를 점령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정극은 겨우 소극장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춤과 음악을 주된 표현방식으로 삼은 뮤지컬과 마당놀이가 대형극장을 점령하다시피 했습니다. 신시뮤지컬은 외국뮤지컬단체와 직거래하거나 대형 인기 있는 작품들을 수입하여 관중을 끌어들였습니다. 에이콤은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등 창작뮤지컬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MBC와 극단 미추가 공동으로 추진한 마당놀이는 체육관이라든가 야외의 천막극장까지 만들어서 서양뮤지컬과 맞서기도 했습니다. ‘난타’ ‘도깨비 스톰’ ‘점프’ 등과 같은 비언어연극도 1990년대 이후에 대중에 다가간 연극양식이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건강한 정극이 있어야만 뮤지컬 형태의 연극도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문화예술계는 뮤지컬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연극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며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굴곡진 현대사만큼이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연극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또 서양의 앞선 연극양식을 수용하는 다양성 속에 우리 나름의 민족연극 양식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훌륭한 배우는 넘칠 정도로 많습니다. 한국인의 근성에 유희의 인자가 깊은 까닭입니다. 풍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특히 음악의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방자치단체는 공연예술의 지방화를 모색해야합니다. 수익성을 떠나 지역의 문화인들이 자체 제작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꿈, 우리의 사상이 담긴 진정한 우리의 연극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할 길입니다.
가연숙 객원기자 omflower@daum.net
국립극장사회교육 프로그램
일반시민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고 언제·어디서에서나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열린 교육’을 지향하며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체험활동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명사와 함께하는 토요 예술강좌’ ‘청소년 연극교실’ ‘전통무용 강좌’ 등 3개 과정을 운영한다. 자세한 사항은 국립극장 홈페이지(ntok.go.kr) 문화교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