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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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재료는 있으니 그냥 여여하게 쓰세요!
이렇게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노고가 참 컸고 또 스님의 노고도 컸습니다. 저번 날 여기 스님이 개원식에 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다른 약속도 있고 그래서 못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못 온다고 했습니다. 속으론 안 그러면서도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내가 그럭할 때는 아니꼽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때에 따라서는 슬프게 생각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너 아니면 뭐 못하랴’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생각이 없이 항상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스님에게 감사하고 또 뜻 깊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저께 보니까 쨍쨍한 햇빛 아래 잎 속으로 과실이 주렁주렁 열렸더군요. 그런데 제일 큰 과실을 하나 딱 따 보니까 안은 덜 익었어요. 그러나 거죽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근데 그 좋은 것을 왜 그렇게 흠집을 내놨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심하게 야단을 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와서 법당에 척 들어서니까 부처님 눈이 꼭 짓눌려진 것처럼 그렇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께서 야단을 좀 치라고 호통을 치시더군요. 그러니 부처님이 계시다는 증거죠. 부처님께서 화난 것도 아니고 화 안 난 것도 아니시지마는 호통을 좀 치라고 하신 뜻은 아마, 어느 거든지 다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맞부딪치지 않으면 발전이 없어서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이 없이 발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을 안 하면 부처고 생각을 했다 하면 법신이고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인데, 그걸 또 묘하게 어떻게 했느냐. 부처님을 한 분 모셔 놓으면 양옆에 문수도 있고 보현도 있습니다. 그래서 ‘삼귀의를 한다’ 이런 뜻이 되죠.
그런데 모든 분들이 이 뜻은 아셔야 돼요. 타의나 자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되겠죠. 그건 뭐냐? 한 분이 생각을 해서, 즉 부처님의 생각으로서 바로 문수가 생긴 거죠. 문수는 생각을 하는 중이니까 법신이에요, 그게. 생각이니까요. 그러니까 보현은 그 생각을 받아서 움죽거리는데, 모든 것을 움죽거리면서 평등하게 보(保)하면서 행해 나갑니다. 보현은 바깥에서, 문수는 안에서 하는 겁니다. 문수가 안에서 지명을 하면 바깥에서는 보현이 하듯이 이것이 바로 ‘자성 삼보에 귀의한다’ 이런 뜻이지요.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처님 한생각이 사바세계에서는 관세음이라고 이렇게 붙여 놓으시고, 그걸 뭐라고 그럴까. 마음으로 꼬리표를 붙였다고 그럴까요, 상표라고 그럴까요? 그 이름을 관세음이라고 붙여 놓고 동방에는 아촉이라고 붙여 놓고 서방에는 미륵이라고 붙여 놓고 지천국에는 지장이라고 붙여 놓고…, 마음으로 이렇게 붙여 놨다 이겁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발전이 없고 움죽거림이 없다면 입에 밥도 안 들어갈 겁니다, 아마. 또 생각하고 움죽거리는 동시에 우린 상대가 있습니다. 상대성이 없다면 과학이라든가 우리 일체 생활이라든가 한 국가의 역사를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전부 우리가 움죽거리고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게 오는 거죠.
이렇게 표현해 보죠. ‘돌과 돌을 쥐고서 한번 딱 치니까 불이 번쩍 일어나더라. 그런데 그 불이 일어난 거조차도 없느니라.’ 그것을 표현하자면 과거는 지금 현실에 짊어지고 나와서 살고 있으니 없고 미래는 아직 가지 않았으니 없고 현실은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없노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모든 게 고정된 게 없이 공해 버렸어요. 그래서 “공한 것을, 본래 공한 것을 어떻게 체험을 합니까? 공이라는 체험을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누가 물으니까 “그 공했다는 것도 공했기 때문에, 분별도 공하고 공이라는 공도 공했기 때문에 공을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랬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감이 잡히는 분들도 있고 그렇지 않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이것은 최상승의 굴림을 굴리고 가는, 보살들의 굴림에 의한 중용으로서의 용(用)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함도 공했기 때문에 그대로 목마르면 물 마시는 거와 같죠. 그러면 그런 얘기는 접어둘까요?
요거 한 가지만 얘기해 드리죠. 여기에 있는 분들은 잘 들으세요. 내가 항상 그러죠. ‘이 세상의 인간 모두에게는 자기 마음의 불성 주장자 안테나가 있다. 안테나, 그 위에 레이더망이 설치돼 있다. 그다음 중간에 자동 컴퓨터가 설치돼 있다.’ 그러니까 심성 빼놓고는 없어요. 자동 컴퓨터가 설치가 돼 있고 그 아래 탐지기가 있고 또 팩스와 천체망원경이 설치가 돼 있어서, 그 다섯 가지가 다 설치가 돼 있는 겁니다. 레이더망은 위에 설치가 돼 있어서 빙글빙글 돌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것을 다 통신을 합니다. 법계 어디에서 들어오든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다 알고 통신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자동적으로 다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여러분이 잘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냥 생활하는 데 그대로 돼 있습니다. 지금 다른 큰 나라에서는 이거를 연구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자력이니 광력이니 하는 것도, 빛으로 가고 오는 것도 잘 못 쓰고 있는 형편입니다.
부처님이 계시기 전에도 진리는 있었지만 부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그 진리를 깨달아 통달을 해 가지고 49년을 설하셨고 행으로 보여 주셨고 또 그 모든 걸로, 앉은 걸로 보여 주셨고 선 걸로 보여 주셨고 누운 걸로 보여 주셨고 평발로 디딘 걸로 보여 주셨어요. 손 없는 손을 보여 주셨고 자루 없는 망치를 보여 주셨어요.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그런 설법이 나오는 거죠. 거기에서 첫째는 하늘을 받치고 둘째는 말없이 사방을 둘러보시면서 그 뜻으로 불바퀴를 굴리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아래로는 평발을 가르쳐 주셨다 이거지요.
그런데 지금 내가 이렇게 표현해서 말한 것은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을 그대로 자유스럽고 여여하게 여러분이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료가 있으니 그냥 여여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을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날 기복으로 빌어먹고 다니는 겁니다. 여기만 하더라도 그렇고 절마다 그냥 무슨 탱화를 여기저기 붙여 놓고 울긋불긋 울긋불긋하게 해 놓질 않나.
우리 마음으로서 불성이 있기 때문에, 즉 그걸 마음내기 이전이라고 할 수 있죠. 마음내기 이전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 있고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몸이 움죽거릴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삼보에 귀의합니다’ 하는 건데, 그저 여기 갖다 놓으면서 이거 따로 보고 저기 갖다 놓으면서 저거 따로 보고, 이렇게 따로따로 찾으려다가 천차만별로 돼 있는 우주의 섭류를 어떻게 다 파악하시렵니까? 그걸 파악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자기 몸, 생활, 한 식구를 지켜 나가는 것도 다 못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절에 오면 요기 놓고 조기 놓고, 잘못됐다 잘됐다 참견이 많고, 이거는 이렇게 해야 옳고 이걸 떼버리면 안 되고 이걸 붙여야 되고 이걸 모셔야 되고 이 야단들입니까? 자기 부처 하나 챙기지 못하는 분들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처를 챙겨라 이겁니다. 아까 내가 컴퓨터 얘기 했죠. 그때 미처 얘기 못한 것이 있는데, 우리가 컴퓨터에다 항상 입력을 해 넣어야 쓰죠? 그리고 자동적으로 나오죠? 그런데 일반 컴퓨터는 물질적으로 설치가 돼야 입력을 할 수 있죠. 돈을 주고 사다가 시스템을 전부 해 놔야 그게 착착 들어가 맞겠죠. 그런데 우리는 자동적으로 돼 있어요. 뭐 여러분이 그렇게 말 잘합디다, 컴퓨터 시스템이라고.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몰라요! 우리 생각으로 자동적으로 입력을 해 놓는다는 것도 모르고요. 우리가 살면서 그냥 돌아가는 게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거기 맡기는 것도 그냥 맡기는 것만이 아니라 입력을 하고 돌아가라 돌아가라 이러죠, 놓고 돌아가라. ‘내 주인공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 이게 입력이에요. ‘내 주인공만이 이거를 해결할 수 있다.’ 하고 거기 그렇게 놓으면 자동적으로 입력한 것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그건 순간순간 돌아가는 우리 생활의 지침이지만 우리나라를 건지는 데도 이 세계를 조절 안 하고 입력을 안 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어디에서 뭐가 들어오는지 어디에서 뭐가 끼어드는지 그걸 모르면 안 되기 때문에 입력을 해 놔야 레이더망에도 잡히고 레이더망에도 또 통신이 오고 가고 이렇게 되죠. 복잡하다고 생각하지만 복잡한 게 하나도 없죠, 자동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갖춰진 그 다섯 가지의 재료를 쓸 수 있는 자동적인 시스템, 그 시스템의 다섯 가지가 전부 돌아가면서 레이더망에 걸리면 여기서 통신을 해서 다 굴릴 수 있게 하고, 입력을 하는 대로 다섯 가지가 다 돌아가면서 입력이 됩니다. 모든 게 이렇게, 쪼그만 거 쓰면 쪼그만 거 쓰는 대로 입력이 돼서 그거대로 쓰고 큰 건 큰 거대로 쓰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라. 나를 발견해야만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둘 아닌 도리를 알면 둘이 아닌 나툼을 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다 돌아감으로써 월(月)세계도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월세계도 될 수 있고, 태양의 근본이 내 근본이 될 수 있고 바로 내가 될 수 있다.’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아주 뜨거워서 못 사는 데도 생명이 있고 아주 차서 못 사는 데도 생명이 있습니다. 그게 다 있어요. 그리고 사람이 너무 악해서 부처님께서 모두 안아서 응해 주셔도, 그게 굴러 나와도 도대체 무쇠는 무쇠대로 있더라 이런 게 있어요. 그거는 깊숙하게 넣어서 옴쭉을 못하게,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연유도 있죠. 없는 게 아니에요. 모든 생명들에게 해를 끼치니까요. 그럴 수도 있는데 그것도 여러분이 따로 보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도리로 아주 마구니라도 따로 보지만 않는다면 선자(善者)다 마구니다 외도다 이런 것이 따로 없이 그대로 우리가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모두 벗이 되고 나 아님이 없고 모두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님 도리를 배우는데 밥이나 떡이나 놓고 “아이구 관세음보살, 날 좀 도와주시오!” 하면서 바깥으로 비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봐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으로든 뭐로든 전 세계를 보고 듣고 사시죠. 그렇다면 지금 얼마나 바쁜 세상인 줄 아십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그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고, 부부가 함께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들어오고 하는 바쁜 세상에서 지금 움죽거리고 살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예전처럼 여자는 밥이나 해 먹고 살림이나 하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 집안에서 살림을 해도 남편을 반 이상은 리드해 줄 수 있는 아내가 돼야만이 남편이 성공도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죠. 지금은 아내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그렇게 뛰어야 하는, 뭐 몸뚱이가 팔팔 뛰어서 뛰는 게 아니라 아내가 정신력으로 뛰어서, 천 리를 뛸 거를 만 리를 뛰어서 남편의 앞을 닦아 준다, 이런 문제도 있죠. 그렇다고 해서 몸뚱이로 돌아다니면서 치맛바람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 빼놓고는 없어요.
아까 한 말을 여러분은 그냥 아무렇게나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 주장자에, 안테나 주장자에 레이더망이 있고 거기 컴퓨터가 설치돼 있고 탐지기가 설치돼 있고, 천이통 즉, 무전통신기가 설치돼 있고 또 신족통 즉, 팩스가 설치돼 있고 말입니다. 그 다섯 가지 여섯 가지의 시스템이 사람에게는 다 아주 철통같이 돼 있어요. 이게 자동적인 거죠.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하죠.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여여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또는 일체 만법을 능히 들이고 냄을 어찌 알았으리까.”
여러분한테 한 말을 되하고 한 말을 되하고 이러지만 여러분이 똑같은 말이라도 자기가 실천궁행하는 데에 그 뜻을 적용하느냐, 또 그렇지 않으면 이론으로만 듣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귓가로 흘리느냐 이게 문제예요. 그런데 어떻게 놓고 가느냐는 거지요. “나를 믿는데도 그렇다. 나는 놓고 가는데도 그렇다.” 그러는데, 놓고 가는 줄 알면 놓고 가는 게 없어요. 놓고 간다 하는 것도 공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거를 우습게 들으시면 참 억울할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어쩌다가 나와서, 벌이나 나비가 날아다니다가 창문이 밝으니까 그게 나가는 문인 줄 알고 입으로 쪼다가 그냥 떨어지듯이 그렇게 하지 말고, 나가고 들어오는 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거죠. 그리고 어디고 걸리지 말아야 한다는 거까지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이거지요.
자기가 잘못해 놓고 그게 걸려 가지고 ‘이거는 내가 잘못했으니까, 공부하는 사람이 이렇게 해서 쓰나.’ 하면서 그저 거기에 걸려 가지곤 온통 그냥 마음을 위축시키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것도 모르면 통과 통과 하라고요. 잘못됐으면 잘못된 걸로 통과하고, ‘어!’ 하고 통과해요. 그렇게 굴리다 보면 그게 진리에 순응하는 거라고요.
‘이게 뭣고?’ 하고서는 그냥 붙들고 있는데, 화두를 누구한테서 받는 게 아니에요. 얘기를 듣는 거지요. 얘기를 듣고 거름 삼아서 내가 생각해 보는 거지 받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놈이 뭣고?’ 하기 이전에, 뭐긴 뭐예요? 이 세상에 어쩌다 나온 놈이지요. 하하하…. 어쩌다가 나온 놈이지 뭐긴 뭐예요? 나온 놈이기 때문에 움죽거리고 이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나요? 그러니 그렇게 가고 오고 부지런히 뛰고 온통 정신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고, 온통 눈도 그렇고 귀도 그렇고 발도 그렇고 손도 그렇고 입도 그렇고 모두가 그냥 강중강중 뛰는 셈입니다.
아주 그렇게 돌아가요, 그냥.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무슨, 시간을 생각하고 공간을 생각하고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나요? 급하게 그냥 똥이 마려워서 변소간에 들어갈 때 시간 보고 들어갑디까? 안 그러죠? 배고파 죽겠어서 밥 먹는데 몇 시인가 보고서 먹는 사람도 없어요. 인제 다 치워 놓고 ‘아이, 몇 시나 됐나?’ 하고 보거나 출근할 사람이 보는 거죠. 그땐 벌써 급한 거는 다 해 놓고 쳐다보는 거죠. 그러니까 시간을 보는 거는 벌써 이차적인 문제예요. 그러니까 한참 급해서 일할 때는 초월해서 그냥 일하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살림살이가 전부 공했다 이런 소립니다. 이 공한 도리를 알면 공한 데만 또 신경을 쓰는데, 그대로 공했으니 공한 도리가 없이 공했다 이거죠.
이 온양에 지원을 내면서 가만히 보니까…, 여기가 돼지 기르던 터라고 그러는데, 돼지가 따로 없어요. 내가 이런 얘기 하나 할까요? 한 부모가 어느 산골에 살면서 삼 형제를 길렀어요. 그런데 막내는 아주 늦게 낳았죠. 옛날에야 지금처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랬으니까요. 늦게 생겨서 그거 낳아 놓고선 어린 거를 두고 부모가 고만 죽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형들 둘만 있으니 형들이 사냥을 해다가 그걸 팔아서 먹고 살고 이러다가 형들마저 다 죽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고 배운 거는 그거밖에 없으니 할 수 없이 사냥을 나가서 토끼나 짐승들을 잡아다가 팔아서 연명을 하고 살았더랍니다. 하루는 산골짜기에 가니까 사슴 두 마리가 그냥 붙어서 아주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저거라도 잡아서 갖다가 팔아야 입에 풀칠을 하겠다 싶고, 또 그래야만이 남한테 꾸어다가 먹은 쌀도 좀 갚겠다 싶어서 아주 좋아서 활로 그냥 쏘아 버렸단 말입니다. 새끼 두 마리가 비비고 놀다가 그냥 한 꼬챙이에 다 꽂혔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으러 가려고 막 나서는데 어미 사슴이 또 왔어요. 어미 사슴이 와서 그 새끼 사슴에 꽂힌 화살을 빼기 위해 그냥 발버둥이를 치는데 거기서 피가 그냥 콸콸콸콸 쏟아지거든요. 그러니까 어미 사슴이 막 그냥 엉엉 울거든요. 저 어른 사슴마저 잡으면 오늘은 수지가 맞겠다 싶어서 화살 하나를 또 겨냥하려고 그러니까 아, 쏘지도 않았는데 그냥 어미가 쓰러져요. 참 이상스럽다 그러고 거두어서는 내려가 보니까 어미 사슴이 그냥 새끼 사슴을 안고 죽었어요. 그래서 아주 이상스럽다고만 생각을 했죠. 지금 같으면 그 뜻으로라도 좀 알 텐데 아마 머리가 좀 둔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집으로 내려와 가지고선 화살을 빼고 그 어미가 왜 죽었나 보기 위해서 동네 여러 사람하고 배를 갈라 보니까 창자가 모두 동강동강 끊어졌어요. 그 동강동강 끊어져서 죽은 걸 보고 그때서야 그걸 안 거예요, 걔가. 나이 20세도 안 됐지만 자기 어머니 생각이 난 거예요, 그때에. ‘아하! 이것도 역시 우리 엄마와 같구나.’ 어린 자기를 두고 엄마가 돌아가실 때 자기 손을 붙들고 눈을 감지 못하던 생각이 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 그 사람은 돼지나 사슴이나 토끼나 다 엄마가 있고 부모가 있다는 생각을 했고 또 사람이나 짐승들이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또 부모가 되고 이러는 도리를 알았단 말입니다. 여태 그거를 몰랐었거든요. 그 도리를 알고 나서 그거를 그냥 판 게 아니라 꼭 싸서 자기가 짊어지고 가서 그 잡은 자리에다가 묻어 줬어요. 묻어 주고 그때서부터 집도 버리고 다 버리고 절로 들어갔어요.
절로 들어갔는데 스님이 “뭘 하러 왔느냐?” 하니까 “제가 이런 경험을 해 보니까 덧없이 살기는 정말이지 싫습니다. 외롭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하고 먹을 것도 주저로운 데다가 더욱이 인제는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미 사슴이 그렇게 죽은 것을 보니까 내 마음에 변화가 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여길 왔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 스님이 있다 하시는 말씀이 “너는 그거를 아느냐?” “뭘 말입니까?” “네가 공부하면 저절로 알게 되느니라. 그 어미 사슴이 누구였는지 그 새끼 사슴이 누구였는지 네가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니라” 하시거든요. 그거를 알기 위해서 정진을 한 겁니다. 그거를 빨리 일러 줬으면 공부도 못했을 거예요, 아마. 하여튼 지금으로 치면 한마음의 도리, 나 자체 있기 이전을 찾으려고 열심히 했어요. (다음 호에 계속)
2008-03-24 오전 9: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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