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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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행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 진정 사랑 아닌 사랑!
변치 않을 사랑을 하고 싶어요
행복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더 나은 조건과 형상이 다가오기만 한다면 지금의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을 언제든지 버리고 더 나은 상대에게 갈 수 있는 제 자신 안의 이기심을 보았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도 형제에 대한 사랑도 애인에 대한 사랑도 조건과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바꿔질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의 마음인지요? 진정 변치 않는 사랑은 할 수가 없는 것인지요?
그래서 항상 ‘착을 떼라, 떼라!’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았다 하더라도 그 자식에 착을 두지 마라, 또는 형제에 착을 두지 마라, 부부에 착을 두지 마라 하는데, 착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본래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착을 떼어 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뿌리를 싱싱하게 해 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본래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는 어떠한 것이냐?
물질을 보고 착을 둔다면 절대로 그것은 같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둘이 되기 때문에. 정말이지 부처님 법이란 죽는 것보다도 더 진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집착을 두지 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너무 사랑하기에 진짜 사랑을 알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면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사랑한다는데도 물질을 보고 사랑을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랑은 때에 따라서 벌이를 못해 온다거나 또 가정에서 부인이 아파서 드러누웠다거나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아주 발에 턱턱 채일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점차적으로, 불쌍하고 참 안됐다는 생각은 그지없지만 결국은 나중에 가서 ‘어서 그저 고생하지 말고 죽었으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또, 벌이는 못하고 내내 몇년 간 놀아 보십시오. ‘저거는 아이구, 그냥….’ 이렇게 점차적으로 애정이라든가 이런 게 다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이 문제들이 진짜 사랑을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이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겁니다. 진짜 사랑이 뭔 줄 아십니까? 그래서 자비라고 했습니다. 그렇듯이 진짜 사랑을 알려면 내가 같이 들어갈 수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한 번 죽기 어려워라 했더니 두 번 죽기 어렵다.’ 하는 것이 같이 들기 어렵다는 얘깁니다, 상대를 두고 나를 두고 항상 이렇게 되니까.
물론 물질로써 상대는 상대대로 있지요. 일부러 둘이 아니라고 생각 낼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나하고 인연이 돼서 아는 사람이나 친척간이나 자식지간이나 부모 자식, 그 상대와 더불어 이게 얼마나도 착이 붙어 돌아가는 문제인지 모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착을 떼라는 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돌아가는 거죠. 같이 돌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거는 생각지도 못하고 물질을 가지고서 거기에 연연해 가지고 사랑한다느니, 또는 거기에서 착을 두고서 잊지 못하고 ‘너는 이렇게 이렇게 돼야 할 텐데….’ 하는 거죠. 아니, 나는 나대로 생각하고 그쪽은 그쪽대로에 생각하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 쌍방이 다 다른 길로 가는 거죠. 문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면 이런 게 있습니다. 자식이 자활할 때까지 아주 부모를 그리고 생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거는 당연한 일이죠. 그러다가 어느 때 홀연히 자기가 자활하고 자기가 가족이 생기고 이렇게 된다면 예전처럼 그렇지 않고 은연중에 떨어집니다. 그 착이 떨어지는데, 다시 늙으면서 또 다시 그립습니다. 자기가 부모가 되니까 그리운 겁니다. 부모가 되고 늙어 가고 한다면 자기 그 부모를 다시 한 번 어린애가 되듯이 생각해 보는 거죠. 그때에 가서 또 그립습니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자식이 어렸을 때 자라면서 어머니를 생각하는, 부모를 그리는 마음,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또 부모가 자식을 생각할 때는 그건 쭉 계속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건 계속해서 여념이 없는 겁니다. 진짜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저 자식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마음을 부모는 항상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렇듯이 그러한 마음이라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이 육신을 붙들어서는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마음을 같이 해서 활력성을 넣어 줘야 몸과 마음이 자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자기가 스스로 마련하고 간단 말입니다. 그 몸을 붙들면 어떻게 하면 잘못 돌아갈 수가 있죠.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몸은 놔두고 항상 마음도 아예 펼쳐 놓는 겁니다. 펼쳐 놓되 항상 같이 있으니까 내가 가는 데에 그 자식이 가고, 그 자식이 가는 데에 내가 가는데 뭣 때문에 그것을 붙잡고 애탄지탄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도 있죠. “야! 형제가 단 둘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부처님은 너무 사랑하는 까닭에 그 물질의 착을 뛰어넘게 하기 위해서 냉정하게 그렇게 얘길 했답니다. “언제 형제가 있었던가. 너의 형제는 벌써 이미 죽었고 너의 형제는 없느니라.” 하고요. 그런데 그걸 한번 뒤집어 생각하면 그건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뿐만 아닙니다. 요만치도 차이가 나지 않고 여러분과 똑같이 생각이 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우리가 그 모습을 바꿔서 바꿔서 이날까지 점차 바꿔서 나왔습니다. 바꿔 나오는 동안에 난 이걸 생각했습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모습을 바꿔서 갖다 놓으면 그 집 식구인 줄 알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면 저 집 식구인 줄 안다 이겁니다. 전자에 살던 인연은 아예 까맣게 없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고 내가 아는 바로 봐서는 그렇게 뒤섞이다 보니까 내 형제가 아닌 것이 없고, 내 부모가 아닌 것이 없고, 내 자식이 아닌 것이 없고 전체 이것은 내 남편 내 부인 아닌 것이 없어요. 이렇게 사랑이 깊고 깊은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는 생각이 예전에 덜컥 들었습니다. 그래서 막 울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사랑하는 거는 내가 그 모습을 바꿔 가면서 이렇게 여직껏 끌고 온 나의, 바로 내 부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비교한다면. 그러면 내가 내 부모를 생각하듯이, 고아로서의 자식이 생각하고 찾는 그 마음, 또 부모가 자식을 잃고 찾는 그 마음이 동시에 같이 했습니다. 내가 수없이 모습을 바꿔 가지고 나오면서 나오게 된 그 동기를 볼 때 근본처인 부모, 그리고 그 근본처 부모는 멀리 있나 하고 찾았더니 글쎄 항상, 그 모습을 바꿔 가면서 수없이 거듭거듭 이렇게 모습을 바꿔 왔는데도 수없이 따라서 같이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가짜 사랑만 알고 진짜 사랑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피가 한 방울이 흐르게 되면 강을 메우고도 남음이 있는 겁니다, 진짜 사랑의 눈물이란. 그런데 그 모습, 물건 아닌 진짜는 바로 여기 한 줄에 꿰여 있는데 왜 바깥으로 착을 두느냐 이겁니다. 그 모습을 따라 두느냐 이거예요. 진짜 자기 안에 있는데….
그거를 알면 바깥으로 그 모습을 찾아서 사랑하느니 뭘 하느니 그거 안됐느니 됐느니 하고 방황하고 다니지 않을 거다 이겁니다.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믿음직하고 아주 태연하고, 태연한 거는 왜 그렇습니까. 참 떳떳하니까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면 주위의 모든 환경이 떳떳하게 돌아가니까.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것은 자기가 같이 꿰어져 있건만 자꾸 마음이 달아나가니까 모습이 자꾸 방황하게 되고 같이 혼합이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모습도 같이 돌아가지만, 동체지만 이 마음이 동심이기 때문에 그 동심의 근본처가 바로 각자 수없이 거듭거듭 해 나온,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여러분의 그 부모인 것입니다. 그래 그 부모를 찾으려고 생각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이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내 근본처의 참나하고 지금 현대의 나하고 둘이 아니어서 항상 밸런스가 맞게 이렇게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바로 이 공부를 하셔야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사랑 사랑 사랑’ 많이 하시는데요, 조금만 불편하면 사랑한다는 소리가 쏙 들어가고요, “넌 나하고 살 수가 없어.” 하고 나옵니다.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덮어주고 서로 자기 탓으로 돌리면 모두 화목하게 되고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다가 장애자가 돼서 밥을 떠 넣어 줘야 할 지경이 된다 하더라도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그런 이치가 생깁니다.
그러니 사랑이 아닌 자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가 뭔 줄 아십니까? 자비는 사람들을, 서로를 모두 편안하게 해 주면서 서로 고통을 면하게 해 주는 겁니다. 고통을 면케 해 주면 스스로 편안해지죠? 그것이 바로 자비예요. 얄팍하게 입술에 붙여 가지고 사랑 사랑 하는데 그런 사랑은 진짜 사랑이 못되죠. 그건 사랑이 아니라 변덕쟁이를 사랑이라고 한다고 할 수밖에 없죠. 금방 ‘사랑한다’ 그러고도 고질병이 들거나 병을 길게 앓는다면 남편이든 아내든 “아이고! 나는 너 때문에 못살아.” 하고선…. 그거는 나빠서 그런 게 아닙니다. 당연히 생활이 그렇게 만드는 걸요.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을 입가에 붙이고 사랑 사랑 하지 마십시다. 결국은 말없이 행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 진정 사랑 아닌 사랑입니다.

식물도 감정이 있는지요?
나무나 돌 따위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무정물이라고 해서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는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데 스님의 법문을 읽다 보면 나무나 돌도 생명이 있고 이 세상 만물만생이 다 살아 움직인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옳게 이해했는지요?
왜 감정이 없겠어요? 이건 내가 실질적으로 경험한 일인데요, 산에 다니다 보니까요, 손가락도 잘라질 정도로 말아들이는 식물이 있어요. 정말이에요. 이렇게 스치고 가는데 스치는 순간에 이파리가 이만큼 넓었는데 그게 그냥 따르르르 말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참, 요상하다.’ 이러고선 그냥 막대기 하나를 집어 가지고 그걸 건드렸어요. 그랬는데 그 잎이 그냥 쫙 말리면서 그거를 물고 영 놓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한두 시간 있으니까 그게 놓아지는데 보니까 그 나무때기가 은근히 부스러졌어요. 그런데 감정이 없어요? 그리고 또 약초요. 약초들도 풀이에요.
그래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주인공 자리에 놓으라고 그러는 것이, 만약에 주인공 자리에 놓아서 내 마음이 큰 바다로 이루어진다면 수증기로 해서 올라가서 이 정수봉에서 정화를 해서 다시 물을 모든 만민에게 내리는 겁니다. 우리 지금 현실에 비가 오면 내리듯이…. 그러면 조그만 풀도 다 먹어요. 요만한 풀도요. 그렇죠? 작으면 작은 대로 먹고 크면 큰 대로 먹죠? 그러니까 생명이 있으면 벌써 생각이 있어요.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는데 말이에요, 흙이 모자라면 그것이 그냥 아주 깊이 뿌리를 내려서 흙에 닿게끔 해요. 그래서 그것이 살아나요. 그런데 생각이 없어요?. 그건 언어도단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가다가 극하게 아파서 죽게 되니까 풀을 손으로 뜯으면서 ‘너, 나 좀 살려 줘. 나 죽겠어.’ 하고 애원을 했대요. 이렇게 죽어 넘어졌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그 옆의 풀들이 다 그냥 얼굴을 내밀고선 자기 액을 빼 주더라는 거죠. 자기 이파리 하나씩 빼서 입에다 넣어 주더라는 거예요. 그래, 그 꿈을 깨고서는 그냥 살아났는데 그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를 한번 겪어 보고서 ‘이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풀들은 다 생각이 있고 다 사랑이 있고 의리와 도의가 있구나.’ 하는 걸 알았고, 또 악하게 쓰면 악한 업이 그대로, 자기가 요다음 생에 나올 때 모습을 달리 해 가지고 나온다는 걸 알았대요. 이게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동물이 아닌 식물이었을 때…, 예를 들어서 어느 버드나무를 잘랐는데 피가 나더라는 거예요. 도끼로 한 번 땅 치니까 피가 주르르르 흐르더라는 거죠. 그래서 그거를 자르지 못하고는 돌아왔는데 꿈에 ‘약 좀 발라 달라.’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너, 네 생명만 중하고 내 생명은 중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걸 만약에 잘랐더라면 그 식구 중에 하나는 죽었을 겁니다. 그게 없다고 할 수 없거든요. 모두가 다 그래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하게 고기도 먹고 채식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짐승들은 채식하는 게 있고 육식하는 게 있죠. 그렇죠? 그렇게 채식하는 거는 인간으로 진화가 빠르고, 육식하는 거, 남의 생명을 마구 잡아먹는 거는 인간되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렇게 되죠. 이건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무의 세계인 정신세계를 알려면 관 속에 들어가 봐야 안다. 죽어 봐야 아니까 죽어라. 여러분이 다 죽어라 이런 소리예요. ‘죽는 사이가 없이 죽어라.’ 이 소리지, 아주 죽으라는 게 아닙니다.

따로따로 나눠진 것 같아…
절에 가 보면 부처님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눠진 것 같고 절이 위치한 곳에 따라서 용왕재니 산신재니 수륙재니 하는 것을 지내던데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기독교처럼 하나님 하나만 믿으면 쉬울 텐데 이것저것 따로따로 나눠진 것 같아서 어떻게 믿어야 할지 의문이 생깁니다.
물부처가 따로 있고 불부처가 따로 있고 흙부처가 따로 있고 바람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고 문수보살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부처님들의 이름 자체가 부처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찰나찰나 움죽거리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화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부처님인 것이고 나중에는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다는 데까지 도달해야만이 살아서 열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살아 있으면서 열반을 해야지 죽어서 열반을 한다면 그것은 더하고 덜함이 없기에 죽어서 열반을 한다는 사람은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열 가지 물감 빛깔이 있다면 어떤 것을 물감이라고 내놓을 수 있을까요? 이 도리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주장하기를, 이름해서 그것도 주인공이라고 하나 삼합이 공존을 하고 있으니까, 삼세심(三世心)이 공해서 돌아가고 있는 이 이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했으니 그 주인공에 모든 것을,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거기다 다 일임해서 놔라 하는 것입니다. 왜? 믿어야 하니까. 자기의 생명선을 못 믿는다면 말은 어떻게 하며 몸은 또 어떻게 움죽거리겠습니까?
그렇기에 자기 생명선, 이름해서 주인공인 참자기는 이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유생 무생과 더불어 생활하고 돌아가는 진리를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믿어야 합니다. 믿고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놓고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돌려서 놓는 것입니다. 끊는 게 아닙니다. 망상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망상이 없으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상도 끊으라는 게 아니라 놓으라는 것입니다. 놓아서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기 때문에 ‘무(無)’라고 했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바로 ‘놔라. 공했느니라.’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꼭 거기에다가, 단연코 자기 영원한 생명의 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걸 진짜로 믿고 바로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임해서 놓으셔야 합니다. 자기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쁜 거든 좋은 거든 흥겨운 거든 기쁜 거든, 모든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우주간 법계에서 다 통과가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믿고 거기다가 놓으십시오.
한 종지의 물인데도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고, 모아 놨다가 벌여서 헤쳐 놓고, 헤쳐 놨다 벌여 놓고 이렇게 야단들을 하니, 제가끔 그냥 그냥 모두 흩어지죠, 불자들이. 기독교는 하나님으로 하나로 뭉쳐 놨어요, 타의에서 구하는 기도지만. 그런데 깨치진 못할지언정 질서는 지킬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 불(佛) 종지를 ‘부처님의 마음 뜻에 의해서 일체를 하나로 놔라. 오직 부처님의 마음을 나의 마음과 둘 아니게 믿어라. 믿고 부처님의 법을 둘 아니게 행해 나가라.’ 이렇게 해야만이 우리가 각자 흩어지지 않고 똘똘 뭉쳐서 돌아가는 믿음이 될 텐데, 그렇지를 않거든요.
이거를 모시면 또 다르게 보고 요거를 모시면 다르게 보고, 요런 염불을 하면 다르게 보고 저런 염불을 하면 다르게 보고, 요런 선사는 옳고 저런 선사가 그르고 이렇게 선사 타령들을 해 가면서 그런단 말입니다. 딱 이렇게 종지를 해 놓으면, 그거는 수만 명이 깨쳤다 하더라도 부처님 한 분이지 두 분도 아니에요.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수만 개의 마음이 한데 합쳐져도 그건 여래일 뿐이지! 그리고 부처님일 뿐이고!
그리고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모두가.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이 몸뚱이 속에 지금 잔뜩 들어 있는 생명들이 누군 줄 아십니까? 여러분을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벗어나지 않는 생명들이 모두가 한데 합쳐서 공생으로 살고 있고, 공용을 하고 있고, 공식을 하고 있고, 공체로서 더불어 같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더불어 같이 살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여래거든요.
그러니 지금 시대가 어느 때라고 바깥에서 구하고 바깥에서 찾고 빌고 이렇게 해야만 되겠습니까? 지금 옷깃을 다시 한 번 여미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하는 시대라고 보며, 지금 어떻게 해서 우리가, 내가 이 땅의 주인인지, 내가 이 몸의 주인인지를 생각해야 옳을 줄로 믿습니다.

내 안의 의식들이 미워요
스님, 저는 이 마음공부가 너무 좋고 꼭 성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절에 다닙니다. 그런데 아직 젊다 보니까 이런저런 유혹에 마음을 많이 뺏기게 되는데 그렇게 한동안을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와 보면 제가 너무 한심하단 생각이 듭니다. 스님, 저를 오직 한곳으로만 들어가게 하지 않고 이리저리 헤매게 하는 제 안의 의식들이 너무 미워요.
‘우리는 꼭 내면의 나부터 알아야 한다.’ 하는 것은 뭐냐? 내 자생중생들을 남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악업 선업을 지은 자체, 근본의 표시입니다. 내 몸뚱이 속에 지금 악업 선업이, 과거의 악업 선업이 다 들어 있고 또 지금 살면서 짓는 것은 미래에 올 선업 악업이 입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거는 지금 나오고 미래에 현실에 올 것은 자꾸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입력된 게 연방 나오면서 연방 미래로 또 입력이 됩니다. 그러면 과거에서 오는 그 자체의 업식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내 마음 속에 그 악업 선업의 중생들의 의식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게 인연을 지은 거니까. 그래서 나오는 대로 거기다 놓으면 즉, 미래의 그 업을 지을 것도 없어지고 과거의 업 지은 것도 없어지는 까닭에 거기다, 모든 것은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 한 구멍에다가 놓아라, 이런 소립니다.
육신과 정신과 둘입니까? 둘이 아닌 까닭에 너와 나와는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그 믿음! ‘해 주시오!’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지. 그렇게 놓고 갈 때 비로소 그 통은 딱따구리가 쪼아서 뚫어지듯, 뚫어서 그 나무의 속이 탕 비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 속에 들어가서 집을 삼아서 차고앉는다 이겁니다. 거기 앉았으면 알을 까서 또 생산시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그럼으로써 우리가 깨달으면 알을 깔 수 있고, 생산을 해낼 수가 있고 깨닫지 못하면 생산을 못합니다.
자생중생들이, 즉 말하자면 유마힐 거사가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왔을 때 중생들의 병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노라고 말을 했을 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자생중생들을 다스리면서, 내 자생중생들이 병이 났으니까 내가 병이 나는 거지, 자생중생들이 건강한데 내가 왜 병이 납니까? 자생중생들이 다 병이 나아야 내 몸이 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마음이 아니라 모두가 한마음인 줄 알고 다스려야 합니다. 제각기 나는 나 너는 너, 이렇게 된다면 그게 아수라장이지 다른 게 아수라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바깥으로도 아수라장을 만드는 거죠.
내가 이런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큰 나무가 있으면 딱따구리가 그냥 덮어놓고 쪼죠. 쪼아서 나무가 뚫어지죠. 그렇듯이 여러분은 덮어놓고 무조건 내 큰 나무라고 해도 됩니다. 내 나무에 딱따구리가 쪼듯 그렇게 자문자답하면서 생활하면서 해 나가야 그대로 생활이 참선이며 생활선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편안해지면 바로 좌선입니다. 이 모두가 이렇게 참선을 할 때에 생활이 없는데 부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없는데 또 부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있으니까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으니까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 우리는 항상 그 나오는 데다가 직접, 딴 데 바깥에다가 허우적거리지 말고 안에다가, 모든 것은 거기다가 놓고 맡기고 ‘너만이 이끌 수 있다. 너만이 아픈 거를 낫게 할 수 있다. 너만이 화목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깨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다. 그렇게 관하면서 생활해 가시기 바랍니다.
2008-03-17 오전 10: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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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