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疑法 世人多執本心 於所受法 不能卽信 敬心受行 苦心生猶豫 卽法不染心 何以故 疑障之義 如偈中說
세 번째는 자기가 받고 지니고 있는 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선입견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입견이 생긴 뒤에 받은 법에 대해선 신심을 내지 못한다.
비유하면 지관법문을 닦을 경우 지관법문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그리고 닦는다 해도 생사의 괴로움을 떠날 수 있는지 없는지 등 이와 같이 머뭇거리면서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또 염불하는 사람이 염불법문은 사후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할 수 있는지, 아미타불을 볼 수 있는지 의심하거나, 이것이 마군이의 설법인지, 아니면 여래가 직접 말씀하신 것인지 등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진실한 법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키게 되면 수행하는 길을 수시로 바꾸어 아침저녁 의혹과 무명의 어두움으로 진실한 마음이 덮어져 버리게 된다. 이는 마치 큰 바다와 같이 광대한 부처님 주변에 앉아 있으면서도 목이 말라 죽은 사람과 같다. 이런 사람이 어찌 용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의심을 하면 진실한 불법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아 여래의 위없는 열반의 이치를 영원히 잃게 된다.
如人在岐路 疑惑無所趣
諸法實相中 疑亦復如是
疑故不勤求 諸法之實相
見疑從癡生 惡中之惡者
善不善法中 生死及涅槃
定實眞有法 於中莫生疑
汝苦懷疑惑 死王獄吏縛
如師子 鹿 不能得解脫
在世雖有疑 當隨喜善法
譬如觀岐道 利好者應逐
佛法之中 信爲能人
若無信者 雖在佛法
終無所獲 如是種種因緣
覺知疑過 當急棄之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과 같다. 기로는 여러 갈래로 교차하는 길을 말한다. 길이 많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의혹을 일으키게 되며 나아가야 할 곳을 결정짓지 못한다. 제법실상 가운데서 의심하는 것도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
제법이라 하는 것은 일체 대승ㆍ소승ㆍ범부ㆍ성인ㆍ편교(偏敎)ㆍ원교(圓敎)ㆍ돈교(頓敎)ㆍ점교(漸敎)ㆍ권교(權敎)ㆍ실교(實敎) 등을 가리키고, 실상은 바로 무상(無相)이며 진여실상이라고도 한다.
실상무상을 공가중 삼제(空假中 三諦)에 대비해 보면 실상이 따로의 모습이 없는 것은 ‘공’의 의미에 해당되고, 실상이 상아님이 없는 것은 ‘가’의 의미에 해당되며, 실상이 무상이면서 상아님이 없는 것은 ‘중’의 의미에 해당된다.
따라서 ‘법’은 공가중 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공가중 삼제는 일체법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이는 일체법의 있는 그대로가 진여의 모습이고, 일체법의 있는 그대로가 실상의 모습임을 말한다.
법화경에서는 “진여실상의 모습으로서의 제법이다”라고 하였다. 가령 진여실상으로서의 제법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게 되면 수행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된다. 여래가 설법하신 팔만사천법문은 낱낱이 진여실상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법이며 진여의 원통법문이 아닌 것이 없다. 왜냐하면 불법은 바다와 같아 무량무변하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불법에 대해 의혹을 일으키게 되면 실상의 이치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의심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또 다시 말하기를 “의심 때문에 제법실상의 이치를 부지런히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일체 삼계 내에 견혹과 사혹 등 모든 것이 전도된 어리석음을 따라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말해본다면 불법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악법가운데서 또다시 모든 악법을 일으킴은 물론 미혹을 따라서 또 다른 미혹을 불러 다시 악법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선법과 불선법이 있는데, 선법은 열반이고 불선법은 생사다. 그런데 생사가운데서 다시 생사를 일으키는 것을 악법 가운데 악법이라고 한다. 생사는 미혹의 법이고, 열반은 깨달음의 법이다.
그러나 모든 법 가운데에는 단정코 진실하고 정직한 법이 존재해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부연하면 생사법 가운데 열반법이 있고, 번뇌법 가운데 보리법이 있고, 생멸법 가운데 불생멸법이 있다.
이는 마치 파도와 물이 동시에 젖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 법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일 이처럼 치우침 없는 이치에 대해서 항상 의혹을 품으면 진실한 성품만 덮여져 버릴 뿐이다.
이와 같은 모든 무리들은 염라대왕의 지휘를 받는 저승사자에게 속박을 당하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빠져나올 길이 없다. 우리들은 무시이래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혹의 뿌리가 너무 깊어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구하려 하지만 이 같은 일은 실로 매우 어렵다.
그러나 비록 의심이 생긴다 할지라도 항상 선법을 따라서 수희찬탄하고, 의혹의 인연 때문에 반야의 오묘한 법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비유하면 여러 갈래의 기로에서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끝내는 어느 길이 올바른지 어느 길이 틀렸는지, 이 점을 스스로 지혜롭게 선택하여 오직 이롭고 좋은 쪽으로 가야만 하는 경우와 같다.
이는 요컨대 자기에게 좋은 곳이 있으면 의혹심을 내지 말고 즉시 용맹하게 정진하면서 전진해야 함을 말한다.
불교법문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최후의 처소에 까지 추궁해보면 일실(一實)로 귀결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방편문이 많다고 하지만 근원으로 되돌아가면 두 가지 길이 없음을 말한다. 전일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하나의 문으로 깊이 깨달아 들어가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침내 자기의 집에 도달하는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불법 가운데선 신심으로 들어가고 지혜로서 생사를 건너야 하는데, 만일 신심이 없다면 비록 불법 가운데 있다 해도 불법과는 전혀 인연이 없기 때문에 진실한 불법에서 전혀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의심하는 마음은 불법에 있어서 얻은 바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갖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의심과 후회의 허물은 반드시 깨닫고 급히 버려야만 한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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