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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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은 선정 장애, 반야문 굳게 닫혀
五棄疑蓋者 以疑覆心故 於諸法中 不得信心 信心無故 於佛法中 空無所獲 譬如有人 入於寶山 若無有手 無所能取 然則疑過甚多 未必障定 今正障定
다섯 번째로 의심의 번뇌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의혹은 머뭇거리면서 결정을 짓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혹심이 있으면 불법에 있어서 올바른 신심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여래의 위없는 지견을 잃게 된다. 그 때문에 의심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의심은 단지 뭇 악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선업을 선도하기도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가령 그 예를 선정에서 화두를 관하는데 비유해보면 우선 의심이 일어나게 해야만 하는데, 이럴 때의 의심은 공부하는데 보배가 된다.
이를 두고 선종에서는 크게 의심하면 확철대오하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닫고,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이 의심이야말로 공부하는데 있어서 그 공로가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의심이 아니라 머뭇거리면서 결정을 짓지 못하는 번뇌로서의 의심이다. 때문에 이 의심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덮어버리고 원력에서 물러나게 하여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오묘한 법에서 청정한 신심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불법대해는 신심이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주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 <화엄경>에서는 “신심은 도의 근원이자 공덕의 모체이며 일체 모든 선근공덕을 자라나게 한다”라고 하였다.
만일 신심이 없다면 불법 가운데서 얻을 것이 없다. 신심이 아니면 불교의 심오한 이치를 연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비유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비가 많이 내린다 해도 뿌리없는 나무를 어떻게 윤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불법이 아무리 광대하다 해도 신심이 없는 사람은 제도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신심이 없는 사람은 마치 뿌리없는 나무와 같아서 광대하기 그지없는 부처님 바다에 비가 많이 내리는 것과 같이 광대하게 법비가 쏟아져도 신근이 없는 사람을 윤택하게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심이 없는 사람은 억겁을 지난다 해도 조그마한 이익도 얻을 수 없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보배산으로 들어가 보배를 가지려 하나 그에게 손이 없다면 끝내 보배를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보배를 취할 수 있는 손이 없기 때문이다.
신심이 없는 자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여기에서 손은 ‘신심’에 비유하였고 보배산은 ‘불법보장’에 비유하였다.
불법의 보배창고란 무엇인가. 삼명(三明)ㆍ육통(六通)ㆍ사제(四締)ㆍ육도(六度)ㆍ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ㆍ십력(十力)ㆍ사무소외(四無所畏)ㆍ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이 모두 여래의 보배창고이다. 그렇다고 해도 신심이 없다면 광대한 불법가운데서 실제 이익을 얻기가 어렵다.

疑者有三種 一者疑自 而作是念 我諸根闇鈍 罪垢深重 非其人乎 自作此疑 定法終不得發 若欲修定 勿當自輕 以宿世善根難測故
의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인데, 이것은 수행인이 단정히 앉아 지관을 닦을 때 마음속으로 문득 “나는 지금 선근은 미약하고 죄장은 무거워 도를 이룰만한 그릇이 아닌데 어떻게 감히 최상승을 바라보며 이 도법을 닦을 수 있으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마음으로 이와 같이 의심을 한다면 선정법은 끝내 개발되지 않는다. 선정을 닦을 때는 절대로 자포자기해서는 안된다.
수행인이 꼭 알아야할 점은 내가 무량겁이래로 어찌 대발심을 하지 않았겠으며 대승의 수행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단정코 과거에 이미 선근을 심었으리라고 생각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선근을 심지 않았다면 금생에 어떻게 사람의 몸을 얻게 되었겠는가. 일체 성현들 모두가 처음에는 범부에서 출발해서 성취하였고, 시방제불도 중생의 몸으로부터 성취하였다. 따라서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미륵보살은 결코 없으며, 자연적으로 성취된 석가부처님도 아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았다면 자기가 과거에 심은 선근이 깊고 후하다는 것을 마땅히 믿고 자신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그들 모두는 여래의 진실한 장자들이다. 이에 따라 대용맹심을 일으켜 뛰어난 불법을 정진 수행한다면 불과를 증득하지 못할까, 또는 열반을 얻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二者疑師 彼人威儀相貌如是 自尙無道 何能敎我 作是疑慢 卽爲障定 欲除之法 如摩訶衍論中說 如臭皮囊中金 以貪金故 不可棄其臭 行者亦爾 師雖不淸淨 亦應生佛想
두 번째로 스승을 의심하는 것인데 이는 바로 타인을 의심하는 것에 해당된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친근하게 여겼던 대덕선지식의 위엄과 의표를 관찰해 보았더니 그의 살아가는 모습이 도를 깨닫지 못한 일반사람과 차이가 없어 털끝만큼도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것이라고는 없다” 라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선지식을 관찰하고 그 자신에게도 이미 도가 없는데 어떻게 그가 나를 교화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를 성취시키려면 타인까지 성취시키려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것이라고는 없는 그가 다른 사람을 교화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한명의 장님이 여러 장님을 인도하여 다함께 불구덩이에 떨어지게 될까봐 염려스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내가 그러한 스승을 섬긴다면 해로움만 있지 이익은 없을 것이라는 의심과 교만심이 마음속에 일어나 바로 선정을 장애하여 선정의 문이 열리지 않고 반야의 문은 굳게 닫히게 된다.
스승을 의심하는 법을 버리려 한다면 마하연론에서 “악취가 나는 가죽부대 속에 황금이 있는데 그 악취 나는 가죽부대 때문에 그 속에 들어있는 진짜 황금까지 버려서는 안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것을 명심하고 수행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행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스승은 악취 나는 자루에 비유했고, 그 스승이 행하는 설법은 자루 속에 든 황금에 비유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외형으로 인해서 그 속에 들어있는 불법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데, 법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 대해 허망하게 비판하고 장단점을 자기 멋대로 논변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을 크게 어리석고 미친 무리라고 부른다.
여러분들도 옛날 성현이 다른 사람에게 법을 구했던 일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가령 설산대사는 귀신에게 법문을 청하였고, 제석천왕은 짐승에게 절을 하면서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같은 사례는 법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따라서 스승이 비록 청정하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그도 역시 모든 부처님 숫자에 하나의 부처로 속한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그가 비록 몸은 범부이지만 입으로 하는 말은 모든 부처님 법이고 모든 부처님의 행인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부처님을 보는 마음으로 스승을 살펴야 한다.
부처님 대하듯 스승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법문을 들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옛 큰스님은 “스승의 외형은 비록 청정하지 못하다 해도 그가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내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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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0 오후 2: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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