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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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하게 사시지 말고 좀 너그럽게 사세요!
여러분과 같이 더우나 추우나 사계절을 막론하고 법당이 좁으나 넓으나 그저 부처님의 뜻과 우리들의 한마음이 함께 도반이 돼서 이렇게 공부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마디만 하고 토론 질문을 하도록 하죠.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세계가 시끄럽고 복잡다단하죠. 복잡하면서도 한 번 더 생각을 해보면 사랑을 하기 때문에 인연이 되고 인연이 됐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다단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인연도 될 수 없거니와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아수라장같이 그런가 하면 또 선지식들이 계시고 일체제불의 뜻이 있고, 이 모두가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우리가 용기 있고 의욕이 있게 이렇게 삶을 살자고 생각을 하신다면 그대로 될 것이며, 또 용기가 없고 이런 세상 살면 뭘 하나 한다면 그렇게 찌부러들 것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참 자비하신 부처님은 자기가 일생 동안 걸어온 그 자체를 내막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연이라는 것을, 둘 아니게 일대사로 자비의 인연으로 다 흡수하신 거죠. 그것은 우리 지구뿐 아니라 우주의 전체를, 과거나 미래나 현재를 전체 다 흡수하셨습니다. 흡수하셔서 그렇게 그것을 여러 제자들한테 가르치기 위해서,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뼈 한 무더기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이렇게 진화되고 형성돼서 진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을 그 뼈 한 무더기로 가르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나가시다가 뼈 한 무더기를 놓고 절을 하시니까 “사생자부이신 어버이신데 어찌 뼈 무더기에다 절을 하십니까!” 했더랍니다. 생략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니까, “수없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형제가 되고 그런데, 저 뼈가 할머니가 될 수도 있고 아버지도 될 수 있고 할아버지도 될 수 있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느냐.” 하시더랍니다. 여러분한테 얘기해드린 것이 바로 그겁니다.
생략해서 미생물부터라고 합시다.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면서 형성되고 형성되면서 진화되고 반복하면서 차원을 높이 갖게 된 이 진로가 어떠했겠습니까? 또 사람이 살다보면 의견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무엇을 해도 돌로 썼다가 도끼로 썼다가, 응? 이렇게 진화가 되고 진화를 시켜서 움죽거리고 그렇게 해오면서 나고 죽고 나고 죽고 그렇게 나투며 오늘에 이르렀겠죠. 그러는 과정에서 미생물은 부모가 없었겠습니까? 자식이 없었겠습니까? 지금 다 아시죠? 밝은 세상이니까, 너무도 잘 아실 겁니다. 모습은 다를지언정 어찌 생명과 마음이야 둘이겠습니까?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부모를 생각해 의지하는 마음이 다 우리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일체 생명들이 다 그렇게 진화되면서 형성돼서 이 사람까지, 맨 나중에 사람까지 됐던 겁니다. 사람으로 돼서 보니까 부처님께서 가만히 그 일대사에 둘 아닌 인연을 다 흡수하시고 말입니다. 보니까 전부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더라. 그러니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내 도량 아닌 게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없더라 그러신 겁니다. 그러니 어찌 나툼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사시면서 뾰족하게 살면 몸과 가정이 다 해로우니까 좀 너그럽게 사십시오. 둥글게, 어질게, 착하게, 지혜롭게, 이렇게 물리가 터져야 우리가 삶의 보람을 가지고 내 몸도 건지며 내 가정도 건지며 또 상대방도 건질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거쳐 오면서 우리가 뭐는 안 돼봤겠습니까? 이 부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 한마음으로 하여금 보살들의 이름을 다 지은 것입니다. 용도에 따라서 말입니다. 아프면 의사요, 관세음, 지장, 칠성, 주해신, 주산신, 이 모든 이름들이 다 자기 한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 자기 한마음에서 탄생시킨 거죠. 그러니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이 세상을 다 주고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함입니다. 그렇게 보살들을 이심전심으로서 낳게 해서 그저 용도에 따라서 달라는 사람마다 응신이 돼서 응해주셨다 이겁니다,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과거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그럴 것이고 현재에도 그럴 것입니다. 바로 미래가 현재로 돌아오는 거니깐요. 영원한 오늘이죠. 그 많은 보살들을 자기 마음의 이름으로 탄생을 시키시고 그렇게 모든 중생들을 다스리면서 안의 중생들을 또 다스려야 조복을 받느니라. 내면 속의 이 생명들은 수없이 살아나온 과정을 가지고 있는 인연들입니다. 인연들이 바로 합세한 것입니다.
그 수없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연들이 된 이 몸뚱이 속의 생명들은 살아오면서 모든 것이 (머리를 짚어 보이시며) 이 정수의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고등동물의 인간이라 그렇게 아주 묘하고 광대무변한 것이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거지처럼 빌며 기도하는 그런 습에 매달려서 살고 있습니다. 각자가 당당하질 못하고, 어차피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마찬가지거늘 죽는 것을 겁내고 사는 것을 몇만 년 몇천 년 살 양으로 애쓰는 그 바둥거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거죠. 내 한 몸 공했다는 걸로 모든 걸 알게 되면,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간다 이거를 알면 내가 한 일도 없을 것인데 말이죠. 나 자체가 한 일이 없으니깐 나 자체도 없구나. 찰나찰나 돌아갈 뿐이구나. 이거를 안다면 그냥, 공한데다가 공한 물질을 그냥 내버리면 그렇게 바둥거리지 않아도 세상 살맛이 날 텐데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머무르면서 살맛이 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안달박달 사는 겁니다. 지금 자식이 병신이 돼서 있다거나 자식이 죽게 됐다거나 이러면 더 안달박달한단 말입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말입니다. 냉정하게 따진다면 앞서 죽고 뒤에 죽는 것밖엔 없죠.
김대성이가 시주를 하는데, 머슴을 살아서 새경 받은 걸로 논바닥 한 서너 마지기 사놓은 걸 그거를 스님한테 다 시주를 했단 말입니다. 시주를 하니까 그 스님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시니까, 그때는 양반 상놈으로서 살던 시절이 됐기 때문에 도무지 그 종 문서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없고,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매여서 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시주한 지 삼일 만에 죽었습니다. 만약에 절 지으라고 시주를 뭉텅 갖다가 다 했는데 사흘 만에 죽었다면 어떻게들 생각하실 겁니까? 이 스님네들을 잡아먹으려고 할지도 모르죠. 하하하. 아닙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세상에 재산을 톡 털어서 갖다가 스님한테 드렸는데 어찌 사흘 만에 죽었느냐는 얘깁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그 어리석은 중생들한테는 묵언으로, 말씀을 못하시면서 함이 없이 하신 겁니다. 말을 못한 게 아니라 못하시는 거지. 하하하. 그 소릴 듣고서 우왕좌왕 할까봐 그대로 묵언으로 그냥 평등공법으로 그냥 실행을 하신 거죠. 그래 죽었는데, 그 어머니가 하신 말씀입니다. “아하, 이 죄 많은 여인에게 태어나서 이 고생을 했는데 네가 시주를 하니까 부처님께서 좋은 데로, 좋은 양반의 집으로 태어나게 하려고 이렇게 몸을 벗게 했구나.” 하고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르더랍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재깍 생각이 나실까요? 그래서 김대성이는 사흘 되던 날 죽고 정승의 집으로 탄생을 했더랍니다. 탄생을 했을 때 어린애가 울고 또 그렇게 한 과정은 생략하고요. 그 낳으신 어머니와 과거 어머니 양쪽을 다 섬기셨더란 말입니다. 모셨단 말입니다. 그러한 그 지혜를 생각할 때 우리가 ‘아이구, 그렇게 관하고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도 왜 우린 안 돼?’ 이렇게 비관적인 말을 한단 말입니다. 그 비관적인 생각이 그렇게 들었으니까 말도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생각이 곱게 나왔으면 말도 곱게 나옵니다.
그러니깐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몸 안에 들은 중생을 부처님께선 비유를 하시길 몸은 배로, 물에 띄운 배로 치시고 그 몸 안에 들은 생명은 중생으로 치고 우리 불성은 바로 선장으로 쳤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배 타고 가는 겁니다. 이 생명들은 이 속의 중생들은 배를 타고 온갖 곳을 다 돌아다니면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장이 그 중생들도 건지고 배도 성하게 갈 데까지 가게끔 이끌어야 할 텐데 선장과 같이 한마음이 되질 않아요. 모두 어떠한 일이 생겨도 선장한테 모든 거를 맡겨놓고 ‘너만이 할 수 있다. 너만이 낫게 할 수 있다. 너만이 이끌 수 있다. 너만이 화목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사회의 모든 것을 이끌어줄 수 있고, 진행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그 나고 드는 한구멍에다가 모든 거를 놔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야만이 선장이 그 뜻을 받아서 오로지 이 의식들과 전체가 한마음이 돼서 처결을 하지요. 그리고 자기가 자기 있는 줄을 알게끔 하죠. 그게 깨우침이니까요. 그러니 부처님께서 그렇게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시고 말입니다, 수없는 생명들을 보고 수없는 생명들 속에 또 생명들을 보고 나니까 ‘내가 저 몸이 아니 되면 아니 되겠구나.’ 해서 찰나찰나 그 모습으로 화했더랍니다. 그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기 모습과 같지 않으면 저항력을 느끼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모습 안으로 그냥 들어가서 제도했단 말입니다. 제도하게 되니까 스스로 살면서 지혜가 생기고 물리가 터지고 그래서 스스로 깨치게 된 겁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가게 됐으면 ‘아이구, 이거 막다른 골목이로구나. 나는 길인 줄 알고선 들어왔더니 이렇구나.’ 하고 도로 돌아나가게 해서 대로를 걷게끔 하는 것도 바로 부처님의 제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생활이 즉 여러분의 자부처의 바로 가르침입니다. 차원을 높이는 가르침 말입니다, 다스림이지요. 그러니 우리 생활이 바로 교재면서 자기 차원을 높이는 공부입니다.
부처님은 거지왕초고 그 제자들은 거지새끼들이라고 예전에 말들을 하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거지왕초란 뭘로 인해서 그 소리가 나왔느냐? 오는 거 막지 않고 가는 거 잡지 않고 생기는 대로 먹고 주지 않으면 안 먹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얻어먹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를 얻어먹는 게 아니라 자기 거 자기가 먹는 건데 그 뜻을 모르니까 거지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인 거죠.
이 말을 하다보니까 한마디 더 해야겠네요. 절간에서 해제가 되면 스님네들이 나가서 경도 읽고 뭣도 하고 뭣도 하고 나가서 한 철, 나가서 또 있다가 다시 결제가 되면 들어옵니다. 예전에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전부 들어와서 “저는 『화엄경』을 읽었습니다. 『법화경』을 읽었습니다.” 하고 전부 그러는데 딱 한 사람만 “저는 밥 먹고 잠자고 똥 싸다 왔습니다.” 하거든요. 그러니 기가 막히죠. 은사 스님이 들을 때는 기가 막히겠죠. 그러니까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그럼, 저 부처님 법당에 올린 저 공양은 왜 먹느냐?” 했더랍니다. 그러니까 “제 밥이기 때문에 먹었습니다.” 하거든요. 그러니 열이 그냥 이렇게 뻗쳤겠지요. 그러니까 담박 호통을 치면서 나가서 불목이나 하라고 내쫓았단 말이야.
아, 불목을 하라는 데도 “예!” 아주 그냥 그렇게 하고 “아유,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나와서 그냥 나무를 해다가 패서 불을 때고 싱그럽게, 아주 신나게 한단 말입니다. 다른 대중들이 보니깐 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더란 얘기죠. 저렇게 신날 수가 있나. 그냥 웃고 즐기고 노래하면서 신나게 하거든요. 그래서 노래를 들어보니까 어쩌다가 벌이 방에 들어왔다가 유리문이 반사되는 걸 문인 줄 알고 거기를 주둥이로 자꾸 쪼다보니까 그냥 떨어져서 죽더란 얘기예요. 그런 거를 노래를 했단 말입니다. 그래 노래를 하니까 그걸 처음에는 ‘저놈이 저렇게 주절거리고 돌아다니고 저거 사람 되긴 다 틀렸어.’ 하고 모두 그냥 밀쳐서 학대를 하고 그랬단 말입니다. 학대를 하면 할수록 그렇게 웃고 즐기거든요. 그리고 일도 부지런히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지 스님 방에 불을 때려고 이렇게 장작을 끼고 오다가 그 노래를 또 했단 말입니다. ‘어쩌다가 벌이 방에 들어 유리창문이 문인 줄 알고 입으로 쪼다가 떨어져 죽네.’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경만 읽고 있는 자기 주지 스님이 말입니다, 책을 읽다가 들으니까 이상하니깐 탁 덮고서 그 소리를 다시 들으니까 아, 그 소리거든요. ‘옳다구나! 저놈이 바로 깨친 놈이로구나.’ 하고선 “얘, 아무개야!” 불렀죠. 들어왔단 말입니다. 다짜고짜 이렇게 쥐고선 “너 내 자리에 앉아라.” 그러고는 탁 앉히고선 삼배를 올렸다는 겁니다. 깨치면 삼배를 받은 놈이나 삼배를 한 놈이 두 놈이 아니에요.
내가 무슨 말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난 도무지 모르겠네요. (대중 웃음) 그러니만큼 생활하는 여러분도 좀 지혜롭게 느긋하게 그냥 하늘이 깨져서 가루가 되어 금방 내려와서 우리가 다 죽는다 하더라도 늠름하게 지혜롭게 여유 있게 딱 버티고 한번 쓱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라, 이런 얘깁니다. 이런 여유가 없으면 실패해요. 마음의 여유가 바로 자기를 소생케 할 수 있고 너그럽게 둥글게 할 수 있는 그런 대인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어떤 땐 저도, 급하게 저기서 신도님이 와서 “지금 하혈을 한답니다.” 그러고 급하게 이런단 말입니다. “아, 그랬으면 그랬지 웬 게 이렇게 급하게 야단법석이냐. 급하게 나한테 온다고 급하게 되는 게 아니잖나. 급하게 들었으니까 급하게 하겠지.” 그러고선 그냥, 안 들은 거나 들은 거나 똑같이 이렇게 하니까 조금 있다가 전화가 오길 “하혈이 멈췄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여유 있고 그렇게 한 사람이 대인이죠. 예를 들어서 권투선수가, 아주 제일가는 권투선수가 그냥 여느 데 조그맣게 그냥 권투하고 이러는 데는 팔짱 끼고 보다가 여유 있게 가르치는 거와 같은 거죠. 그렇게 여유가 있어야 대인 노릇을 하지, 여유가 없으면 대인 노릇을 못하죠. 나라의 일도 그렇고요. 이렇게 법을 정해놨다가 또 이게 안되니까 이렇게 정하고 이렇게 정해 놨다 안되니까 이렇게 하고 그러면 뒤죽박죽이 돼서 이건 사람이 살기에는 어른들이 너무 휘휘 둘러놓는 것 같아서 힘들죠.
그런 거와 같이 여러분이 한 가정의 한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집안이 편안하고 자식들도 여유 있게 클 수 있고 어디다 세워놔도 살 수 있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이 관하는 거를 재산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쳐야 어디다 세워놔도 이 주인공이 보디가드가 돼주고 해결사가 돼주고 그리고 항상 영원하게 자기를 지켜주는 바로 자기 주인공이 되죠. 그러니 재산은 물려줘도 탕칠 수가 있지만 이거는 탕치려야 탕칠 수가 없어요. 줄줄이 내려가면서 말입니다. 여러분만 살다가 죽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자식들을 낳아 놓는 것이 아니, 우리 사람만 그런 게 아니죠. 일체 생물이 다 그렇죠. 어떤 때 보면 짐승들도 그렇고 참, 하다못해 쥐 한 마리를 봐도 자기 새끼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몰라요. 자기의 생명이 죽거나 말거나예요. 난 산에 다니면서 그런 걸 가끔 보죠. 산쥐들, 다람쥐들, 토끼들 뭐 새들, 부엉이들, 뭐 이런 여우니 늑대니 이런 거요. 아무리 딴 사람한테는 어쩌니 저쩌니 해도 자기 자식은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는지 자기 생명을 겁니다. 자기 새끼들을 건드리려 하면 그냥 뭐 가차 없이 자기 생명을 걸고 늘어집니다. 그러니 어찌 사람과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느 모습을 막론해놓고 그 모습이 돼주면서 내 모습 아님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도량 아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아픔 아님도 없느니라. 그 뜻을 여러분도 차차 가시면서 다 알게 될 겁니다. 그래도 들어야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요. 자장면 그 집이 맛있더라 이러면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만 자장면 있다는 소리도 이름도 못 들으면 그거 먹고 싶은 마음도 안 생기죠. 그런 거와 같이 그저 제가 생략해서라도 이렇게 그냥 튕겨놓으면 여러분이 다 그것을 그대로 요리로 알고 맛있게 잡수실 겁니다. 잡숫고서 소화도 잘되라고 합니다. (대중 박수) 그러면 이제 질문하실 분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여): 포항지원에서 왔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인연과 진실한 사랑에 대해서 오늘 여쭙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부모 인연 자식 인연 부부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 인연 중에서도 어떤 때는 굉장히 좋은 인연으로 만나갖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지만 어떤 인연은 서로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부부 인연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데요, 살아가면서 서로 마음이 안 맞고 그렇게 살면서 상대가 바깥 인연에게 마음이 더 끌려서 그이를 그리워하면서 자기 인연을 잘 돌보지 않고 그렇게 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집에 있는 사람은 자식을 위해서 그리고 또 내일을 위해서 이거를 잘 견디면서 참아야 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그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 상대방을 놓아주는 것도, 진실된 사랑이라면 놓아주는 게 옳은 건지 아니면 같이 참고 기다리는 것이 정말 옳은 건지 알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스님: 여러분, 잘 들으세요. 두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보통 그냥 살아가면서 나 싫다는데, 금은보화를 준다 하더라도 나 싫다는 데야 할 수 없겠지요. 그러고선 놔주는 거고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기 때문에 놔줬다고 합니다. 하하하하. 보통 말들이 그렇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것이 대단한 문제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주어지고 차원에 따라서 인연이 되고 만남이 되는 겁니다. 그냥, 보통 그냥 이렇게 만남이 아닙니다. 만약에 열 사람의 차원이 똑같다면 그 열 사람 중의 하나가 자기 게 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차원끼리 많고, 똑같은 차원끼리 또 많고 이렇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차원 차원에 따라서 같이 만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항상 그러죠. 당신의 팔자 운명의 그 차원을 다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차원을 만들어라 지금 이런 얘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됐다면 내가 항상 얘기하죠. 다시 당신이 좋은 데로 피해서 딴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똑같은 차원을 또 만나게 돼요. 자기 그림자는 항상 먼저 가 있죠. 하하. 그러니까 가도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나 여자나 똑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아주 자유롭게 벗어나려면 그거를 사람끼리 헤어지는 게 아니라 ‘음, 모든 게 내가 이 세상에 생겨났으니까 네가 있는 거지 내가 없이 네가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모든 게 잘했든 못했든 내 탓이로다. 과거나 지금 현실이나 미래를 또 간다 하더라도 역시 또 그럴 거다.’ 하고 거기다가 다 맡겨놓고 그러면 바로 과거에 살아온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입력이 됐던 게 자동적으로 거기다 놓으니깐 자동적으로 또 입력이 돼서 앞서의 입력이 자꾸 없어지면서 입력이 되거든요.
그럼으로써 ‘어, 내가 왜 그랬던가?’ 얼마 지나다 보니까. ‘아, 내가 왜 그렇게 살았지? 정말 헛살고 있네.’ 이런 생각이 우연히 들어서 서로 사랑을 하면서 아주 그 새싹들을 잘 이끌어가면서 잘 살더랍니다. 아니 지금도 그런 분들 많죠. 그런데 그것을 그렇다고 피해서 헤어진다면 그건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 자리에서 해결을 해야지 딴 자리에 가서 해결을 하려고 그래도 안 되고, 딴 자리에 가서도 또 그럴 거 아닙니까. 거기서 그 자리에서 해결 못하고 간 사람이 거기 가서 또 그러면 또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그저 공부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꽃 한 송이를 딱 들으니까 말입니다. 가섭이 싱긋이 웃었단 말입니다. 이게 꽃이 웃은 거나 사람이 웃은 거나, 사람 꽃이나 꽃 꽃이나 똑같은 이심전심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통하는 그걸 아시고 이심전심으로 보살들의 이름을 다 탄생시켰단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그러니 모든 거를, 이 보이지 않는 정신계를 무시하지 마세요. 그 정신계가 없다면 여러분이 다 아마 송장이 될 겁니다. 살을 잘라내도 모르고 골을 바숴내도 모를 겁니다. 지난번에 저기 삼막사에 올라가다 보니까 송장이 한 구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 송장을 떠나지 못하고 그 송장이, 자기를 보면서 거기 쭈그리고 앉았는 겁니다, 지키고 말이에요. 그거를 봤을 때 산 사람도 살려달라고 하고 살지만 죽은 영혼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는 얘기야. 두 번이나 그렇게 하지 맙시다. 또요? 다 했어요?
질문자1(여): 좋은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질문 드린 건 나쁜 인연에 대해서 드렸는데요, 좋은 인연은 또 좋은 인연대로 자기 차원대로 좋게 태어났기 때문에 좋은 걸 받고 갑니까?
스님: 그렇지, 그렇지.
질문자1(여): 예. 잘 알겠습니다.
스님: 그러니까 무우도 배기무우가 있고 공다리 무우가 있거든요. 허허허. (대중 웃음) 이 도리만 전체 다 이해하고 감지할 수 있다면 정말 사는 데에 피곤한 게 없이 여길 봐도 웃음이 나고 저길 봐도 웃음이 나고 전부 그렇게 아마 웃고 살 겁니다. 그러다가 한참 웃다가 보니까 ‘아이구, 별로 우스울 것도 없고, 하하하. 아유, 또 울 것도 없구나.’ 이렇게 되죠. 좀 그렇게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합장하심)
(다음 호에 계속)
2008-03-03 오후 1:5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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