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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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행동주의와 불교-2
행동주의적 상담은 학습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학습(學習)이란 말 그대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파블로프의 조건형성이론(1941), 도널드와 밀러의 강화이론(1950),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형성이론(1953), 반두라의 사회학습이론(1965) 등을 토대로 발달한 학습이론은 어디까지나 외부 조건의 영향과 그 영향을 받은 생물체의 반응인 행동에 대해서만 논할 뿐이다. 후기에 와서 인지적인 면을 가미하기도 했지만, 행동주의의 밑바탕에는 인간을 기계론적이며 결정론적으로 보는 입장이 여전히 남아 있다.
행동주의에서는 앞서 인간관에서 살폈듯이 ‘인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학습한 결과에 따라 행동한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주의의 인간관, 즉 백지 상태와 같은 행동주의적 인간의 본성과,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을 같이 놓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행동주의에서 말하는 학습이론과 불교의 업설을 나란히 놓고 유사점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동주의에서 말하는 백지란 어떤 그림이나 그려질 수 있는 하얀 도화지나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와서 그림을 그리면 그리는 대로 바뀌어 간다. 백지 자체는 아무런 의지도 없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외부에서 가하는 작용대로 물들어 갈 뿐이다. 즉 외부의 자극(S)에 따라 피동적으로 반응(R)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하여 쌓인 것이 학습이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행동이다. 행동주의 상담은 바로 이 행동을 다루는 상담 분야다. 즉 인간이라는 백지에 그려진 그림(행동) 가운데 부적응적인 그림을 벗겨 내거나 덧칠을 해서 적응적인 그림(행동)으로 바꾸어 나가는(학습) 것이다.
불교의 ‘공’은 물론 이와 다르다. 공부가 얕은 필자로서는 그 깊은 뜻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행동주의에서 말하는 백지로 비유한다면 ‘코팅된 백지’가 아닐까 싶다. 코팅된 백지에도 온갖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어떤 것은 그리는 단계에서 잘 물들지 않고, 어떤 것은 그려졌다. 하더라도 지우개로 지우면 깨끗이 지워진다. 그런데 행동주의에서처럼 외부의 자극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설사 외부의 작용이 가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지우거나 하는 것은 코팅된 백지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이다. 이런 점이 행동주의와 상반되는 면이다. 같은 백지라 하더라도 물리적ㆍ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의지적·능동적 존재다.
학습과 업의 개념도 겉으로는 유사한 것 같지만, 내면은 정반대다. 불교의 업이 행위, 행동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긴 하다. 그러나 불교에서 쓰는 행동(行)이라는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다.
즉 ‘의도적인 행동’을 뜻한다. 업의 이론이 행동주의와 비슷하게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을 말하지만, 그 행위 속에 의도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행동주의에서는 존재의 주관적인 의지인 ‘의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존재의 내면세계,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것이 불교인 반면, 행동주의에서는 관찰이 안 되는 ‘모르는 세계’라 하여 저만치 제쳐두고 만다.
■불교상담개발원 사무총장
2008-03-02 오후 4: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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