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 어묵동정을 여의고 일러보게
전강,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라는 말입니까
만공, 옳다, 옳다
어느 날 용성 스님은 만공 스님에게 넌지시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이르시오” 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에 만공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침묵하였다.
용성 스님이 “양구(良久: 한참 말없이 있는 것)인가?” 하고 다그쳐 묻자, 만공 스님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뒤, 이 법거래(法去來)를 전해들은 전강(田岡, 1898∼1975) 스님은 만공 스님을 찾아 뵙고 “두 큰스님께서 서로 멱살을 쥐고 흙탕에 들어간 격입니다” 하고 견해를 밝혔다.
그러자 만공 스님은 “자네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하고 반문했다.
“스님께서 용성 스님이 질문한 것을 저한테 물으십시오.”
“어묵동정을 여의고 일러보게.”
전강 스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라는 말입니까?”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만공 스님은 “옳다, 옳다” 하며 긍정했다.
위 문답에서 ‘어묵동정(語默動靜)’이란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용성 스님이 ‘어묵동정을 벗어나서 말하라’고 한 것은 말과 생각에서 벗어나 본래면목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육조 스님이 혜명 수좌에게 던진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不思善不思惡),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라고 한 공안과 같은 질문이다.
이에 만공 스님은 세존의 양구(良久)로 답을 대신한다. 세존에게 어느 외도가 묻되 “말 있음을 묻지 않고 말 없음을 묻지 않습니다” 하니, 세존께서 양구(良久) 하셨다. 이에 외도가 찬탄하되 “세존께서 대자대비하여 저의 미혹의 구름을 열어주어 깨달음에 들게 하였습니다” 하고 물러갔다는 내용의 공안이다.
원오 선사는 ‘세존 양구’ 공안에 대해 “세존께서는 ‘기틀 바퀴(機輪)’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유(有)와 무(無)로 향하지도 않았으며, 얻고 잃음에도 떨어지지 않았고, 범부와 성인의 경지에도 얽매이지 않아, 양쪽을 일시에 꼼짝 못하게 했던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용성 스님이 ‘세존의 양구냐?’ 하는 다그침에, 만공 스님은 그것도 아니라고 시치미를 뗀다. 양구를 양구라 하면 이미 양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답을 전해들은 전강이 패기 있게, 만공 스님을 찾아가 따진다. ‘세존 양구’로 답한 것에 대해 ‘그것이 양구냐?’, ‘아니다’ 하며 시비분별에 떨어진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 선지식 답지 못하다는 표현일까. 젊은 수좌의 기백에 내심 기뻐한 만공 스님은 어묵동정을 여읜 전강의 답을 기다린다.
그의 대답은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라는 말입니까?” 라는 절묘한 언구이다. 어묵동정이 일어나는 성품(性品) 자리에는 본래 한 물건도 붙을 수 없지만, 어묵동정이란 그림자가 동시에 성품과 둘이 아니다.
<금강경>은 “일체의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줄을 알면 그때에 바로 여래를 본다”고 했다. 이런 도리를 깨달으면 보이는 그대로가 실상(實相)이어서, 눈앞에는 청산이 가득하다(滿目靑山).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