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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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을 떠야 마음의 진가를 맛볼 수 있어!
하려고 생각하는데 왜 안되겠습니까!

밖으로 향하는 이 마음의 정체

어떻게 하면 이 육신의 틀을 벗어나서 마음으로 자유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욕심인지 항상 내 근본으로 몰입해서 들어가려고 해도 주위에서 이것이 좋다 이것이 빠르다고 하면 거기에 혹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안으로 몰입하지 못하고 자꾸 밖으로 향하는 이 마음의 정체는 무엇인지요. 나라는 틀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여러분이 자꾸 바깥에서 찾는 그러한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그걸 비유해서 한번 말씀드리죠. 줄창 내가 얘기하지만 작년 콩씨를 올해 심어서 콩싹이 났습니다. 콩싹이 자라서 콩이 열렸습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그 콩나무는 자기 콩나무에서 콩씨가 열린 거는 생각 안 하고 작년에 심은 그 콩씨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나기 이전을 찾으라니까 그만 바깥에서, 작년에 밭에 심었던 그 콩씨를 찾느라고 헤매고 돕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코를 꽁꽁 막고선 냄새를 맡으려고 해 보십시오. 냄새가 맡아지나. 혀를 끊고서 말을 하려고 해 보십시오. 말이 되나. 우리는 마음의 눈을 떠야 마음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의 진가를 맛보았어도 맛본 그것을 또 안으로 굴려서 체험을 하면서 자꾸자꾸 지혜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깨달았으면 깨달았다는 말 할 필요가 없이 안으로 굴리고 굴려서 또 지혜를 넓히고…. 지혜를 넓혀서 또 온 바다를 만드는 거와 같이 내 마음이 온 누리 어느 곳곳에 닿지 않는 데가 없이 됐을 때에, 여러분과 나와 둘이 아니게끔 됐을 때에 일체 만물, 무정물이나 모든 생물, 물에 있는 고기와 대화를 할 수가 있는가 하면 저런 풀잎하고도 대화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산에 올라갔을 때는 그 풀잎들이 다 말을 해 주고 ‘이것은 당신의 약이 되는 거’라고 하면서 가르쳐 주기도 합디다.
여러분은 꼭 먹을 걸 짊어져야만이 산에도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난 그거와는 다릅니다. 내가 먹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났다면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형성시켰을 때는 자기가 자기를 굶겨 죽이는 법은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있듯이 말입니다. 산에 올라갔어도 맨 몸뚱이로 그렇게 올라갔다면 ‘허허, 이거는 먹을 궁리를 안 하고 올라왔으니 먹여 줘야지.’ 그래서 그 풀잎과 풀잎이 다 같이 동일하게 되니까 먹을 것을 스스로서 갖다가 주더라 이겁니다. 내가 움죽거리는 대로 먹을 게 있어!
또 어떤 사람은 생식을 한다고 쌀을 물에다 불려 가지고 한 주발씩 먹는 것도 봤습니다. 차라리 밥을 해 먹지 뭣 때문에 물에다 담갔다 한 주발씩 먹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보통 여러분과 같이 그냥 먹는 게 낫겠죠. 코가 간지러울 거예요, 아마 그렇다면.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이 필요한 겁니다. 진실한 마음은 하늘에서 알고 땅에서 알고 법계에서 안다는 얘깁니다. 거짓이 한 치라도 있다면 그건 용납되지 않습니다. 거짓이 한 치라도 있다면 바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죠. 그 속임을 받는 것도 자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열쇠를 내주지 않습니다. 바로 주인공이라는 이름 아닌 주인공이 하늘, 우주 전체를 싸고 돌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과거를 못 보시걸랑 현실을 보십시오. 빚을 얻어서 장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익이 남아서 들어올 줄만 알았지 빚져서 이자와 더불어 같이 나가는 거는 생각지 못하고, 그러다가 그것째 그만 잃어버려서 탕진을 하는 수도 많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진실하게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고 자기 마음을 정도에 넘치지 않도록, 분수를 알맞게 지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두들겨 가면서 걷는다면 아마 천둥 벼락이 내려도 꼼짝도 안 하고 그대로 진행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내가 이런 공부를 하면 보통 생활에서 어려움이나 좀 없애고 그냥 살겠지.’ 그러지만 이 생활 속에서도 얼마나 어려움이 많습니까? 내가 주장자를 세우지 못하고 그걸 발견을 못하고 이래 가지고서는 세균, 영계, 윤회, 생사, 유령, 업보에 끄달리면서 살아나가니까 그 고달픔은 말도 못합니다. 거기에서 나 하나만 몰락 벗어난다면 그 외의 것은 다 벗어나는 것입니다. 본래 나는 공(空)해서, 본래 벗어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지어서 속는 것이고 그게 업보가 되는 것입니다.
자꾸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여러분이 침착하게 잘 생각하셔서 누가 모든 걸 망하게 했고 누가 흥하게 했고 누가 웃게 했고 누가 울게 했고 누가 그렇게 했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못하고서는 공덕을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든 없든 진심으로 내 성의껏 시주를 하고 정성을 들이면서, 과거의 빚을 갚으면서 미래의 덕을 쌓으면서 우리는 현실의 공부를 하자 이겁니다. 현실의 공부를 해서 영원한 오늘을 안다면 영원한 오늘도 벗어날 것입니다. 나 하나로 인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진리가 돌아간다고 생각했을 때 나 하나도 바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경지까지가 어려운가 하면 어렵지도 않고, 어렵지 않은가 하면 어렵기도 합니다마는 이것이 가다 보면 다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려고 생각하는데 왜 안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진다면…

스님,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진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냥 무로 돌아가나요, 아니면 또다시 윤회를 하게 되나요? 그리고 가족의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사이가 안 좋은 가족과 다음 생에 만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몸속에, 예를 들어서 위 공장 한 곳에서만 파워가 일어나도 여러분의 몸은 쓰러집니다. 집이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몸뚱이는 집과 같아서 관리인, 심부름꾼, 집합소, 생명들이 살 수 있는 바로 집합소밖에는 안 되기 때문에 그걸 이름 해서 여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몸뚱이만 여래의 집이 아니라 전체 한데 합해서 돌아가는 걸 여래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걸 쪼그만 내 몸뚱이 하나로 축소해서 한번 보세요. 헤아릴 수도 없는 생명체들이 내 몸속에서 서로 더불어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혼자 한 게 없고 혼자 먹는 게 없으니 아만통을 갖지 말고 ‘나’라는 걸 세우지 말라. 혼자 한 것도 없고 혼자 먹는 것도 없으니 모두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느니라. 그리고 번뇌가 있다고 하더라도 더불어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번뇌가 붙을 자리가 없다 이거예요. 병 붙을 자리도 없고 번뇌 붙을 자리도 없고,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다. 여러분이 여기 오기는 분명코 왔는데 발자취를 걸머질 게 하나도 없더라는 얘기죠. 그래서 여러분이 살기는 살아도 함이 없이 살았단 얘기죠. 이 세상을 살되 함이 없이 살고 있는 거다 이런 겁니다.
우리가 지금 죽는다고 하더라도 죽는 게 아니라 삶의 의식들이 끊어지는 겁니다. 끊어지고 그 원 근본과 자기의 입력된 영혼은 그냥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있기 때문에 더하고 덜함이 없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차원이 그렇다면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왜 이런 게 있죠. 깨라든가 콩이 심어져서 열매를 맺으면 그 콩 줄기나 잎은 다 죽어 버리고 씨만 나오죠. 씨 하나만 나온 것을 조금 쉬었다가는 그 이듬해 봄에 그 씨를 심으면 다시 그 싹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도 죽으면 잠시 눈에 보이지 않았다가 그 차원의 종자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거죠. 지옥 천당이 따로 묶여져 있는 게 아니라 경찰서로 해서 법정에 들어가서 돌아서, 즉 차원대로 콩씨는 콩씨대로 심어져 나가고…, 아주 똑바로 얘기하자면 자기가 개같이 살았으면 개로 모습을 가지고 나올 거고 독사같이 살았으면 독사로 태어나기도 하고, 차원이 말입니다. 살았을 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다시 모습을 쓰고 나올 때 그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한번 바뀌어서 말입니다. 화해서 나오는 거죠. 그게 이해가 안 가시겠죠?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었죠. 사람이 죽으면 재를 곱게 해서 놓기도 하고 쌀을 곱게 해서 놓기도 하고 밀가루를 곱게 해서 놓기도 합니다. 그렇게 놓고 뭐가 됐나 하고 그 발자취를 보죠. 뱀이 지나간 자리가 있기도 하고 사람의 발자취가 있기도 하고 새의 발자취가 있기도 하고 두꺼비 발자취가 있기도 하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돼 있죠. 옛날에 저 어려서도 그렇게 하는 것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라는 거를 내세우고 모르는 사람을 깔보고 그러는데 내가 전자에, 과거에 몰랐을 때의 내 모습으로 보면 다 둥글게 쓸 수 있을 텐데 그냥 요 시대의 요것만 보기 때문에, 넓게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아주 저건 낮고 나는 높아지죠. 모두가 평등한데도 불구하고, 모두를 내 탓으로 돌리고 이렇게 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요. 가정에서도 한 사람이 죽어서, 이 죽은 사람들이 모일 때 깡통은 깡통대로 모이고 금은 금방에 모이고 넝마는 넝마전에 모인다는 말을 내가 가끔 합니다.
여러분! 한 가족이 모여서 사는 것도 잘 생각하십시오. 이거는 꼭 알아야 할 일입니다. 깡통이 저런 데 버려져 있으면 깡통을 집어서 깡통 모인 데 갖다 놓지 깡통을 집어서 금방으로 디밀진 않습니다. 안 그럴까요? 그리고 이 세상 돌아가는 걸 가만히 보세요. 배나 사과도 큰 거는 큰 것대로 작은 거는 작은 것대로 골라 놓고, 금은 아무리 하치않은 금이라도 금방으로 갈 것이고, 넝마는 넝마전으로 갈 것이고, 깡통은 깡통전으로 갈 것이고, 무쇠는 무쇠대로 무쇠전으로 갈 것이고, 사람이 사는 법도에서도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모이고, 스스로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교수는 교수대로 모일 거고 기사는 기사대로 모이고, 안 그렇습니까? 그거 몇 마디만 해도 아시겠죠?
그렇게 끼리끼리 모이듯이 한 가정을 이룬다 하더라도 우연은 하나도 없습니다. 끼리끼리 모여서 살게 마련이거든요. 자동적으로 그렇게 끼리끼리 모이게 돼 있어요. 그런데 부부지간이나 부모자식지간이나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이렇게 모두 각각 놀기 때문에 화목하지 못하고 불화가 일어나고, 불화가 일어나면 자식들은 그걸 배우고 그걸 따라가게 돼 있고, 은연중에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한 깡통이 부슬거린다고 이 깡통이 저쪽 깡통을 “너는 깡통이 돼서 그래!” 그러고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자기도 깡통인데요.
그래서 잘 살고 또 마음의 발전을 이루어서 자유인이 되려면 자식을 원망하지도 말고 부모를 원망하지도 말고 부부지간에 각자 서로를 원망하지도 마시라 이겁니다. 모두가 끼리끼리 차원대로, 5차원이면 5차원대로 만나고 1차원이면 1차원대로 만났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생겼고 상대가 생겼으니까 말썽이 생긴 거지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말썽이 어디 있겠는가.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벌어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부처님이 계신 줄 알았겠는가. 죽고 사는 걸, 생사의 모든 거를 알았겠는가. 아무것도 몰랐을 거다. 내가 이 세상에 있으니까 모두를 잘 알게 됐다.’ 하는 거죠.
그러니 내가 이 세상에 나서 이 모두를 보고 배우니 일체 만물만생이 다 스승 아님이 하나도 없다 하는 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길을 가다가 거룩한 나무가 한 그루 섰을 때에 내가 그걸 보고 좋아하면서 ‘아하, 저것 참 묘하게 생겼는데….’ 하고 쳐다볼 때에 그것도 스승인 것입니다. 발부리가 돌에 차여 발부리가 아파서 ‘아이고, 아파.’ 하고 있을 때에 바로 내가 있기 때문에 돌부리에 차인 거고 돌부리에 차였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또한 스승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원망을 해요? 그런데 번연히 자기가 잘못한 줄 알면서도 내가 ‘나’라고 세우고 이렇게 하니까 부처님께서 “모든 일을 네 탓으로 알고 네 모습으로 보고 네 아픔으로 보고, 네 부모로 보고 네 자식으로 보고 네 형제로 봐라. 그렇다면 수억겁을 미생물에서부터 거쳐서 진화돼서 사람까지 된 그 역사를 알 수 있느니라.” 하셨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

너무 경솔한 질문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가 무엇인지요? 물질이 충만하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자유로운데 너는 어째서 고리타분한 불교를 믿느냐고 주위에서 하도 쓴 소리를 합니다. 우리가 진정코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야만 진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지 확실한 답변을 듣고자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인간은 태어나서 철도 모르고 스무 살이 넘도록 천방지축 삽니다. 그것을 빼고 난 뒤에 50살 먹도록 살아나가는데 50살까지 근 한 30년 동안밖에는 의미를 가지고 산다고 볼 수 없겠습니다. 생각과 모든 것을 합류화할 수 있는, 철이 들었다고는 할 수 없지마는 인간의 의미로서 좋고 나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기회의 기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짧다고 생각하면 너무도 짧고 길다고 생각하면 무진히 길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잠자는 시간과 사는 시간, 일하는 시간을 빼고 기쁘고 호화롭고 즐겁고 한 시간은 그저 24시간 동안에 몇 시간 몇 분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거를 다 빼고 본다면 5년으로 줄일까요? 5년으로 줄인다면 그 5년 동안에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바른 대로 얘기지.
사람이 남녀를 막론해 놓고 20살이 넘어서 결혼을 한다 해도 아마 30%는 이혼한다고 봐야 되겠죠? 30, 40% 이혼한다고 보는 이유는 왜냐하면 이혼율도 그렇지만 살면서도 법적으로만 이혼을 안 했지 실지로는 이혼을 당하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배신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하면서도 배신을 당하고 사는 사람도 많거니와 삶의 보람을 극히 느끼지 못한 채 법적으로만 애를 기르면서 의무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또 많다고 봅니다.
그럼 거기에서 30% 40% 빼고 나면 뭐 있겠습니까? 이것저것 다 빼고 나니까 남는 거라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밖에는 없어요. 삼심(三心)이 화합이 돼서 일심(一心)으로서 우리가 모든 일을 해 나가는 데의 근본, 그것이 ‘참’이라고 볼 수 있겠죠.
참이라고 하는 그런 문제에 의해서 우리가 어차피 그렇게 살 거라면, 전에도 얘기했지만 인간이 되기가 극히, 천 년이 무색할 정도로 어려운데, 미생물에서 따지고 본다면 수십억 년이 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인간으로 등장한 지가. 그러면 인간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한 번을 뒤집어엎었고 또 한 번을 뒤집어엎었고 세 번째 가서 인간이 되고 난 뒤에 또 한 번 뒤집어엎은 이 세계적인 문제에 관한 건은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은 자신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 하나에 기준을 두어서 본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自神)’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겁니다. 그것을 믿지 않고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자유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로 인간이 살아나가면서 생각을 해 본다면 참으로 참혹한 일이 한두 건이 아니어서 어떤 때는 여러분이 울면 나도 울고 여러분이 웃을 때는 그저 씁쓸히 웃습니다. 왜 웃는 것도 즐겁게 웃지 못하고 왜 씁쓸히 웃어야 하나? 그것이 짧기 때문입니다. 웃는 것은 짧고 우는 것은 길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씁쓰름하게 웃어야만 하는 입장이 돼 버리고 우는 것은 여러분과 같이 길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떡하면 좀더 이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서 나는 다른 생각 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되게 해 달라고 한 번도 손을 꼽고 빌어 본 예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 양심이 더 잘 알죠. 누구에게 알아 달라고 하기 이전에 내 마음이, 내가 아는 것을 하늘 법계에서 전체 안다고 봅니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남이 알아주길 바라서 이런 일을 하고 또 자기가 윗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닙니다. 난 그런 걸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 되기도 그렇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람 살기도 그렇게 어려운데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떠한 것을 해 나가야 되느냐. 우리가 인간이 되기까지 그 수많은 겁을 거쳐 오면서 인간이 됐는데 무엇을 해야만 인간의 ‘고(苦)’라고 할까, 과정이라고 할까? 그것을 뛰어넘느냐? 그 과정을 고라고 생각하지 말고 공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 때에 우리는 지수화풍을 근거지로 해서 우주의 섭리와 대천세계의 섭리, 또 인간의 삶의 섭리, 대자연의 섭리를 파악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거기에서 한 가지 두 가지를 배워 나가려면 인간의 탈을 얼마큼 써야 되는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런 인연으로 만나기가 또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공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어렵다 이겁니다. 그건 왜? 여러분의 마음이 제각기 이리 변동이 되고 저리 변동이 되고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념으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변동이 돼서 이런 인연을 또 만나기 어려운 문제도 많습니다. 인연 만나기가 어려우니 우리가 이 몸 받아 가지고 이렇게 만났을 때 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열심히 하시라고, 생활 속에서 그대로니까 항상 열심히 하시라고 하는 겁니다. 타의를 믿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의를 믿어서, 반드시 그 정수에서 천차만별의 광대한 문제를 다 타개하라 이런 소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부처님 앞에 잘살게 해 달라고,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나 하면서 여기에 다니시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엄청난 문제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고등 동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중세계에서 광대한 정수를 가진 생명은 사람들밖엔 없죠. 상세계 차원으로 오르느냐, 하세계로 떨어지느냐, 중세계에서 맴도느냐 이것이 아주 중요하게 돼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절에나 왔다 갔다 하고, 뭐 기도나 하고, 절이나 하고 그러는 게 절에 다니는 신도인가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도 없고, 불자라고 할 수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이라고 할 수도 없죠. 그러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만약에 외계에서 우리 정수를 빼 간다거나 정자를 빼 간다거나, 그래서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거나 그런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착잡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계를 따져 본대도 소국은 항상 강대국에게 끌려가면서 같이 살게 돼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떡하든지 이 공부를 잘해서, 우리 마음을 과학자들한테 투입을 해서 그 과학자들이 잘 연구해서 그것을 대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도 진짜 보시고 보살행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보람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지금 이 법당이나 저기 요사채, 그런 것이 지은 지가 오래 돼서 갈라지고 썩어 내려가면 그건 헐고 다시 지어야죠. 그렇죠? 지구라고 해서 수명이 아주 영원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일거수일투족이 다 이 마음 안에서 나가야 할 문제인데, 일거수일투족이 다 이 광대한 정수 안에 들어 있는데, 그것을 몰라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름 에너지니 무슨 에너지니 무슨 에너지니 하는 그 문제들을 어떻게 다 감당해 나가겠습니까? 우리 차원이 높아야 보이지 않는 그 광대한 허공의 에너지를 꺼내 쓸 수가 있는 그런 도리가 생기지, 차원이 낮은 사람들끼리 산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꺼내 쓸 수가 있겠습니까.
수억겁을 살아 내려오면서 눈물겹도록 아팠고, 눈물겹도록 먹혔고, 눈물겹도록 짓밟혔는데 어떻게 더 겪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거짓이 아니라 정말로 가슴이 아픕니다. 아마 내가 입으로만 그런다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겁니다. 일체 만물만생의 마음도 다 알겠죠. 저런 나무들도요, 들판의 돌도요. 그러니 우리는 좀더 눈을 크게 뜨고 내다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돼야 하리라고 봅니다.
2008-03-01 오후 11: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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