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 ‘본래무일물’이라 해도 인가를 못하겠다. 어떻게 인가를 받겠는가?
전강, (묵묵히 손을 모아 세 번 예를 올리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전강(田岡, 1898∼1975) 스님의 나이, 26세가 되던 해 금강산 지장암으로 한암(漢岩, 1876~1951) 스님을 찾아가 참문했다.
전강 스님의 개오를 소문으로 듣고 있던 한암 스님이 물었다.
“육조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진여당처에는 본래 한 물건도 없다)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해도 인가를 못하겠다. 그러니 자네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전강 스님은 묵묵히 손을 모아 세 번 예를 올리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에 한암 스님은 말없이 스님을 긍정하였다. 입을 열면 그르치고(開口卽錯) 생각을 일으키면 어긋나고 마는(動念卽乖) 위기일발의 순간에 전강 스님은 ‘죽은 말(死句)’이 아닌 ‘살아 있는 말(活句)’인 묘용(妙用)으로 즉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생한 몸짓 언어에 한암 스님 역시 말없이 수긍함으로써 말길이 끊어진 무언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위 문답에 나오는 ‘본래무일물’이란 말은 육조혜능 선사의 게송에서 비롯됐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에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거울 또한 틀이 아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느 곳에 티끌 일어나랴)
이 게송은 원래 신수 스님의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라. 수시로 털고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는 게송을 극적으로 뒤집어 오조홍인 스님의 인가를 받은 노래이다. 육조 스님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고 청정한 본래면목(本來面目: 성품) 즉, ‘한 물건도 없는’ 공성(空性)을 요달하면 걸레나 빗자루를 들고 쓸고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본래면목을 묻는 질문에 전강 스님은 말을 빌리지 않고 온몸으로 그 뜻을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합장하고 삼배하는 행위가 그것이란 말인가?
<조당집>에 나오는 선종 선사의 다음 문답을 참구해 보자.
“옛 사람이 말하길, ‘밤마다 부처(본래면목, 불성)를 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종 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옛 사람의 말을 믿는가?”
“학인은 절대 위배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만약 옛 사람을 믿는다면 합장하고 묻는 그대가 바로 부처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묻고 답하는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은 부처를 어떤 개념이나 고정관념, 형상 등 모양(相)에서 찾지 않는 것이다. 육조 스님은 “마음은 넓고 커서 법계(法界)에 두루해 있다. 쓰면 아주 분명하고, 응용에 따라 일체를 알아서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이며, 가고 옴에 자유로워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곧 반야다”라고 하였다. 사람마다 가진 이 신령스럽게 비추는 성품은 시방세계를 통해서 머리 머리마다 밝고, 물건마다에 항상 밝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