總說 5
故經云 若偏修禪定福德 不學智慧 名之曰愚 偏學智慧 不修禪定福德 名之曰狂 狂愚之過 雖小不同 邪見輪轉 蓋無差別 若不均等 此則行乖圓備 何能疾登極果
여기에서는 지관을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 수행할 경우 그 폐단에 대해서 경전에서 인용하여 증명하고 있다. 수행인이 선정에 의한 복덕을 오로지 유위법으로만 짓고 지혜를 배우지 않는다면 끝내 생사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복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회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와는 반대로 지혜 쪽으로만 치우치게 배운다면 이를 두고 복만 있고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복이라고 한다. 예를 든다면 위로는 천문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를 통달하여 세간의 지혜와 변재가 특출하게 뛰어난 인재라 해도 일생을 가난하고 괴롭게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미친 지혜만 있고 복은 없기 때문이다.
미친 지혜와 어리석은 복, 이 둘의 허물이 동일하지 않으나 끝내 그 모두는 잘못된 복과 지혜를 끝까지 다 사용한다 해도 생사에서 벗어난 대해탈인은 되지 못한다. 모두가 생사윤회 가운데서 고통받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지관수행이 평등하지 못하고 선정과 지혜가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수행은 빠짐없이 원융한 중도를 어긋나 위없는 극치의 깨달음을 얻고자 해도 끝내 그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
가령 염불수행을 할 때 입으로만 아미타부처님 명호를 외우고 마음속으로 망상을 잠재우지 못한다면 이는 관수행만 있을 뿐 지수행이 없으므로 지혜만 있고 그를 뒷받침할 선정이 없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망념은 없으나 그 마음이 애매모호하게 어둡다면 이는 지수행만 있을 뿐 관수행이 전혀 없어 선정만 있고 지혜는 없게 된다. 이같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염불수행을 한다면 결정코 깨달음의 이익을 얻기 어렵다. 그러므로 반드시 선정과 지혜가 원융하고 마음과 행위가 합일한 상태에서 일념으로 염불해야만 정토업을 신속하게 이루고 극락구품연대에 높게 오를 수 있고 끝내는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 위없는 보리과를 증득할 수 있다.
故經云 聲聞之人定力多故 不見佛性
이 문단에서도 경전에서 인용하여 지관을 쌍으로 운행하는 것이 절실히 중요함을 밝히고 있다. 위의 문단에서 수행인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안된다고 말했다. 만일 선정 쪽으로만 치우친다면 지혜가 없는 바짝 마른 선정에 떨어지고 지혜 쪽으로만 닦는다면 미친 지혜로 타락한다 하였다. 때문에 여기에서 다시 지관을 수행하는 자라면 반드시 지관이 균등해야 하고 정혜가 원융해야만 한다고 거듭 경전에서 인용하여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문’은 부처님이 사제(四諦)설법하는 음성교화를 직접 들어야만 도를 깨닫는 자란 의미이다. 이는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소승인이다.
성문은 유를 버리고 공을 관찰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극치를 삼는다. 일체 현상제법은 그 자체가 공적하여 끝내 그 실체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현실 유를 떠난 밖에서 따로의 공에 집착하여 공정(空定)에 치우치므로 진공묘유(眞空妙有)에 대한 중도지혜관조가 결손된다. 때문에 공과 유가 둘이 아닌 중도불성의 이치를 보지 못한다.
十住菩薩智慧力多 雖見佛性而不明了
불성은 공에 막히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유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공과 유의 이변에 떨어지지 않고 역시 이변을 떠난 따로의 중도모습도 아니다. ‘십주보살(十住菩薩)’은 성문인과는 반대로 선정의 힘은 부족하고 지혜 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들은 본질인 공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 가유(假有)로 나와 중도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처음 발심주(發心住)에서 불퇴위인 제칠주에 이르러 삼계견사혹(三界見思惑)을 끊고 다시 제팔주에서 제십주에 이르러서 진사혹(塵沙惑)을 수행해서 깨달은 분야만큼 타파한다. 그러므로 진제의 공에서 다시 속제인 현실 가유로 나와 중도불성의 이치를 비량으로 흡사하게 이해하긴 하나 그 이치를 명료하게 깨닫지는 못한다. 그 경지는 마치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밝은 달을 겨우 희미하게 보는 것과도 같다 한다.
諸佛如來定慧力等 是故了了 見於佛性
유독 여래만이 비공비유(非空非有)의 이치를 명료하게 통달하고 자연스럽게 다시 즉공즉유(卽空卽有) 할 수 있어 공과 유를 쌍으로 부정함과 동시에 이를 동시에 쌍으로 긍정하는 묘용을 일으킬 수 있다. 그 경지는 공과 유가 둘이 아니고 정혜가 평등하여 이변이 상대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이변을 떠난 따로의 중도도 안립하지 않는다. 때문에 부처님은 명료하게 중도불성의 이치를 볼 수 있다.
육도세계의 범부는 현상 유에 집착하고, 성문은 현실 유를 떠난 따로의 공에 집착하고, 보살은 제도 받을 중생과 제도하는 자신이 있다는 이변업(二邊業)에 집착한다.
그들 모두는 방향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부처님만은 공과 유를 동시에 떠난 상태에서 다시 즉공즉유하며, 이변을 버리고 중도마저 멀리하여 오직 원융한 중도묘관으로 불성의 이치를 철저하게 관조한다. 그 경지는 공도 유도 중도도 아니지만 공과 유와 중도가 따로 분리하지 않고 바로 상즉관계를 이룬다.〔비공비유비중도 즉공즉유즉중도(非空非有非中道 卽空卽有卽中道)〕
이는 일체 현실의 차별상을 떠난 상태에서 다시 일체법과 상즉관계로서 상즉을 떠났지만 상즉 아님까지도 떠나 바로 상즉인 상태에서 즉시 상즉의 모습도 아니다. 〔이즉이비 시즉비즉(離卽離非 是卽非卽)〕때문에 중도불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같은 여래의 선정과 삼매는 무엇을 통해서 증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지관을 수행함으로써만 성취된다. 지는 선정이고 관은 지혜이다 . 정혜를 원융하게 이루고 지관을 평등하게 수행하여 고요와 관조가 둘이 아니고〔적조불이(寂照不二)〕지혜광명과 마음의 고요가 하나의 자체〔명정일체(明靜一體)〕라야만 여래의 지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수행폐단이 없게 된다.
옛날 큰스님은 말하기를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뚜렷하면 옳고〔적적성성시(寂寂惺惺是)〕고요한 가운데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틀린 것이다〔적적무기비(寂寂無記非)〕” 라고 하였다.
이처럼 마음이 뚜렷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관수행만 있고 지수행이 없게 되므로 〔유관무지(有觀無止)〕 지혜만 있고 선정은 없게 되며, 반대로 고요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지수행만 있고 관수행은 없게 되어〔유지무관(有止無觀)〕선정만 있고 지혜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수행을 한다면 끝내 선정과 지혜에 있어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는 중도불성의 이치를 보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반드시 마음이 항상 고요한 가운데 항상 뚜렷해야만 한다. 〔상적적이상성성(常寂寂而常惺惺)〕 고요할 땐 마음에 조금도 흐릿함이 없이 분명해야만 하는데 이는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분명히 관조하는 모습이다. 〔즉적이조(卽寂而照)〕 또 항상 뚜렷한 상태에서 항상 고요하여 분명하게 관조하면서도 일념망상도 일어나지 않고 바로 관조하면서 그 자리에서 고요해야만 한다. 〔즉조이적(卽照而寂)〕 따라서 마음은 고요한 상태에서 항상 분명함은 즉지이관(卽止而觀)이고 항상 분명한 상태에서 항상 고요함은 즉관이지(卽觀而止)다.
이를 두고 마음이 분명함과 고요함이 둘이 아니며〔성적불이(惺寂不二)〕 지와 관이 일여함이라 하는데〔지관일여(止觀一如)〕, 이처럼 지관을 쌍으로 운행해야만 진실한 지관수행이고 그에 따른 정혜도 원융함이라고 한다.
일념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항상 뚜렷하고, 뚜렷한 가운데 한 생각 망상도 일으키지 않아야만 선정과 지혜가 이를 따라 일어나며 지혜의 밝음과 마음의 고요가 동시에 환하게 발현한다. 이것이 지관수행의 요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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