總說 3
止是禪定之勝因 觀是智慧之由籍
이 두 구절에선 ‘지관’ 수행법은 서로가 동시적으로 밑받침이 되는 상호관계성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지’수행을 닦아야만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쉴 수 있다. 따라서 ‘지’수행은 선정삼매를 이루는 뛰어난 원인이며 선정삼매는 ‘지’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훌륭한 결과이다. 선정은 바로 삼매를 의미한다. ‘지’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삼매를 얻을 수 있겠는가. ‘삼매(三昧)’는 범어이다. 이를 한문으로 의역하면 ‘정정(正定)’ 또는 ‘조직정(調直定)’이라고 한다.
우리 중생들은 하루 종일 허겁지겁 동분서주하면서 조화롭고 곧은 마음을 쓰지 못한다. 이는 마치 요동치는 항아리 속의 탁한 물은 고요하게 안정시켜야만 맑아지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탁하고 시끄러운 마음을 담연하게 고요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수행한다면 자연히 청정해질 것이다. 옛사람은 이 점에 대해 “삼라만상이 목전에 나타난다 해도 나의 중심은 시끄럽게 요동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우리가 만물에 무심할 수만 있으면 만물에 항상 에워싸여 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이는 마치 무쇠로 만든 감정없는 소는 사자의 포효소리에도 두려워 하지 않고 나무로 조성한 장승은 아름다운 꽃이나 재잘대는 새를 본다 해도 전혀 느낌이 없는 것과 같다.
삼라만상이 목전에 어지럽게 나타난다 해도 자신의 마음은 담담하고 적적하기만 하여 산란심으로 요동하지 않고 항상 선정 속에 있다. 우리가 이 같은 선정삼매를 아직 얻지 못했다면 반드시 ‘지’수행을 닦아야만 산란하게 움직이는 망상을 정지할 수 있다. 때문에 “지를 닦으면 그것이 선정삼매의 결실을 이룰 수 있는 훌륭한 씨앗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관수행을 하면 지혜가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다” 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지혜는 무엇을 따라서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지혜는 반드시 ‘관’수행을 통해서만이 얻어진다. 때문에 “관수행을 의지해 지혜가 일어난다” 고 하였다.
‘관’의 의미를 말해본다면 관조(觀照)이다. 이는 선종(禪宗)에서 ‘화두를 돌이켜 관조한다’ 한 경우와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 했을 때의 ‘관조’의 의미와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지’수행을 따라서 ‘관’수행에 도달하며 ‘지’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선정을 바탕으로 ‘관’수행을 따라 일어난 지혜가 발현한다.
다시 말해서 ‘관’은 ‘지’를 따라서 일어나고 ‘혜(慧)’는 ‘정(定)’을 통해서 발현한다.
이를 두고 ‘지관쌍운(止觀雙運)’ ‘정혜등지(定慧等持)’ 라고 한다.
부처님 경전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그 모두가 선정삼매를 통해서 일어난다” 고 하였다.
‘관’수행을 통해서 지혜관조의 작용이 환하게 나타나야만 일체제법이 허깨비와 같음을 통달하고 일체제법은 있다 해도 그 실체가 없음으로 공(空)이며, 실체 없는 제법이 다시 인연을 따라 일어났으므로 현상세계는 목전에 있다 해도 가(假)이다. 이 둘은 ‘공’이면서 ‘가’이고 ‘가’이면서 ‘공’이므로 ‘공’과 ‘가’가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중도’의 이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정과 그에 따른 지혜를 얻으려면 ‘지관’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모든 종파의 수행인들이 각양각색 다른 모습으로 수행을 한다 해도 그 모든 수행은 ‘지관’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염불수행과 좌선참구로 부터서 간경을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수행이 실제에 있어선 ‘지관’의 이치를 의지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예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면 경전을 독송할 경우 지극일념으로 경전의 도리에 집중하여 마음이 혼란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지’이고 경전을 통해서 얻어진 도리를 의식으로 분명하게 관조하는 것은 ‘관’이다.
또 하나의 예를 더 든다면 우리가 염불수행을 할 때에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일심으로 지니면서 마음이 혼란하지 않는 상태가 ‘지’이고 마음이 혼란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처님 명호를 더욱 분명하게 부르는 것은 ‘관’이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향을 사르고 꽃을 올리고 예불하고 경전을 독송하는 등등 이 모든 수행문이 ‘지관’이라는 두 법문을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지관’수행의 효용이다.
若人成就定慧二法 斯乃自利利他法皆具足
여기에서는 ‘지관’을 수행하면 뛰어난 이익이 있음을 밝혔다. ‘지’는 선정(定)을 이루는 근본(因)이고 지혜(慧)는 ‘관’수행의 결과(果)이다.
가령 수행인이 정혜(定慧)를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자리이타행을 일으킬 수 있다. 자리는 모든 중생에게 안락함을 부여하는 대자(大慈)의 마음이고 이타는 모든 사람들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대비(大悲)의 마음이다.
수행인이 자리의 선정과 이타의 지혜를 만족하게 갖춘다면 자비와 지혜를 치우침 없이 쌍으로 운행할 수 있고 자타가 함께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이는 지관수행을 겸수함으로써만이 이루어진다.
故法華經云 佛住大乘 如其所得法 定慧莊嚴 以此度衆生
여기서는 ‘법화경’에서 인용하여 지관수행으로 얻어진 뛰어난 이익을 증명하고 있다.
이 문제를 법화경에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은 지관이 둘이 아닌 대승법 가운데 머물면서 거기에서 얻은 법에 걸맞게 지관정혜의 힘으로 장엄하지 않음이 없으시다. 지를 통해 선정을 얻어 복덕(福德)으로 장엄하고 관수행으로 혜를 얻어 지덕(智德)으로 장엄하였다. 부처님은 이처럼 복덕과 지덕 이 두 가지 덕으로 자심본성을 장엄하여 복덕 지덕과 그 자성이 둘이 아닌 오묘한 장엄을 하였다. 지금 부처님은 자신이 장엄한 선정과 지혜로 다시 모든 중생까지 장엄하여 이로써 모든 중생을 제도하신다.
부처님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복덕과 지덕일 뿐이며 이는 지관수행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當知此之二法 如車之雙輪 鳥之兩翼 若偏修習 卽墮邪倒
여기서는 지관수행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경우 그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마땅히 알아야만 된다〔당지(當知)〕이 두 글자는 경책하고 훈계하는 말이다. 그 의도는 지관을 쌍으로 닦아야 한다는 의미를 모른다면 올바른 불도로 쉽사리 승진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지관 두 법을 비유한다면 수레의 양쪽 바퀴와 같다. 또 새의 양 날개와도 같다. 수레는 양쪽 바퀴가 있어야만 천리 먼 길을 갈 수 있고 새는 두 날개가 있어야만 드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관 두 법을 하나로 합하면 둘 다 아름답겠지만 서로를 따로 분리한다면 양쪽 수행 모두가 손상되므로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도 결손돼선 안된다.
가령 선정에만 치우치고 지혜를 소홀히 한다면 바짝 마른 선정에 떨어지고 반대로 지혜만 소중히 여기고 선정을 파기한다면 미친 지혜를 이루게 되어 이 둘의 경우가 똑같이 병통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문장에선 경전에서 인용하여 이 의미를 증명하고 있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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