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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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 스님(2)
전강, 무자 의지를 반만 일러주십시오
혜봉, 무(無)!
자네가 한번 일러보게
전강, 무(無)!

전강(田岡, 1898∼1975) 선사가 24세 때였다. 마침 마곡사 아래 구암리에 주석하고 있던 선지식 혜봉(慧峯, 1874~1956) 스님을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
“조주 무자(無字) 의지는 천하 선지식도 반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무자 의지를 반만 일러주십시오.”
혜봉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無)!”라고 말했다.
“그것이 어찌 반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럼, 전강 자네가 한번 일러보게.”
“무(無)!”
자신의 기량을 점검하는 동시에 선지식을 저울질 하러 갔던 전강 스님은 ‘무자’공안에 대한 혜봉 스님의 답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별달리 기특한 말이 아닌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두 선사의 ‘무(無)’는 과연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조주록>에 나오는 ‘무자 공안’의 한 장면은 다음과 같다.
학인이 조주 스님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狗子還有佛性也無)?”
“없다(無).”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왜 개에게는 없습니까?”
“그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에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 사상은 여러 경전에 나오는 말씀이다. 즉 곤충이나 미물에 이르기까지 몸을 움직일 줄 알기만 한다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으니, 개에게도 불성이 있어야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미나 미물은 전생의 지은 업보로 인하여 축생이 되었고 지혜도 없다. 불성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따라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있다고도 하기 애매한 것이다. 이 공안에서 조주 스님이 ‘업식성 운운’ 한 것은 낮은 근기의 학인을 위하여 설명한 것일 뿐, ‘무(無)’라고 말한 본뜻이 따로 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조주 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는 학인들의 질문에 대해 때론 ‘있다’, 때론 ‘없다’고 답하면서 무수한 수행자들을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경지로 몰아넣었다.
이 공안은 사량ㆍ분별로는 접근이 불가능하기에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하고 스스로 화두를 들고 참구할 수밖에 없다.
이 공안은 이미 부처님 당시에도 화제가 된 문제였다.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불성에 대해 설하시면서 중도(中道)를 곁들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合故 名爲中道).”
부처님께서도 이미, 조주 선사와 같이 불성에 대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고정적인 답변을 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있다거나 없다고 할 때의 ‘없다’라는데 걸리면 ‘무자’ 화두는 평생 해결 못하는 난제로 남게 된다.
결국 무수한 가르침을 일단 제쳐두고 직접 ‘무자’와 철저히 한 몸이 되어 조주 스님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8-03-01 오후 2: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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