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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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망상 일어난 자리가 진심자리 망상밖서 진심 구하지마라
總說 3
所以然者 止乃伏結之初門 觀亦斷惑之正要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止觀’법문이 열반으로 들어가는 첩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중생을 결박하는 번뇌부터 설명하기로 한다.
‘結’은 중생을 자유롭지 못하게 속박하고 고통으로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결사번뇌(結使煩惱)라고 한다. 즉 삼계내 범부의 번뇌인 견사결(見思結), 삼계 밖에서 소승인이 일으키는 진사결(塵思結)이 있는데, 이는 지말번뇌이다. 대승보살이 일으키는 근본번뇌인 무명결(無明結), 이 세 종류의 근본ㆍ지말번뇌를 총체적으로 하나의 의미로 묶어 ‘結’ 이라고 한다.
범부 중생은 이 세 종류 번뇌 모두에 결박당하여 전혀 자유롭지 못하므로 종일 토록 깜깜하고 애매모호하여 시끄러운 번뇌가 쉬지를 않는다.

같은 번뇌를 어떻게 다스려야만 하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지’ 수행공부를 통해서 이상의 세 종류의 번뇌를 조복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지’ 수행을 통해서는겨우 조복만 받을 수 있을 뿐 실제로는 그 근본뿌리까지 단절하지는 못한다. 이는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았을 때 그 줄기는 자라지 못할지라도 뿌리는 땅속에서 그대로 살아 있으므로 돌만 들어내면 언제라도 그 줄기가 되살아나는 이치와도 같다. 그러므로 ‘지’ 수행문은 번뇌를 항복받는 초보에 불과할 뿐이다.
다음으로 ‘관’을 설명해보자.
‘관’은 ‘지’를 통해 번뇌를 그친 자리에서 다시 올바른 지혜 관찰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 마음속에 깊이 박힌 번뇌의 근본뿌리를 끝까지 끊고자 한다면 반드시 올바른 지혜로 제법실상의 이치를 정확히 관찰하고 그 근원뿌리마저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비유하면 날카로운 칼로 땅속에 잠복해 있는 풀뿌리까지 절단하여 영원히 거듭 되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이치와도 같다.
그러므로 ‘관’수행은 번뇌를 끝까지 끊고 진여를 증득하는 올바른 요점이자 최초의 수행방편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를 통해서 우선 번뇌를 조복 받아야만 하고 지말번뇌의 조복이 이미 끝났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관 수행을 일으켜 반드시 지말번뇌를 일으키는 근본무명 번뇌의 뿌리마저 끊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관’을 수행하는 목적은 번뇌를 끊고 생사를 초월하여 보리를 성취하는 데에 있다면 ‘지관’법문이야말로 모든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올바른 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천태 일개종파에 국한되지 않고 여타 어떤 종파의 수행을 막론하고 그들 모두는 번뇌를 끊고 진여를 증득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다. 이를 두고 모든 수행의 ‘정요(正要)’가 ‘지관’이라고 했을 것이다.

止則愛養心識之善資 觀則策發神解之妙術
여기서는 지관수행을 행했을 때 그에 따라 일어나는 ‘지관’의 오묘한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내적으로 마음을 아끼고 기르려 한다면 ‘지’ 수행이 아니면 불가능하며, 신령한 견해가 일어나게 하려면 ‘관’수행을 버리면 도달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평소에 ‘지관’을 수행하지 않을 땐 마음은 마치 보는 대로 흉내 내기 좋아하는 원숭이처럼 하루 종일 망상만이 어지럽게 분분하다.
그러나 ‘지’ 수행을 닦고 나면 망상은 정화되고 의식은 분명해져 탁한 생각은 맑아지고 마음은 청정해진다. 그러므로 ‘지’ 수행은 내적으로 마음을 조화하고 기르는데 장점이 있고 신령한 본성이 발현할 수 있도록 보조역할을 해주는 훌륭한 방법이기도 하다.
앞에서 이미 ‘지’ 수행을 통해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망상잡념을 잠재우고 조복 받았으며, 다시 ‘관’ 수행을 일으켜 회광반조하는 공부로 제법실상을 환하게 관찰하였다. 이처럼 오랫동안 공부를 계속하면 자기 마음속에서 신통묘혜와 지혜광명이 홀연히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지’ 수행은 산만하게 움직이는 산란심을 억제하고, ‘관’ 수행은 내 마음 속에 어두운 구석을 관찰한다. 다시 말해서 ‘지’ 수행을 통해서 모든 번뇌집착을 놓아버리고 ‘관’ 수행은 번뇌를 놓아버린 그 자리에서 다시 올바른 지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지관’을 병행해야만 우리 마음을 잘 기를 수 있고, 다시 신령한 지혜가 일어날 수 있도록 경책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망상의 마음이 바로 생사를 일으키는 근본이다. 때문에 영가(永嘉) 스님은 이를 두고 “공덕을 덜어내고 법신을 성취한 바탕을 소멸하는 그 모두가 망상을 따라 일어난다” 하였다.
이처럼 망상이 이미 선법이 아니건만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그 마음을 기르고 아껴야만 하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점은 망상인 심의식(心意識)이 번뇌악법이라고는 하나 그 번뇌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가운데에 여래지혜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탁수가 맑아지면 그 물이 바로 청수이듯. 그 때문에 망상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보호해야만 한다.
또 망상심식은 모든 선악업의 인연을 따르는 작용도 함께 갖추고 있다. 가령 그 마음으로 악업을 지으면 끝없이 삼악도에 윤회하겠지만, 반대로 선업으로 사용하면 생사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도 역시 망상을 떠나지 않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천태종에선 최초로 수행을 시작할 때 제6의식, 즉 현재 일어나는 망상에서 시작하라고 가르친다. 그 의도는 생멸에서 생멸망상이 본래 없는 이치를 관찰하여 생멸이 끊긴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려 함인데, 요컨대 망상 속에서 진심을 구하고, 망상 밖에서 따로 존재하는 진심을 구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들 중생은 최초엔 완전한 진심상태에서 홀연히 망상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지관’을 수행한다면 전체의 망상에서 전체의 진심에 도달할 수 있다. 가령 망상을 떠나서 진심을 별개의 모습으로 따로 구한다면 그것은 마치 파도를 버리고 물을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다시 말해서 파도가 일어나는 곳이 원래 물이듯이 망상 일어나는 자리가 본래 진심자리이다.
망상에서 사량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면밀한 지혜로 관조하여 그 수행을 오래도록 지속한다면 언젠가는 마치 통밑이 쑥 빠지듯 마음이 활짝 열릴 것이다. 이러한 시절을 두고 온 대지가 있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허공마저 분쇄되어 신령한 광채가 절대 홀로 빛이나 육근과 육진의 구속에서 아득히 벗어난다고 한다. 이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지’수행이 아니면 산란심을 조복 받을 수 없고 ‘관’ 수행이 아니면 신령한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지관’ 두 수행법이야말로 상즉관계를 이루어 피차가 서로에게 바탕이 되고 보조역할을 하여 상호간에 동시적인 관계를 이루므로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뜨리면 올바른 중도수행이 성립되지 않는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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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1 오후 2: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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