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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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꾸준히 뚜벅뚜벅 물 흐르듯이 사세요!
내 마음이 아는 걸 우주법계에서 다 알고 있어!

(지난 호에 이어서)
여러분, 이거를 잘 음미해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어떤 때 피곤할 때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하죠, 이 안에서. 몸이 피곤하면 ‘아휴!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해?’ 하고 알게 해주죠. 또 피곤하면 ‘아! 조금 쉬어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자기 몸을 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게 즐겁게 해줍니까? 그렇게 ‘내가 피곤하지!’ 그러면 벌써 알게끔 해서, ‘좀 쉬어야지!’ 하고, 쉬게끔 마음이 들게 하고, ‘아휴, 좀 개운한데!’ 하게끔 만들고, 그러고서 또 피곤하면 ‘목욕 좀 해야지!’ 요런 마음이 들게 하고. 일일이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아름답게 건건이 자기를 생각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주인공입니다. 참자기 주인공인데 이름을 주인공이라고 붙였을 뿐입니다.
그것이 자연적으로 자연의 섭리로서 그렇다면, 누구한테나 마음은 갈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내는 건 수천 수억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응! 마음은 하나야. 그러나 마음내는 거는 수억, 우주 삼라대천세계에 꽉 찰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내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뱀도 내가 될 수 있고, 개구리도 내가 될 수 있고, 새도 내가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내가 될 수 있고 모두가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대하다, 위대치 않다’라는 말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내용들을 어떻게 하면 여러분에게 알게 하고, 순간 자기가 자기를 알게 될까 하는 생각에서, ‘모든 걸 놔라, 놔라’ 이럽니다. 놓지 않고는 도저히 해결이 안 납니다. 사는 자체가 다 바로 그놈이 하는 거라고 믿고 놓아야 합니다. 만약 그놈임을 믿지 않고 그놈한테 다 맡겨 놓질 않는다면 그놈은 절대 나오질 않아. 회사에서도 어느 믿을 만한 직원한테다 딱 맡기면 도둑질도 못해, 맡겼기 때문에. 그리고 더 잘해요. 그런데 맡기질 않으면 그게 참 나오려고도 안 해요. 왜? 막아져 있으니까. 제 잘났다고 턱 하니 자기가 위로 올라앉았으니, 참자기는 나오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참자기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자기한테 머리 숙여 숭배해야 해요. 자기 조상이니까, 자기 아비라고. 겸손하게 보필하면서 자기는 믿어야 된다 이거야, 마음적으로. 그래서 믿어서 그것이 완전히 둘이 아니었을 때에, 아비가 자식이고 자식이 아비이고 말이야. 이거 왜 이렇게 되느냐? 아비면 그냥 아비지, 왜 아비이자 자식이고 자식이자 아비라고 그러느냐? 불이법(不二法)이 그러하다는 얘깁니다.
그건 왜? 그렇지 않으면 연속해서 길이 될 수가 없거든. 즉 예를 들어서 높은 일도 있고 낮은 일도 있고 아주 하(下)의 일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라고 하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해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없고 자식이 없다면, 이건 뭐 진리라고 볼 수도 없지 않습니까? 나라의 일도 그렇고, 모든 게 삼위일체로써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럴 때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이러는 법은, 즉 말하자면 아버지가 일을 할 때는 아들이 아버지로 돼주고, 아들이 일할 때는 아버지가 아들로 하나가 돼주고,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될지언정 결국 하나다 이겁니다. 뱀이 일할 때는 스님도 뱀이 돼버리고 또 스님이 일할 땐 뱀이 바로 스님이 돼버리고, 사자가 스님이 돼버리고 스님이 사자가 돼버리고, 코끼리가 사람이 돼버리고 사람이 코끼리가 돼버리고, 그게 마음은 하난데 마음이 수천수만 가지로 생각을 낼 수 있으니 그 모습조차도 바꿔지더라 이런 겁니다.
우리가 수없이 거듭거듭 거쳐 나오면서 모습을 바꿔가지고 나온 그 자체가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우리가 계발하고 연구하고 그러는 자연의 섭리 그 자체가 바로 우리의 스승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연의 이 토대가 바로 어디에서부터 온 겁니까? 모두들 지수화풍이 허무하다고 그러지만, 지금 지수화풍이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지수화풍이 없으면 지금 우린 꼼짝도 아니, 생겨나지도 못했죠.
지금 다른 혹성에도 이런 게 있죠. 우리 지구에도 그렇지만 법망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 지구에도 망사처럼 이렇게 큰 둘레로 돼 있는 법망이 있습니다. 그 법망으로 인해서 전체가 같이 이렇게 돌아가고, 바깥으로 표시가 돼 있는 것도 있다는 얘깁니다. 즉 말하자면 핏줄처럼 돼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이것이 어디로 해서 어떻게 나가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법망이 보이지 않는 데 법망이거든요. 조금이나마 바깥으로 표현된 것도 천체망원경으로 봤기 때문에 표현된 거지 육안으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죠.
그러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그것을 바로 우리가 현세에 이렇게라도 볼 수 있게끔 나온 것이 어찌 과학이 아니겠느냐는 얘깁니다. 우리는 볼 수 없는 그 자체 속에서 분자에 의해서 생명이 되고, 그 생명에 의해서 진화가 되고, 이렇게 자꾸자꾸 나투면서 우리는 지금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빛을 발하면서 활발하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끊임없이 돌고 있는데, 지금 이 안에서는 우리가 지금 그렇게 가고 있다는 걸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것이 지금 어디로 어떻게 돌고 있는지 그런 것은 모릅니다.
그러면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몸뚱이 속에 생명들은 지금 내가 저기 갔는지 여기 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알고 있나.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뱃속의 오장육부 세포에서도 다 알고 있는 겁니다. 여기까지 왔다고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묘법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없는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도 누가 알겠느냐 하겠지만 이 뱃속의 생명들이 오죽이나 많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죄 알고 있으니, 우주간 법계에 다 이건 그냥 파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니 이거 거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거짓을 하더라도 ‘거짓 아닌 거짓을 해라.’ 이겁니다. 즉 말하자면 남을 위한 거짓이라면, 부모를 위한 거짓이라면, 자식을 위한 거짓이라면 거짓이 아닙니다. 그건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좀더 이것을 잘 음미해 본다면 이 보이지 않는 데에 진출하는 이런 마음은 부처님 법의 경을 읽고 또 이론으로 알고 또 물리를 안다고 해서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제아무리 잘 안다고 하더라도 한번 내가 집어먹을 줄 모른다면 그건 아무 소용 없는 겁니다. 한번 집어먹을 줄 알고 남을 줄 줄 안다면, 그것은 자기 죽는 거, 이 옷 벗는 거를 그렇게 뭐 대단하게 생각 안 합니다. 이 자리 저 자리를 육신으로 다니며 하려면 그게 얼마나 하겠습니까? 옛날에는 사람이 몇 안 되고, 칼이나 창이나 활이나 또는 대포를 가지고 해도 싸움이 됐지만, 지금은 안됩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사람도 많이 생겼을 뿐 아니라, 사람의 머리도 그만큼 깨었고, 그만큼 과학적으로 발달이 됐고, 문명으로나 모든 걸로 봐서는 지금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죠. 그런데 이 공부하는 사람은 한 술 더 떠서 공중에서 싸운다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커버할 수 있고 앞장설 수 있는 대인이 되시라 이겁니다. 이파리 하나 가지고도 군사를 몇백 명이라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기르라 이 소립니다.
그런데 무엇이 언짢고 귀찮을 게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너무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너무나 인간살이를 어렵게만 생각해서 그러는데, 고통을 아무리 받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내 주인으로부터 나를 형성시켜서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니 부와 자가 하나가 된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마음은 하나인데 마음내는 거는 수억만 가지입니다. 수억만 가지가 한마음으로 들고, 한마음에서 수억만 가지가 난다 이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묘법이고 광대무변한 자신의 보배를 자신들이 가졌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수억만 명을 만들어서, 이 우주를 덮게끔 할 수도 있어. 지금 모습 없는 모습들이 각 혹성에서도 바라고 있으니까! 모습 있는 생명들도 많지만, 모습 없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 헤아릴 수가 없을 거예요. 그거 헤아릴 수 없을 거예요, 아마. 그것이 다 친구라면 무서울 게 뭐 있고 두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그리고 소도 사람을 처음 봐서 아무것도 모를 때도 사람 마음을 거기 줬을 때에는 그 소가 ‘아하! 이 마음이 이러니까….’ 하고 그냥 마음에 따라서 같이 알게 돼요. 전체를 아는 게 아니라 그 범위 내에서만. 그렇기 때문에 길을 따라준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위대하죠. 사람은 전체를 알고 있는데, 짐승은 부분적으로 자기가 생각해서 알고 있는 거 그것뿐이거든요.
그러니 나라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면, 예를 들어 공산주의 나라가 독재로 다스려서 이익이 뭐 있느냐 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앞으로 계발을 한다면, 또 모든 에너지를 같이 이렇게 평등하게 만든다면, 어떤 문제라도 뛰어넘을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마 3, 4년 전 얘기일 겁니다. 나는 중공이든지 소련이든지 어디든지, 민주화로 좀 이렇게 같이, 물을 좀 갖다 섞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가? 앞으로도 우리가 마음을 그렇게 섞지 않는다면 살기가 희박하다는 문제입니다. 전부 계발하기도 희박하고, 또 불국토를 가져오는 것도 희박하고, 또 앞으로 연구하는 데도 큰 절망이 따르고 있습니다. 또 생명체들이 잘 살 수도 없고요.
언젠가는 우리가 멸망할 수도 있는 문제들이 마음이 너그럽지 못해서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이 너그러워야, 썰물 밀물이 같이 혼합을 해야 살 수 있는 기대를 품을 수 있고 또 지혜가 나오고 물리가 터지고, 불국토도 이룰 수 있는 거죠. 과학도 더 나아가서 연구할 수 있는 문제가 생긴다 이런 겁니다. 그래서 죽이는 것이 원력이 아니라, 서로 둘이 아니게 교류를 맺게 하고 인연을 맺어주고, 좋은 방향으로 끌고나가는 이것이 진짜 능력이다라는 얘깁니다. 원력이 있다고 해서 어느 나라를 죽이고, 어느 나라를 살리고 이러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나 자기 앉은 자리 딱 지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누구나가 자기네 집 지키지 않는 사람 여기에 한 분이나 계신 거 보셨습니까? 하루 종일 다니다가도 자기네 집으로 들어갑디다, 모두. 거기는 꼭 지키더군요. 어디 나가서 여관에 가 자도 내 집이 있다는 건 꼭 지키더군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이러한 공부, 이러한 도리를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식들을 낳고 키워도 그 애가 스스로 밝은 길을 걷도록 가르칠 때, 말로 하고 때리고 욕하고 그래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 전화통이 있고 그 애 전화통이 있는 이상, 내가 그 애 번호를 자식이라고 알고 있는 이상, 그거는 억만 년이 지난다 할지라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길을 인도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 뿌리에다가 많은 에너지를 다 넣어도 넣은 사이가 없이 스스로서 밝아서 스스로서 길을 올바르게 갈 수 있다는 얘기죠. 누가 일부러 그 손을 끌고, 욕을 하고 때리고 그래서 갑니까?
각본대로 여러분 사시죠? 여러분이 그 게임 속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깐, 어쩔 수 없이 각본대로 자기 주어진 대로 사는 거 아닙니까? 자기 주어진 대로 각본대로 돼 있는 거를 벗어나려면 그만한 고초가 없이 어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어어! 이 절은 뭐 이상해.” 그러죠? “뭘 놓으래? 사랑도 돈도 다 놓으면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미거한 소린 하지 마세요. 사랑도 돈도 다 그 속에 있는 건데 누가 하지 말라나요? 하되, 내것이 아니라 내것이다 이 소립니다. 자기 게 아니라 자기 거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똑바로 그것을 잘 아신다면 자기는 관리인으로서 시봉자로서, 자기의 시봉자로서 올바르게 함으로써, 또는 시봉자는 주인에게 ‘너는 차가 고장났으면 올바로 고쳐서 끌고다녀라!’ 이렇게 하라 이 소립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운전수가 없어도 안 되고, 차가 없어도 안 되고 기름이 없어도 안 돼요. 하나라도 없어선 안 돼. 생명이 없어도 안 되고, 분별이 없어도 안 되고, 마음내는 게 없어도 안 돼. 또 마음내는 게 없어도 안 되지만, 육신이 없어도 안 돼. 그러니 세 개 중에 내가 높다고, 어떤 게 높다고 하겠습니까? 높은 게 하나도 없어. 통틀어서 그냥 일심(一心)이야. 일심이 들고 나는데, 삼세심(三世心)이 그냥 들고 나. 삼세심이 일심이요, 일심이 삼세심이라. 과거심(過去心)도 미래심(未來心)도 현재심(現在心)도 그냥 일심이야, 통틀어서.
앞으로 우리에게 당장 시한에 닥치는 일들, 그냥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일들, 어떻게 돼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넘어갈 수 있었겠나? 박 대통령 당시에도 아슬아슬한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됐는가? ‘그렇게 되려니까 그렇게 됐지!’ 이러는 것보다도 ‘그렇게 하니깐 그렇게 됐지!’ 하는 겁니다, 모두가. 그것이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도 될 수 있는 거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거지만,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도 내 자식이지만 너무 남한테 해롭게 하고 그래서 열 번만 그렇게 끌려가 보세요. “그 새끼는 내 새끼 아냐! 가만 둬, 잡혀가거나 말거나!” 이렇게 해버립니다. 열 번을 타일렀는데도 열 번을 붙잡혀간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문제가 바로 그런 데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환경에 따라서 그렇게 주어지는 건데, 환경에 따라서 그렇게 주어지더라도 중심은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중심이 흔들리면 안 돼! 집이 비면 남한테 채여! 환경에 따라 가다보면 그만 흔들리고, 중심이 없고 집이 비게 돼요. 그럼 그 집에 남이 들어서서는 내 집이라고 하거든. 그래서 달마 대사가 “내가 잠시 어디 갔다 오니깐 내 집에 누가 들어왔더라. 그래서 나는 집이 없어서 비워놓은 딴 집에 들어가서 털보가 됐다.” 이런 말이 있죠? 그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이 그렇게 됐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이 한 가지 벌어졌으면, ‘어! 그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말을 했나?’ 그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달마 대사가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달마 대사로 몸이 바뀌었습니까? 왜 바뀌었느냐 이겁니다. 달마 대사는 재주가 그만큼 없어서 바뀐 겁니까? 남의 집을 뺏을 줄 몰라서 뺏긴 겁니까? 그러면 그만큼 공부해가지고도 집 뺏길 정도라면, 집을 뺏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면 그건 달마 대사 자격이 없죠, 하기야. 그런데 말입니다, 그걸 가르치느라고 말씀을 그렇게 해놓으셨다는 거를 생각해보십시오. 바꿀 수도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걸 들었으면 한번 음미해 보셔야 될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 마음의 도리로, 이렇게도 이끌고 저렇게도 이끌고 할 수 있는 거, 여러분이 가난해서 아주 살 수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 도리를 안다면 나물죽을 먹고도 껄껄 웃을 수 있는 그 능력, 그것이 멋있는 겁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겁니다. 고기 반찬에 잘 먹고선 그냥 흐드러지게 좋아하는 것보다 참 얼마나 멋있는 줄 아십니까? 그 맛이란.
여러분이 여기 스님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이 여러분을 먹이기 위해서 여기 갖다놓습니다. 그러면 좋고 좀더 맛있는 거는 여러분과 같이 공양을 하고, 좀더 후진 거는, 또 후진 것도 없는 사람한테는, 사실 후진 게 아닙니다. 그거는 너무나 감지덕지죠. 그래서 이것은 천차만별로 나눠주죠. ‘스님네가 심부름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미처 나는 몰랐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어렵구나! 이렇게 중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은 내가 애당초에 생각을 못했구나!’ 그것도 내가 생각한 것 아니겠는가, 어렵다는 것도. 그러나 어렵다는 거는 어렵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는 거를 생각하게 됐다. 왜? 내가 그건 어렵다고 생각할 게 없어. 나 하는 대로 그냥 꾸준히 그냥 뚜벅뚜벅 가면 되는 거니까, 저 물 흐르듯이.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아까도 얘기했듯이 내 마음이 아는 걸 우주법계에서 알고 있는데, 그게 무서워서 내가 마음대로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알든 모르든 그건 상관이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게 그게 괴로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롭지 않게 살아라 하는 얘깁니다.
남이 두렵고 남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게 괴로움을 가져오는 거고,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그렇게 하는 거죠. 어떤 때는 참, 부모도 없고 불쌍한 애들, 어떤 때는 등록금도 못 내고 그럴 때는 말이죠, 참 그런 거 누가 좋아합니까? 누가 주었다는 거 말해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남의 체면도 있지. 그럴 때 그냥 내주면서도, 그것은 내가 괴로우니까 내가 마음 편안하려고 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내 마음 편안하자고 나 사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이 편안해야 내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에 ‘중노릇하기 참 어렵구나!’ 하는 겁니다.
어떤 때에는 빚을 내서 시주를 한다고 가져온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도로 줄 때가 있죠. “야! 누가 빚 내가지고 오랬어!” 그러고 주면서 “네가 괴로우면 내가 괴로워! 난 괴롭기 싫어. 이게 이자 늘어가면 내가 죽겠어. 당신이 죽겠는 것보다 내가 죽겠어. 그러니까 난 이거 안 되겠어. 갖다 갚아. 심부름 좀 해!” 이럽니다. 내 심부름 좀 하라고 그래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절에 와서 부처님을 친견 못하고, 없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다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지 그것 좀 잘 생각해보세요.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아픈 사람이나 안 아픈 사람이나 어떤 스님네들은 “병 고치는 게 중인가?” 이러는 사람이 있고 “그건 이단이다.” 그럽니다. 이단이 아니라 일단이라도 좋다 이거야. 그거는 당장 내가 아프고 내가 귀찮으니까 하는 거지 내가 일단 되기 위해서, 정법 되기 위해서 이런 공부 한 게 아니다 이거야. 내가 아픔을 겪어봤고, 내가 내 아픔과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지, 내가 부처 되기 위해서 이 공부한 게 아니야.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야. 자연의 섭리야, 이건. 누가 뭐라 하면 어때요?
내가 겪어보니까, 이렇게 살아보니까 야, 참 아픈 것도 누가 대신 아파주지 않고요, 똥이 안 나와도 대신 똥 눠줄 사람도 없고요, 허허허. 참 피곤해도 누가 대신 피곤해줄 사람도 없고, 누가 대신 울어줄 사람 없습디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내 아픔처럼 아프고 불쌍하게, 정말 뼈아프게 아픈 때가 많아요. 그런 분들이 방에 들어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합니다.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이럽니다. 왜? 내가 아픈 거를, 내가 빨리 어떻게 어떻게 낫게 하려고 말입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얘기 듣기만 하면 됐지 뭘 내가 더 말할 게 있습니까, 괴로운데. 그 사람은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모든 게 나 괴롭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빨리 나가라고 그러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뭣이 좋아서 자꾸 얘기할 맛이 나겠습니까? ‘어떻게, 처리를 어떻게 하나.’ 하고선 좀 잠시라도 이렇게 쉬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변소 안에 가서도, 어떤 사람은 무슨 부처가 변소 안에 있느냐고 그러더군요. 예전에 두루마기를 입고 변소에 그냥 들어갔습니다, 급하니까.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두루마기를 입고 어찌 변소 안에 들어갔느냐 이겁니다. 그때에 어린 마음에도, 지금처럼 나이나 먹었으면 그냥 픽 웃고 말았을 텐데…. 그때는 그냥, 입이 근지러워서, 허허허. 그러니깐 좀 모자랐죠. “아니, 우리가 변소 안에 드나드는데 부처가 변소 안에 없다고요?” 아, 요렇게 되받았지 뭡니까? 허허허. 그리고 그 스님한테도, 아유, 모자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저도. 그때 몰라서 그랬죠. “당신에게는 반밖에는, 반절밖에는 못 하겠소.” 허허, 이랬거든요. 그 왜 그랬나? 그때는 너무 삐죽하고 빳빳하고 아주 눈에 불이 펄펄 날 때니까. 그때는 그렇게 너그럽게 벼이삭이 숙여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이겁니다.
또 무슨 표창장을 주면 “뭐 잘했다고 상장 줍니까?” 이러고, 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 뭐 스님네들이 날 뭘 주느냐 이거야. 그러곤 그 자리에서 박박 찢어버리는 그런 행태, 그러니깐 몹시 나빴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나 그런 과정 없이 어떻게 벼이삭이 첫번부터 익을 수 있느냐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저게 바로 내 모습이야!’, ‘저게 바로 나야!’ 이렇게 됩니다. 내가 만약에 그렇게 안 해보고 그렇게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그분들이 다 스승이야, 내 밑거름이고. 그러니까 그걸 받아줬지. 안 받아줬어도 거름이요, 받아줬어도 거름이에요.
어떤 한 큰스님은 너무 너그럽게 날 받아주시고 불쌍히 생각해주시고, 아주 나이 어리다고 그냥 남몰래 아껴주셨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욕을 합니다. “저 노장은 도무지, 저 하치않은 애한테 저런다.”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누룽갱이 한 조각이라도 몰래 주느라고, 세상에! 이 마음 밖에 더 무서운 게 없어요, (주먹을 쥐어 보이시면서) 마음! 아무리 거대하고 잘나도 그런 마음을 나눌 수는 없는 겁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죽으나 사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그랬던 고로 그분들은 죽지 않았다고 봅니다. 또 여러분은 앞으로 죽는다고 보십니까? 여러분도, 사람이 진화돼서 다시 모습을 바꿔가지고 나올 뿐이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오늘의 차원이 바로 내일의 차원이요, 또 내일이 오늘입니다. 오늘은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2008-02-28 오후 10: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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