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되, 경전으로 도배해도 됩니까?
답하되, 이 경계에 이르면 해 보게나
경허 선사가 연암산 천장암 인근 지장암이란 토굴에서 머물 때의 일화다. 엄동설한의 한 겨울을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며 지내기로 한 스님은 낡고 헐어 벽에 틈이 벌어지고 문창이 뒤틀린 암자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장(佛藏)에 보관되어 있던 경전을 모조리 뜯어 풀을 바른 후 문이나, 벽, 방바닥, 천장까지 남김없이 바르는 것이 아닌가.
암자로 찾아간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스님, 성스러운 경전으로 이렇게 벽과 바닥을 발라 도배 장판을 해도 됩니까?”
경허 선사는 태연히 대답했다.
“자네들도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이렇게 해보게나.”
토굴로 찾아간 제자들은 스승의 깊은 경지에 삼배를 올리고 물러나왔다는 선화(禪話)다.
경허 스님의 이러한 경지는 불상을 올라타고 불쏘시개로 쓴 단하천연 선사나, 경전을 ‘똥 닦는 휴지’라고 표현한 임제 선사의 경지와 다름이 없다. 우리가 거룩하게 생각하는 경전이나 불상, 부처나 조사라는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은 상태이다. <임제록>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逢佛殺佛 逢祖殺祖)”는 경지다. 이른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가르침은 부처와 조사라는 고정관념과 선입관, 분별심, 집착을 타파하라는 것이지 부처와 조사를 죽이거나 무시하라는 망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부처와 중생, 보리와 번뇌, 옳고 그름, 사랑하고 미워함이라는 양변(兩邊)의 분별심을 버리지 못한 중생심으로 이러한 훼불(毁佛) 행위를 한다면 그는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망설임과 후회, 두려움 없이 스스로 부처와 조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오래된 분별심부터 버리라는 것이다.
삼조승찬 대사는 <신심명> 첫 머리에서 “지극한 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요 단지 취사선택하는 것을 꺼려할 뿐이니, 미워하고 좋아함에 얽매이지 많으면 단박에 오롯이 알게 되리라(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길고 짧음, 옳고 그름 등의 세간적인 분별심은 물론이거니와 선과 악, 중생과 부처, 보리와 번뇌 등 진리를 향한 길에서도 사량분별을 잠시도 쉬지 않는다. 일체의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물들지 않은 무심(無心), 청정한 ‘본래의 마음[本來心]’, 평상심으로 사는 것은 선(禪) 수행의 골수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여기에는 간화니 묵조니 하는 수행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분별심, 차별심, 증애심(憎愛心)이 없이 무심으로 사는 생활은 평상심으로 일상생활을 지혜롭고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깨어있는 삶이자 수행이다. 이것을 언제 어디서나 생활화하면 화두를 들 필요도 없이, 어떤 좋거나 나쁜 경계가 오더라도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