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가고’ ‘안가고’의 차이
1983년, 12월. 국가보안법으로 2년형을 받아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해 겨울은 엄청 추웠다. 감방의 마실 물은 금방 얼어붙었다. 한낮의 햇볕은 그만큼 고마웠다. 낮 시간, 교도소의 너른 마당에서 해바라기 삼아 천천히 걷는데 일반수 가운데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눈에 띄었다. 도무지 남에게 해코지를 할 인상이 아닌 청년들이었다. 네다섯 명 씩 모여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며 나처럼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나를 감호하던 교도관에게 그네들의 정체를 물었다. 알고 보니 그네들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사내’라면 ‘병역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 어기면 감옥 간다. 하여 눈물을 삼키며 입영열차를 타야 한다. 나라는 어떻게든 ‘군인의 길’을 충실하게 걷도록 국민을 계몽한다. 그 옛날 머리터럭이 길다고 가위질하던 군사정부도, 왕십리역에서 애인과 이별을 슬퍼하며 입술을 포개던 입영청년에게만큼은 관대하였다. 오히려 그 애달픈 장면을 영화로 만들어 청년들의 입대를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삼년 동안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은 애인’의 전설이 이 나라 사내들 자랑거리가 되어야 했다. 사내라면 군인답게 살기를 은근히 강요한다. 굵고 짧게 살라고 한다. 가난하지만 착하게 그리고 오래 오붓한 가정을 꾸리면 추한건가? 그런 게 이 나라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민의 의무’를 거부하고 스스로 감옥행을 선택하였다. 그네들은 감옥에서도 ‘전쟁’을 전제로 총을 잡아야 하는 현실을 거부한 저희들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광주를 피로 물들인 파쇼도당을 타도하자는 외침 때문에 징역을 사는데 그네들은 전쟁 없는 세상이 곧 성경이 가르치는 길이라고 믿어 젊음을 열척의 담장 속에서 보냈다. 그네들이야말로 양심수다. 나는 민중을 착취하는 국가를 뒤엎고 새 세상을 만들자고 외치는데 그네들은 조용하게 ‘평화’를 실천하고 있었다. 야릇한 일이 아닌가? 지극하게 평화를 말하는 불교신자들은 착하게 군대에 가서 전쟁훈련을 하는데 ‘야소쟁이’는 고난을 감수하며 입영을 거부하다니….
다행이 군대 ‘끌려’가지 않아도 징역 살지 않게 생겼다. 며칠 전에 정부가 2009년부터 ‘대체복무’를 허용한다고 밝혔다. 대신 입영기간의 갑절로 사회봉사를 하게 한단다. 괘씸하니 이런 벌을 주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 이 시간 대개 ‘여호와의 증인’인 8백 명이 넘는 청년들이 입영거부로 감옥에 갇혀 있는 판에 정부의 이런 방침은 참 잘한 일이다. 전쟁훈련을 거부한다고 징역을 살게 하는게 제 정신인가? 멀쩡한 청년을 전과자로 만드는 ‘국가지침’은 진즉에 없어져야 했다. 인권유린이 따로 없다. 일본이 군사훈련하면 난리를 피면서 왜 이 나라에서는 미군과 함께 조국강토를 짓밟는 군사훈련은 열심인가?
이 나라의 해병대는 참 특이하다. 동네마다 ‘누구나 해병이 되면 나는 해병이 되지 않았다’는 시뻘건 글씨의 펼침막이 걸려 있다. 군대 가지 않으려는 청년들, 그것도 돈이나 권력이 있는 집구석의 자식들 때문에 가난한 집의 자식들이 가슴에 멍이 든다. 그런데, 그런 나라지만 해병대는 지원자가 넘친다. 재수에 삼수까지 한단다. 정말 ‘누구나’가 갈 수 없는 군대가 해병대다. 서울대학교만큼이나 들어가기 어려우니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턱없는 자긍심을 갖게 한다. 가끔 정신교육 한다면서 어린 청소년이나 기업체 임직원, 어떤 때는 아가씨들만 따로 모아서 며칠 씩 ‘뺑이’ 치는 훈련을 한다. 그래도 인기가 높다. 돈 내고 고된 훈련을 받는다. 돈 주면서 군대에 끌고 가는 ‘국민의 의무’는 싫어 하지만 해병대는 다르다.
대한민국은 징병제다. 신체 건장하고 정신 멀쩡하면 이십대 초반에 군대에 가야한다. 군대 갔다 오면 취직하는데 가산점을 준다. 대신 안가면 감옥가야 한다. 그래도 멀쩡한 사람이라면 강제로 군대에 가지 않으려 한다. 자원해서 해병대는 가는데, ‘군바리’는 안 되려고 한다. 참 웃기는 현실이다. 해병대에는 뭔가 있나 보다. 그게 뭔가를 잘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이참에 대체복무만이 아니라 국민개병제인 ‘징병제’도 뜯어 고쳐야 한다. 대한민국의 군인이라는 ‘직업’에 자긍심을 갖게 한다면 지원자는 충분할 것이다. 나는 대체복무를 넘어 모병제의 시행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