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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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꼭 내면의 나부터 알아야 합니다!
공한 데서 나오는 것 공한 데다 놔야! 이것이 화두!

마음의 결실을 이루려면…


한 해의 수확을 의미하는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풀포기 하나도 한 해 동안 피와 땀을 흘려서 맺은 결실을 대자연에 회향을 하는데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는 저 자신은 정말 한 해 동안 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자주 큰 나무들이 되어서 결실을 맺으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마음의 결실을 이룰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가야 저의 내면의 근본과 상봉을 할 수 있을까요? 가을이 깊어갈수록 제 마음이 더 허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걸어온 발자취가 없듯이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가는 것이 듣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또 보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말하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먹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만나는 것도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이 더불어 돌아가는 이치죠.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걸어왔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하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내세울 게 없어요.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몸속에 내 자생중생들이 많은 것이 다 나이기 때문에 내가 혼자 걸어온 게 없노라 하는 겁니다. 혼자 보는 것도 없고 혼자 듣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니 내세울 게 어디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외부의 모든 생활 자체도 혼자 사는 게 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이 세상만사가 다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그 자체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원칙은 영원한 것을 우리 자체가 모르기 때문에 즉, 50% 반쪽만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다 산다’ 여기에도 무척 걸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릴 게 하나도 없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일체 만물만생이, 즉 말하자면 가다가 만나고 가다가 보고 가다가 듣고 할 때마다, 이런 게 있죠. 이건 비유하는 겁니다. 밥을 지어야 할 텐데 소켓이 맞지 않으면, 거기다 끼워도 맞지 않으면 불이 들어오질 못해서 밥을 못 지어 먹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모든 내 자생중생들을 다스리면서 화(化)하게 만들어야 바로 그게 화한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항상 소켓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신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과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즉 말하자면 주장자라고 하죠. 그런데 그걸 안테나라고 해도 됩니다. 내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 놔야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불이 들어올 수가 있고, 즉 말하자면 만약에 소켓이 맞지 않는다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밥을 지어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꼭 내면의 나부터 알아야 한다.’ 하는 것은 뭐냐. 내 자생중생들을 남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악업 선업을 지은 자체, 근본의 표시입니다. 내 몸뚱이 속에 과거의 악업 선업이 다 들어 있고 또 지금 살면서 짓는 것은 미래의 선업 악업이, 미래에 올 것이 입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것은 지금 나오고 미래의 현실에 올 것은 자꾸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입력된 게 연방 나오면서 연방 미래로 또 입력이 됩니다.
그러면 과거에서 오는 업식 그 자체가 어디서 일어나느냐. 내 마음속의 그 악업 선업의 중생들의 의식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게 인연을 지은 거니까. 그래서 나오는 대로 거기다 놓으면 즉, 미래의 그 업을 지을 것도 없어지고 과거의 업 지은 것도 없어지는 까닭에 거기다, 모든 것은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 한 구멍에다가 놓아라 이런 소립니다.
그 마음의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 그 나오는 데다가 직접, 딴 데 바깥에다가 허우적거리지 말고 안에다가, 모든 것은 거기다가 놓고 맡기고 ‘너만이 이끌 수 있다. 너만이 아픈 거를 낫게 할 수 있다. 너만이 화목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깨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다.’ 하고 관(觀)하는 것입니다. 육신과 정신과 둘입니까? 둘이 아닌 까닭에 너와 나와는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그 믿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해 주시오’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이지.
그래서 이 깨달은 마음은 마음과 마음이 위에서부터 직결이 돼 있고, 아래서부터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항상 마음과 마음이 한데 찰나에 합쳤다가 찰나에 떨어지고 찰나에 합쳤다 찰나에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과 마음이 항상 둘이 아님을 뜻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법좌(法座)를 낼 수가 있고 생산을 해낼 수가 있는 까닭에 바로 진짜 부처님이 되시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할 때는 이 과거의 나와 현실의 나가 둘이 아니게 상봉이 돼야만 되지 과거의 나가 즉, 전의 조사(祖師)들은 부(父)라고 그랬습니다. 과거의 나가 바로 나의 조상이니까 ‘부’고, 현실의 나가 ‘자(子)’가 됩니다. 그래서 부와 자가 둘이 아니게 상봉할 때, 깨달을 때에 비로소 그 둘이 아닌 도리의 섭리를 알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상봉함으로써 마음과 마음이 전체 주장자와 주장자가 둘이 아니게끔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말로 이론으로 떨어지니까 법이 될 수가 없고 법설이 될 수가 없고 한데 떨어지는 거죠. 그 음파가 한데 떨어지니까, 통신이 될 수가 없으니까, 성자가 날 수가 없죠. 그걸 성자가 날 수 있게끔 하는 건 생산해 내는 생산처가 돼야 된다는 얘깁니다. 내 마음, 마음 자체가 생산처가 되어서 바로 생산을 해낼 수 있는 그런 법좌가 돼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큰 나무가 있으면 딱따구리가 그냥 덮어놓고 쪼죠. 쪼아서 나무가 뚫어지죠. 그렇듯이 여러분은 덮어놓고 무조건 내 큰 나무라고 해도 됩니다. 내 나무에 딱따구리가 쪼듯 그렇게 자문자답하면서 생활하면서 해 나가야 그대로 생활이 참선이며 생활선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편안해지면 바로 좌선입니다. 이 모두가 이렇게 참선을 할 때에 생활이 없는데 부처가 어딨겠습니까? 우리들이 없는데 또 부처가 어딨겠습니까? 우리들이 있으니까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으니까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갈 때 비로소 딱따구리가 쪼아서 나무가 뚫어지듯, 뚫어져서 그 나무의 속이 텅 비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 속에 들어가서 집을 삼아서 차고 앉는다 이겁니다. 거기 앉아 있으면서 또 생산을 시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우리가 깨달으면 생산을 해낼 수가 있고 깨닫지 못하면 생산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죽어가고 있어요


저의 동생이 3년 동안 암 수술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작년에는 정말 다 죽는다고 그랬는데도 살아났는데, 지금 다시 재발을 해 가지고 굉장히 고통을 받으면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병원에서도 이번에는 어렵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내야 좋겠는지요? 나이도 너무 어리고 할 일도 아직 많은데 편하게 그냥 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의 고통을 계속 느끼면서 더 살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습니다. 스님, 어떻게 마음을 내 줘야 할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난 말입니다, 죽고 사는 거 그렇게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이런 소릴 듣는다면 참 냉정하다고 할 테죠. 그러나 본래 죽는 것이 없고 사는 것이 없습니다. 텅텅 빈 데 텅텅 빈 것이 오고 갈 뿐입니다, 오고 가는 사이도 없이. 그런데 우리가 그걸 죽는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애통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죽는다고 생각이 안 들 것 같으면 그렇게 걱정이 없죠. 만약에 여러분이 아주 맨 꼭대기에, 나무 꼭대기에 동그마니 천야만야한 데 오똑하니 섰으면 거기서 벌벌 떨고 한 발짝도 떼 놓을 수 없지만, 우리가 평전에 섰다면 아주 활보할 겁니다. 마음입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사람이 그 옷을 벗고 또 새옷을 입게 되면 만날 마찬가지고 지루하지도 않건만, 사람이 옷 벗으면 옷을 벗는다고 야단입니다. 찢어진 옷이라도 그대로 입고 있어야 속이 후련한 모양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세 군데나 찢어져서 그게 너털거리고 살이 보인다면 창피스럽다고 할 겁니다. 그래서 옷을 얼른 벗어 버리겠다고 생각을 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찢어진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옷을 벗는 데 눈물을 흘리십니까?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그 부처님 도리를 알 것 같으면 옆에서 그냥 그렇게 해서, 옷을 벗는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보내 줄 것입니다.
물론 죽는다 산다 이런 것에도 착을 두지 마십시오. 살 수도 있는 거고 죽을 수도 있는 거니까. 옷을 벗을 수도 있고 입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 입은 거를 벗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벗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거는 자기의 근본에 의해서 찢어지지 않았으면 더 입을 것이고 찢어졌으면 벗을 것이니까, 그 모든 것은 자기 각자 주인공이 불성이 다 같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맡겨 놓는 것이라고 봅니다. 부처님을 믿기 이전에, 저 바깥을 믿기 이전에 참도리를 우리가 배우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부처를 진짜 믿는 것이라고 봅니다.


청정한 세계를 보았는데…


저는 시민 선방을 다니면서 10년 가까이 수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욕을 하는데, 물을 떠서 이쪽으로 끼얹고 한 번 더 이렇게 끼얹으려고 하는데 어디서 천둥벼락 치는 소리가 나는 듯하면서, 그냥 눈이 번쩍하면서 아주 청정한 세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 이것이 정말 그건가? 이게 뭐가 나인가?’ 하는데 그때 저는 거기서 저라는 형태를 보았습니다. 큰 맑은 물에 사공이 배를 젓는 그런 형태를 보면서 ‘그것이 나로구나.’ 할 때 달과 빛이 한눈에 불이 번쩍하는 것을 보고 ‘아! 이것이 그때 나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부처라는 뜻이 청정한 그 마음자리가 아닌가 하고 살고 있는데 그것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로구나.’ 하는 것도 내세울 게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심도 만심이요, 만심이 일심이니 일심도 내세울 게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깥으로 내가 어떠한 청정한 세계가 보인다 할지라도 본 바가 없고 들었다 할지라도 들은 바가 없어요. 또 나라고 한다, 내가 그렇게 했다 하는 것은 육안으로, 즉 말하자면 오관을 통해서 본 것이지, 진짜 누진에 의해서 청눈이, 진짜 온 누리를 다 볼 수 있는 그러한 천안통이 있다 할지라도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음 그 자체가 내세울 게 없다고 항상 말씀드리죠? 오신통을 내가 부릴 줄 알아야지, 오신통에 내가 말린다면 안 되니까 철저히 그걸 막았죠. 보는 것 가지고, 듣는 것 가지고, 헤아리고 냄새 맡고 이러는 거 가지고, 타심통이니 또는 숙명통이니 천안통이니 천이통이니 신족통이니 하는 것을 가지고 ‘내가 도를 통했다’ 한다든가 ‘내가 나를 봤다’ 한다든가 그러면 그것은 아주 선종들에게 누를 끼치는 일들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밥을 먹어야 자기 배가 부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오신통에 의해서 지금 여여하게 돌아가는 이 자체가 오신통이라는 이름 자체도 없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신통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자체 속에 그 눈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 맛이 거기서 스스로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들리고 보이고 한다 할지라도 감사하게 거기다 놓으십시오. 우리가 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망상을 끊어버린다든가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것은 한마음 한 그릇, 빈 그릇에 모든 것을 담아도 담음이 없이 모든 것을 한데 융합해서 감사하게 놓으십시오. 그럼으로써 아마 시큰둥하게 익어 들어간다 할지라도 제 나무에서 무르익을 것입니다. 만약에 시큰둥하게 열린 것을 열렸다고 이것이 익었는가보다 하고 모두 온통 야단들을 한다면 그것이 그냥 떨어지게 되는 이치도 있습니다. 미해집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온 게 화두예요! 색이자 즉 공이고 공이자 즉 색이니 어찌 이게 공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이게 공했다는 거는, 텅 비었다는 거는, 없다는 거는 없어서 없다는 게 아니에요. 너무 이것이 찰나찰나 화해 가면서 돌아가니까 공했다는 거죠. 그러니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 놔야죠. 이것이 화두예요. 내가 이 세상에 난 것이 태초요, 내가 이 세상에 난 것이 바로 화두라, 이 몸뚱이가! 이 몸뚱이가 화두거늘 화두에다가, 공한 데다가 또 공한 놈의 화두를 또 잡아?
예전에 석존 시대에는 화두를 따로 주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따로 모셔 놓지도 않았고요. 선방을 따로 해 놓고 따로 그렇게 앉아 있는 시간을 정해 놓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앉고 싶으면 앉고 서고 싶으면 서는 거죠. 숨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그냥 참선이거늘 어찌, 앉았다가 일어나면 다 했다고 할 것이고, 앉았으면 참선한다고 할 것이고, 선방에 가서 하면 선방에 왔으니까 나는 지금 참선을 한다고 생각을 할 것이고 집에 오면 ‘난 집에 왔다고, 선방에서 지금 집에 왔어, 방금.’ 이럴 것이고. 그러니 선은 항상 조금 갔다 조금 그만두고, 조금 갔다 도로 오고, 조금 갔다 도로 오고, 이런 형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끊어져요. 그러니 항상 선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진실로 아시기 바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선원에 다닌 지는 한 일 년 정도 되는데‘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습기가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주인공 공부를 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잘 알 수가 없을 때가 많고, ‘나’라는 집착에 빠져 가지고 자꾸 이렇게 헤맵니다. 앞으로 제가 계속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가르침 주십시오.


어떠한 생각이 들든지, 안에서 일어나든지 바깥에서 닥쳐오든지 간에, 자기가 ‘좀 놔야지, 왜 놓질 못하고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 그때 호령을 치세요. ‘요놈아, 그래도 너라고 자꾸 그래? 놓지 못하고!’ 하고 자문자답하라고요. 이것이 바로 주인공이 됐다가 바로 자기가 중생이 됐다가, 둘 아니게 항상 같이 하는 거죠.
답답하게 나오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지 딴 데서는 안 나와요. 딴 데서 주고 뺏어가는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어떠한 문제가 나오더라도 ‘허허, 참, 너 감사하게 하는구나.’ 이러고 말이에요. 참 그게 재밌잖아요? 또 어떤 때는 ‘야, 그것 좀 놔라.’ 이러기도 하고 ‘너 참 슬기롭게 잘해 나가는구나.’ 하고 자기 손을 들어서 자기 궁둥일 쳐 줘요. ‘야, 너 슬기롭게 참 잘하는구나.’ 그러고.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색경을 한번 보면서 색경에 내비친 그 입에다가 입도 맞춰 주고, 또 때에 따라서는 ‘참, 네 진짜로 진실한 그 마음이 어떠한 무서운 것도 타개해 나가니 참 감사하구나! 빈손 감사해.’ 하고 뽀뽀도 해 주고…. 전체가 자기한테서 나오는 거니까 한 솥의 죽밥이에요. 즉 한 솥에 죽 끓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고가 딴 데서 와서 붙는 게 아니라 나한테서 일어나는 거니까 그냥 나한테 주걱으로 쳐 넣으면 되요. 아주 그렇게, 자꾸자꾸 그렇게 해 보세요. 그러면 거기서 물리가 터집니다, 샘솟듯. 꼭 그럴 거예요.
하여튼 여러분에게 내가 감사한 것은요, 여러분이 가난함도 무릅쓰고 한 푼이 되든 두 푼이 되든 심중 깊이 생각하고 해 주시는 것을, 여러분과 더불어 이 공부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쓰고 그러면서 ‘참, 여러분이 본래부터 부처님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구나. 그런데 사는 데 얽매여서 컴컴해졌을 뿐이지, 허, 먼지가 끼어서 그럴 뿐이지 본래 부처님이시로구나. 그러니 이렇게 한 푼이라도 새 돈으로 골라서 그렇게 하는 게 자기 부처님한테 자기가 그렇게 성실하게 산다고 표시를 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스님들이 잘못 마음을 먹고 이걸 거저 생기는 돈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얼른 쉽게 말해서 그것이 바로 쓰레기차에 쓰레기를 갖다 주는 건데요, 그런데 그거를 금으로 잘못 알고 잘못 쓰게 된다면 모두 컴컴하게 한세상을 또 살게 이 세상에 또 나올 테니 참, 그것도 잘 생각할 점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뜻을 다 헤아린 사람들은 그렇게 잘못 쓰라고 고사를 드려도 그렇게 잘못 쓰질 않아요. 벌써 그렇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요다음 생에, 아니 요다음 생이 아니라, 내일도 요다음 생이니까요. 한번 만나 보시면 내 이 심정을 잘 아실 거예요. 우리 이 옷을 벗고 요다음에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꼭 한 번은 거칠 거예요. 같이 만나 볼 거예요, 아마. 여러분이 다 부처니까.

귀신에 씌지 않으려면…


요즘 들어서 귀신의 존재나 영혼에 대한 내용을 T.V.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았지만 자꾸 보다 보니까 나한테도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귀신에 씌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람이 귀신 짓을 하기 때문에 귀신이 있는 거지 귀신 짓을 안 한다면 귀신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과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그거 한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야죠. 여러분이 바깥에서 산 기도를 간다, 또는 법당에서 부처님을 찾는다, 또는 무엇을 바깥에서 찾는다고 할 때, 관세음보살이든지 뭐든지, 이름은 상관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찾기만 하면 잘못되는 수가 많습니다.
정신질환이 생기는 원인이 어디에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세 가지 여건이 있죠. 바깥에서 찾는 데서 오는 게 있고, 유전성으로 오는 게 있고, 내 마음속에서 어떠한 쇼크를 받아서 오는 게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 처리를 하시렵니까. 바깥에서 찾는 것은 그렇게 타의에서 와 가지고 “얘, 난 아무개다.” “난 아무개야.” “난 네 할아버진데.” “난 네 아버지야.” “나는 아무 때 죽은 누구다.” 이러고 달려든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게 다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요. 이건 미쳐 죽을, 환장해 죽을 노릇이죠. 내가 여러분을 접해 가면서 수없이 겪어 왔던 일입니다.
너무 지겨워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것을 딱 뒤집어서 말입니다, “이건 바로 너니까, 너한테다 너가 장난을 하는 거니까, 이건 장난하는 그 이름들이 너를 떠보기 위해서 이름을 이거다 저거다 들고 나오는 거다. 바로 그것이 타의에서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조상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너다, 바로.” 이렇게 얘길 하죠.
다행히 그걸 들으면 즉시 낫고 그걸 안 듣고 고집을 부리면 낫지도 않죠. 타의에서 온 거는 참 빼득빼득하니 이런 말을 해 줘도 듣지도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사실은 더뎠습니다. 그 사람이 그러든지 말든지 무조건 심부름을 해 줘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무거운 것도 같이 들면 쉬울 것을, 들지 않을 때는 같이 들지 못해서 쉽지가 않더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데에 그런 걸 조심해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 이 몸 안에서 어떤 병이 났든지 가난하든지 일이 안되든지 그 모든 일체를 막론하고 내가 한생각으로 주인공을 잡았을 때, 깨달았든지 못 깨달았든지 우선적으로 자기 참주인공을 들고 나갈 때에, 거기다가 모든 거를 맡겨 놓고 나갈 때에, 가정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잘 이끌어나갈 때 이 몸뚱이에 어떠한 병이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병이라는 놈도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은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병도 잘 생각하니깐 자기가 죽겠거든. 전자에 둘로 볼 때는 ‘내가 너를 이렇게 하면 파워를 일으키지.’ 하는데, 하나로 볼 때는 ‘아하! 이거 파워를 일으키면 내 가정이 다 없어지니까, 이거 안 되겠구나!’ 하고선 파워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걸 전제하고 믿기 때문에 걱정이 하나도 없죠. 어디, 옆구리가 쑤셔? ‘어허, 신호가 왔구나. 네가 끌고 다니는 네 시자를 네가 고쳐! 고쳐 가지고 끌고 다녀! 나는 알 바 없다. 너 알아서 해라!’ 이러거든. 자기가 형성시킨 것 자기가 끌고 다녀야지 누가 끌고 다니느냐 이겁니다.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미생물에서부터 지수화풍으로 뭉쳐서 이날까지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주인이 바로 누구인 것입니까? 참자기인 것입니다. 수없는 겁을 거쳐 오면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해 가면서 나온 그 역사를 볼 때에는 정말이지 보배입니다. 실험을 통해서, 너무 아프고 좋고 즐겁고 이런 것을 수차에 걸쳐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뜻이란 말로 형용할 수도 없고 이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그러한 보배인 것입니다.
그 보배가 그렇게 능동력 있게 생동력 있게 과학적으로, 지금 내가 생각하면 바깥으로 반드시 나오게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정을 안 합니다. 왜 인정을 안 합니까?
여러분이 배고프다 하는 생각을 했다면 바로 밥을 먹으면서도 그것이 과학이 아니라고요? 인정이 안 된다고요? 똥이 마려우면 얼른 가서 똥을 누면서도 인정을 안 하는 겁니다. 왜? 왜 인정을 안 합니까?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이 뜻이, 팔만사천 법문이 다, 이것은 과학이기보다 진리이지만 이름을 그렇게 지어 놓았기 때문에 지금 과학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벌써 삼천 년 전에 해 놨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렇게 좋은 법이니 너희는 너희 자신을 알라.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남을 알지 못하느니라. 병 자체뿐 아니라, 병으로 꼬집어 비유를 들어 말했지만 일체 만법이 다 거기에서 나고 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2008-02-28 오후 4: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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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