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함께 모일 큰 자리를 벌이고 抛他祖父大家
꽃가지 든 것을 바른 전법으로 삼았네 拈出花枝作正傳
피해 입은 후손들이 몹시도 가난해서 帶累兒孫貧到骨
할미의 옷 빌려 입고 할미에게 세배하네 借婆裙去拜婆年
-열재거사 (<선문염송> 5칙 ‘염화미소’)
선의 근원을 말할 때 자연 석가모니께서 마음을 전한 세 곳의 이야기, 곧 다자탑전 반분좌와 염화시중의 미소, 사라쌍수하 곽시쌍부를 일컫는다.
인류의 정신 유산 중 가장 미묘한 선은 한 송이의 연꽃과 한 번의 미소에서 탄생되었다. 삼처전심 중 오직 염화시중 미소만이 출처가 분명하지 못하나, 얼마나 낭만이 있고 멋스럽고 아름다운가는 이야기를 접해 본 사람이면 바로 직감하게 된다. 선의 멋은 선화가 정말이냐 거짓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선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수되어지면서 만들어졌다 해도 이것은 아주 정확하게 선의 정곡을 찌른 이야기다.
위의 게송 1행에서 ‘부자가 함께 모일 대연회를 베푼다’는 인위적이 아니어서 마침이 없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작이 없어서 석가모니와 가섭이 베푼 이 연회는 인류를 위한 세세연연(世世緣緣) 이어지는 연회다. 이 연회장은 천하에 눈 있는 자들이 뛰어 노는 곳이다. 현금의 정리된 단어로는 공(空), 도(道), 진리, 필드(field), 화엄법계, 양자물리학의 통일장(統一場)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연회에 한 번이라도 참석한 사람들은 이곳은 진수성찬과 가무음주가 끝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2행의 ‘연꽃을 들어 보임, 그저 연꽃을 들어 보였지. 전법은 무슨 전법, 여기 몰록 들어가야지 무얼 또 사량하는가!’ 이리하여 3행에 ‘피해 입은 후손 몹시도 가난하여’란 말은, 본래 있던 이 대연희장을 특별한 장소인양 알고 찾아 헤맨 후손들, 뼈저리게 마지막 공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몹시도 가난’이란 말은 ‘정녕 더 버릴 것이 없다’ ‘한 물건도 없다’는 말이니, 공부가 근저(根底)에 들어왔다는 의미다. 4행은 더 이상 가난해질 수 없다. 바로 가난 자체가 된 선시적 수사법상 사물에 선시의 무한실상을 지칭한 것이니, 곧 선가에서 계합이니, 노호불허회(老胡不許會) 등의 선어로 말하는 부분이다. ‘할미의 옷 빌려 입고 할미에게 세배하네(借婆裙去拜婆年)’라는 4행이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의 소식이다.
<금강경>제17 ‘구경무아분’ 경문에 대하여 야보 도천(冶父道川)은 게송으로 뜻을 밝혔는데, 위의 게송 4행과 같이 읽힌다. ‘야보송’을 분석하여 보면 자연 이 게송의 마지막 행이 드러난다.
소라고 부르면 곧 소요, 말이라 부르면 바로 말이다 喚牛卽牛 呼馬卽馬
노파의 적삼을 빌려서 노파의 문 앞에 걸어둔다 借婆杉子拜婆門
예의의 차림은 이것으로 넘친다
禮數周旋已十分
대 그림자 댓돌을 빗질해도 먼지 하나일지 않는다. 竹影掃階塵不動
달은 연못을 뚫어도 수면에 흔적 하나 없다
月穿潭底水無痕
그렇다. 아무리 소를 부르고 말을 부르고 모든 이름을 부른다 해도 알맞지 않을 뿐,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곧 맞지 않다. 또 마음이다 진리다 공이다 해도, 마음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고 공이 아님이 분명하니 그냥 일물(一物)이라 해도 일물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것은 진리를 아는 것은 말할 수 있는 차원이지만 진리 당처와 만난다 할 때는 이미 주객이 분리된 이해 차원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래서 위의 게송 4행과 같이 ‘피해 입은 후손들이 몹시도 가난해서/할미의 옷 빌려 입고 할미에게 세배하네(帶累兒孫貧到骨 借婆裙去拜婆年)’로 노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수사법이야말로 선시의 모순적 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