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하는 마음으로 나를 낮추면 업 소멸
더위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9월, 서울 종로구 도심 포교당 아미타사는 아미타불교대학을 개강하며 강릉 성원사 회주 주경 스님을 초청해 법회를 열었다. 산 속에 있다 오랜만에 도심으로 나온 스님은 서울의 답답한 공기가 몸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법문이 시작되자 스님은 불자들에게 열정적으로 법어들을 토해 냈다. 20여평 남짓 비좁은 공간에 꽉 들어찬 100여 불자들이 내뿜는 숨과 체온 때문에 법당의 실내 공기는 탁하고 후덥지근했지만, 스님이 내뱉는 맑고 청아한 언어들은 불자들 마음을 서늘하고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우리 중생들은 살아가면서 입만 떼면 업(業)을 짓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업을 소멸하거나 닦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업’이란 말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도 드문데 말이지요.
자 그러면 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릴 때 뭐라 그럽니까. “나는 왜 이리 전생에 지은 업이 많은 것일까?” “업장이 얼마나 두텁길래 이리도 일이 안풀리는 것일까” 등과 같은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대체 업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이 업이라는 말의 어원이 본래 우리말이 아니거든요.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인데 이것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땅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한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바로 업(業)자를 사용하게 됐어요. 업을 가장 알기 쉽게 얘기하면 무엇이냐,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내가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업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방이 하는 일을 물을 때 뭐라고 합니까. “네 직업이 무엇이냐?” 그러지요. 이것도 결국은 현재 하는 일 즉 업을 묻는 것입니다. 내 직업은 상업이다, 농업이다, 공무원이다 그럽니다. 이것도 일종의 업이지요. 그러나 그 이전에 했던 일거수일투족 행위 자체도 업 아닌 것이 없지요.
우리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선악시비를 누가 만들어 설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누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우리 목전에 선악과 시비가 왜 나타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선악의 원인은 우리가 일으키는 한 생각에 있습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 이것이 선악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선과 악으로 갈라질까요. 악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죄가 되는 순간이요, 그 다음에 착한 생각, 어진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복이 되는 순간입니다.
아예 이 생각 자체를 끊어 버리면 죄도 없고 복도 없어요. 여기서 일어난 생각, 좋고 나쁜 생각 등 그 생각 자체를 ‘사업(思業)’이라고 합니다. 이 사업은 꺼 버리면 업이 되질 않는데, 이것을 마음속으로 결정지어 버리면 ‘작위업(作爲業)’ 즉 ‘사업’ 이라고 합니다.
또 결정지어진 생각을 우리 몸뚱이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행위업(行爲業)’ 즉 ‘사기업’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통칭해 우리가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약해 말하면 이 사바세계에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생동안 우리가 지은 업은 끝이 없지요.
사람은 의도적으로 행동한 업의 주인이고 상속자이며, 업은 그가 태어날 모태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업이 사람을 높거나 낮게, 그리고 거룩하거나 천박하게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자아란 실재하지 않지만 물질과 비물질의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운동의 저변에 잠재된 업력의 흐름 때문에 생사윤회는 끝이 없습니다.
‘고통이나 그 조건(업)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해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과 체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작업인 수행을 지속해야 합니다. 바른 노력, 마음 집중, 마음 챙김으로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되, ‘싫다, 좋다’ 하는 분별의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량·분별심이 약화되면 될 수록 욕망의 사슬도 느슨해지고 행동반경도 그만큼 자유스러워져,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화내고 욕심내고 한 이 마음의 부스러기 때문에 이 세상과 동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긍정하는 마음으로 나를 낮추고 ‘나무아미타불’을 수만 번 염송하면 마음이 움직여지고 공덕이 쌓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업장을 소멸할 수 있지요.
여러분들도 집에서 한번 염불을 해 보십시오. 돈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밑져봐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단 1초를 염불하더라도 지극정성으로 다른 생각 말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명호를 불러 보세요. 그 1초가 바로 극락입니다.
또한 1초가 다시 1초로 거듭나면 그것이 바로 염불 삼매의 경지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10만독, 20만독을 하는 것보다 지성으로 1초를 호명하는 것이 더 공덕이 클 수 있습니다. 염불은 얼마나 많이 하느냐보다 얼마나 정성을 들이며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불 수행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쉽게 일상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염불입니다. 집에서 밥 할 때나 지하철을 탈 때도 한마음으로 염불을 해 보십시오. 해와 달이 뜨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듯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면 몸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금강같이 단단해 집니다.
입으로 소리내어 칭명 염불을 하는 것도 좋은 수행법이지만 마음속으로 칭명을 하는 것도 염불 수행의 좋은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매일 아침 시간을 정해 놓고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1만번씩만 해 보십시오. 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아침 염불을 하기 위해서 저녁에 일찍 자야 할 것이고 일찍 자기 위해서는 그 전에 하루 일과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더 알차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염불 공덕도 쌓고 스스로 생활의 변화를 가져와 매일매일 살아있는 참된 불자가 될 것입니다.
글=김주일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주경 스님은 1942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태안사 청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태안사 정중선원 안거를 시작으로 30여 년간 제방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했다. 현재 청화사상 연구회 회장을 비롯해 무주불교 문화재단 설립이사장, 법무부 교화위원 등을 맡고 있다.
특히 스님은 인도, 중국, 라오스, 태국, 미얀마 등의 사미승을 초청해 스님이 만든 국제선원 무문관을 통해 한국불교와 수행법, 한국문화 등을 직접 지도하는데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