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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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진공무아의 이치 관조의식을 허공처럼 정화하라
總說 2 중생들이 선업을 일으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고득락(離苦得樂)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집착하는 마음으로 유루선업을 일으킨다면 끝내 생사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과보가 다하면 다시 악한 세계에 떨어지므로 역시 악업으로 귀결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세간의 십악(十惡)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사 유루십선이라 할지라도 이 모두는 악업을 일으키는 견사이혹(見思二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행할 수 있다면 세간십선은 당연히 실천해야겠지만 무루계정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일체 모든 선업을 간단없이 정진하고 실천해야만 한다.

다시‘자정기의(自淨其意)’라고 했는데, 이 의미를 부연한다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삼계내의 유루견사번뇌를 끝까지 쓸어내고 일체법은 그 자체가 진공무아의 이치임을 여실하게 관조해야만 한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이 문제에 대해 사구게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모습들은 범소유상(凡所有相)
그것은 모두 허망 분별로 떠오른 모습이라네 개시허망(皆是虛妄)
가령 허망의 모습 실제상 아님을 본다면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시 여래의 참모습을 볼 수 있으리 즉견여래(卽見如來)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이 이 같은 여실한 이치를 알았다면 모든 행동, 마음가짐, 사물에 있어서 집착심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된다. 이것이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의 무루의 가르침이다.〔시제불교(是諸佛敎)〕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깨달음의 세계를 알고 싶다면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
그 의식을 허공처럼 정화하라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무시이래로 번뇌의 때에 오염되었으므로 반드시 무쇠처럼 견고한 마음으로 번뇌를 쓸어 내야만 그 의식을 청정하게 정화했다고 할 수 있다.〔자정기의(自淨其意)〕
그렇다면 번뇌를 쓸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도 지관 수행법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란 무엇인가. 바로 ‘제악막작’을 말하며 ‘관’은 ‘중선봉행’이다. 모든 악업을 끊는 것은 열반 사덕(四德)가운데 번뇌를 끊음으로서 이루어지는 단덕(斷德)에 해당하고, 선업을 받들어 행한다 함은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는 지덕(智德)이며 ‘지덕’과 ‘단덕’을 병행하면 단덕인 ‘복’과 지덕인 ‘지혜’가 함께 원만해지는데, 이 둘이 끝까지 원만해지면 그를 여래(如來)라고 부른다. 이 같은 여래께 우리는 항상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이라고 찬탄하며 고개를 숙이고 귀의한다.
이상에서 열거한 ‘제악막작’등 사구게는 본 지관 법문의 총체적인 강령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미하게 연구하여 그 이치가 분명하게 드러난 뒤에 직접 실천에 옮겨야만 한다.
우리들은 반드시 악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끝내는 이종생사(二種生死)와 그 원인인 혹업(惑業)을 끊어야 하며, 끝내는 육바라밀을 실천수행하여 자리이타행을 원만하게 성취해 일체중생과 모두 함께 성불해야만 한다.
옛말에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에 오르고, 가까운 데에서 먼 곳에 도달한다” 하였다.
이처럼 악업을 버리고 선행을 닦으며, 이를 통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며, 더욱이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선악을 떠난 중도가 따로 있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 의식은 허공처럼 정화되어 마침내 성불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若夫泥洹眞法 入乃多途 論其急要 不出止觀二法
생사를 벗어나 열반에 드는 방편문이 많기는 하나 그 많은 방편가운데서 ‘지관’ 방편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요점임을 서술하고 있다.
‘니원(泥洹)’은 ‘열반’이라고도 음역한다. 그 의미를 말한다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데 열반은 생사에 대비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할 것은 중생들이 본래 보리열반이며, 원래 청정한 자체이며, 본래 불생불멸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번뇌에 오염된 중생이 되었을까. 실로 그 이유는 내 마음 진여의 이치가 자체 성질만을 고집스럽게 지키지 않고〔진여불수자성(眞如不守自性)〕최초일념이 망상으로 요동하여 오묘하게 밝은 마음의 이치를 등지고 무명번뇌가 되어 본각(本覺)을 미혹함으로써 무명번뇌에 싸인 불각(不覺)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내 마음 진여법신(眞如法身)이 육도의 세계로 생사유전하면서 우리의 진실한 성품이 태ㆍ란ㆍ습ㆍ화 사생(四生)에 침몰하였다. 이로부터 불생불멸하고 청정하기만 한 자성열반법이 생멸에 오염된 깜깜한 번뇌법이 되어 종일토록 마음이 밖으로 치구하면서 본래 없는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여래께서는 지혜의 안목으로 중생이 끝없는 생사의 고통을 간단없이 받는 모습을 관찰하시고 그들을 매우 불쌍하게 여기셨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에게 생사로부터 벗어나 불생불멸하는 열반의 이치를 깨달으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불생불멸의 열반이 바로 생멸 속에 있으므로 생멸을 떠난 밖에 따로의 열반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니원’은 바로 불생불멸하는 열반의 이치다.
부처님은 중생을 열반의 길로 인도함에 있어서 그들의 근기와 습성이 한결같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셨다. 때문에 일체수행법문을 중생의 근기 따라 설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수많은 지름길을 통해서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많은 수행길이 있다 해도 최후에 그 근원에 도달하면 그 낱낱의 수행 모두가 불생불멸인 열반의 이치를 증득하는 것으로 그 목적지를 삼게 된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하신 팔만사천 수행문 그 모두가 궁극에는 열반실상의 이치를 증득하는 데에 있다. 때문에 “수많은 수행방편문이 있지만 그 근원에 도달하면 두 갈래의 길이 없다”라고 말씀하였다.
이처럼 모든 종파의 수행이 그 이치에 있어선 지관수행을 떠나지 않고 있건만 단지 각개종파에 따라 명칭과 형식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가령 예를 들면 화엄종에선 법계관을 수행하고 보현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그 요체를 삼지만〔관사법계수보현행(觀四法界修普賢行)〕그들이 행하는 수행이 근본적으로 사종 법계관을 통해서 번뇌를 그친 자리에서 다시 걸림 없는 보현행으로 지혜관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지관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또 정토종에서 행하는 염불수행도 염불을 통해서 모든 번뇌가 쉬고 그 자리에서 관찰대상인 서방 아미타부처님이 더욱 분명하게 떠오른다는 점에서 역시 이 지관의 이치를 염불수행으로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써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지관’이야말로 모든 수행인들의 궁극의 목표인 열반과를 증득하는 가장 뛰어난 길이기에 “모든 수행이 지관이라는 두 가지 수행법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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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8 오후 3: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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