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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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징자 (칼럼니스트)
해마다 느는 자살 인구

‘세계 자살 예방의 날(9월10일)’이 있고 나라마다 고을마다 ‘자살예방협회’라는 것이 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며 최우선 가치로 존중되어야 한다’거나 ‘자살은 어떤 이유로도 미화되거나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고개를 끄덕일만한 여러 준칙도 있다.
자살이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더구나 한국은 2003년까지만 해도 세계경제협력개발기구인 OECD 가입국 가운데 10위의 자살률을 보여주더니 해마다 순위가 올라 지금은 상위 자리를 다툰다고 하니 자살문제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세계적 주목국이 된 셈이다.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IT문화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는 자살을 부추기는 사이트도 있고 이런 사이트는 자살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여기서 ‘생명존엄’ 어쩌고 하는 것은 ‘김이 빠지는’ 소리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자살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금기시돼 왔다고 알고 있다. 여기서 대부분이라 한 것은 금기시되지 않았던 문화도 있었고 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발생 전 서양에는 ‘자살학교’라는 것이 있었고 여기서는 ‘공인으로서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거나 명예의 손상, 국가적 위기에 자살’하는 것 등을 권장하기도 했다. 지난세기까지만 해도 이웃 일본에서 비슷한 명분으로 자기 배를 칼로 갈라 죽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기도 했으니 인간들의 생각은 동서양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한국역사에도 이런 종류의 자살은 금기시되지 않았다. 낙화암의 삼천궁녀도 있고, 여인들이 지녔던 은장도의 용도도 그러려니와 전쟁사에서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했을 때 굴욕보다 오히려 자살을 택한 군인들에 대한 기록도 적지 않다.
이런 저런 종교에서 더러 ‘거룩한 자살’이라 불러 온 것도 있다. 그런데 왜 자살은 어떤 이유로도 미화되거나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날 은근히 권장되기도 했던 자살에 대한 명분들이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거나 헛된 것이라는 것을 현대인들은 안다. 그러니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처럼 ‘명분 있는 자살’을 선택할 리 없다. 그런 것은 이제 아주 드물기도 할뿐더러 감동을 주지도 않는다.
대신 현대인은 개인이나 가족의 불행, 사회적응력의 부족, 욕망 충족에 대한 좌절과 절망, 배반, 비관, 우울증 등 개인의 인내력으로 견딜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살을 결행한다. 그렇다고 문제가 단순히 개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부조리와 더불어 잘못 얽힌 그물처럼 된 사회적 관계가 개인을 자살로 몰기 때문이다.
절대 가난 속에 사는 후진국 보다 잘 사는 선진국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상대적 빈곤이라든가 선진국적 부조리 탓일 것이다.
낮이 없는 겨울을 보내야 하는 나라, 그래서 우울증 환자들의 자살로 세계 자살률 통계에서 한 번도 상위를 양보해 보지 않은 나라 핀란드, 그 나라의 대표적 작가인 아르토 파실린나가 쓴 소설 ‘기발한 자살여행’을 보면 한번쯤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현대인의 유형이 모두 나온다.
파경에 이른 부부, 파산, 육체적 정신적 고통, 왕따, 노화, 여기에 그냥 살기 싫어 죽고 싶은 사람까지 수많은 이유를 가진 자살 지망생들이 버스 하나를 탈취해서 ‘죽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다 결국은 ‘왜 이 아름다운 세상의 좋은 삶을…’ 하면서 각자 흩어지는 블랙 코미디로 넘치는 이야기.
우리는 여기서 ‘생명 존엄성’ 운운하는 정색하는 자살 예방 구호 보다 더 절실한 삶의 가치와 자살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한편 정색하는 자살예방 대책들이 과연 효과가 있을 것인가 그런 의문도 든다.
2008-02-27 오후 7: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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