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 종합 > 기사보기
수월 스님(4)
철우, 어떻게 중생을 교화하리까
수월, (두팔 벌려 춤추며)여시여시 하라
철우, (춤으로 화답하며)여시여시 하겠나이다

수월(1855~1928) 스님이 묘향산 보현사에서 조실로 주석하고 있을 때의 선화이다. 당시 묘향산 금선대에서는 20대의 철우(1895~1979) 수좌가 홀로 솔잎으로 연명하며 용맹정진을 거듭, 마침내 기나긴 꿈에서 깨어났다.
철우 수좌의 견성(見性)을 한눈에 알아본 수월 스님은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 납자를 제접하라”고 명했다.
드디어 묵언을 끝내고 입을 연 철우 수좌는 “남쪽에서 어떻게 중생을 교화하리이까?” 하고 물었다.
마침, 일주문 옆 감자밭에서 밭을 매고 있던 수월 스님은 호미를 들고 두 팔을 벌린 채 휙 돌고 춤을 추며 “여시여시(如是如是: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철우 수좌가 밭으로 들어가 수월 스님의 호미를 건네받아 춤을 추며 “여시여시 하겠나이다”라고 화답했다.
수월 스님은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며 깨달음을 인가했다.
철우 수좌가 남하해 경허 스님의 두 번째 제자인 혜월 스님을 찾아가자 스님 역시, 단번에 그를 인가하고 법제자로 삼았다. 이후 철우 스님은 불과 27세의 나이에 통영 용화사 도솔암과 대구 동화사 금당, 파계사 성전암, 금강산 마하연,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 등에서 ‘소년 조실’로 불리우며 사자후를 토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인 수월과 혜월 스님처럼 직접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빨래를 하며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인 삶을 살았다. 평생 묵묵히 보림공부로 일생을 마쳤으니, 깨달음의 빛을 숨긴 도인의 삶이 두 스승과 다름없었다.
위 선문답에서 수월 스님은 철우 스님에게 견성 이후의 보림공부인 불행(佛行)수행을 당부하고 있다. 수행자가 ‘본래 부처’임을 자각했으니, 이제는 당당한 부처 아들로서 ‘부처 노릇’하며 중생을 이익 되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수월 스님이 호미를 든 행위는 평상시에 밭 갈듯이 일과 오후(悟後)수행이 둘 아닌 평상심으로 보살행을 실천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 두 팔을 벌리고 춤을 춘 것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으로 중생의 모든 고뇌와 아픔을 받아들여 동사섭(同事攝)을 행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동사섭’이란 불ㆍ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몸을 나타내되, 그들과 생업과 이익, 고락(苦樂), 화복(禍福)을 함께 하면서 진리의 길로 이끌어 들이는 보살행을 말한다. 이는 중생 속으로 들어가 소나 말처럼 헌신하는 ‘이류중행(異類中行)’, 자비의 손을 드리우며 세속의 시장거리로 들어가는 ‘입전수수(入廛垂手)’와 같은 불행수행을 의미한다.
제자를 떠나보내는 수월 스님이 “다시는 (깨달음을)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깨달음에 별달리 기특한 것이 없으며, 다만 본래 부처로서 부처행을 하고 사는 것이 ‘평상심시도’의 정수임을 강조한 것이리라. 깨달음은 마른하늘에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는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신통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평상의 생활 가운데 있다.
수월 스님이 평생 짚신을 삼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혜월 스님이 직접 땅을 개간하며 농선병행(農禪竝行)의 가풍을 보여준 것이 그러한 삶이었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8-02-27 오후 6:29:12
 
 
   
   
2024. 5.1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