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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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악업을 끊고 뭇 선을 행하라
總說 1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불자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이 사구게는 지관법문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일대불법까지 모두 해괄 하고 있기 때문에 삼장십이부경이 이 사구게에 포괄되지 않음이 없다.
이 사구게는 문장은 쉽고 간단하지만 그 의미는 끝없이 심오하다.
“모든 악업을 짓지 말라” 함은 ‘止’에 해당되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라” 함은 ‘觀’에 해당되며 “스스로 그 의식을 정화하라” 함은 ‘지관불이(止觀不二)’에 해당된다. 바로 이 도리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사구게야 말로 불법을 수행하는데 가장 절실한 요점인 것이다.

불교에는 수많은 종파가 있으나 어떤 종파의 학문을 연구하는가에 관계없이 그 핵심은 이 사구게를 근본으로 의지해서 수행해야만 불법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악업은 여전히 일어나고 뭇 선행은 올바르게 실천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총명한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 경율론 삼장을 정미하게 연구한다 해도 그것은 마치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헤아리는 것처럼 불법의 진실한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되어 끝내 불법 내에서 사견을 지닌 외도의 견해를 이룰 뿐이다.
그러나 ‘악업’이라는 두 글자는 막연하게 나쁜 짓이라고만 받아들이지 말고 반드시 그 의미를 철저하게 세분해서 규정해야만 한다.
이 세상에 악한 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그 수많은 악업을 총략적으로 요약한다면 대략 열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즉 행동으로 나타난 신업이 셋이고〔身三〕 언어로 나타난 구업이 넷이며〔口四〕 의식분별로 일어나는 의업이 셋이다.〔意三〕
신업은 살생ㆍ도적질ㆍ음행이며 구업은 이간질하는 말, 헐뜯는 말, 허망한 말, 실제에 맞지 않게 꾸미는 말이며 의업은 탐욕스러운 마음, 상대방을 증오하는 마음, 사리에 어두운 마음이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요약해서 십악업(十惡業)이라고 한다.
이 같은 악업은 자신만 괴로울 뿐 아니라 상대방까지도 고통을 받게 하므로 십악업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자타가 모두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 이를 두고 “모든 악업을 짓지 말라”고 하였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이미 일어난 악업은 소멸시키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업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만 악업의 뿌리까지가 완전히 뽑힌다는 것이다. 이 같이 행해야만 진정한 ‘제악막작(諸惡莫作)’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를 두고 불법을 올바르게 수행함이라 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제자들이 매일 기상을 하면 제일 먼저 상기시켰던 “구업을 지키고 의업을 거두며 몸으로는 범하지 말라. 이같이 수행해야만 생사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수구섭의신막범 여시행자능도세(守口攝意身莫犯 如是行者能度世)〕한 의미에 해당된다.
그러나 불법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악업을 짓지 않는 정도에 그친다면 이는 악업을 행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이 정도로는 지극히 소극적인 자리의 측면에만 머물게 되므로 불법을 수행하는 초보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악업을 짓지 않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다시 뭇 선 공덕을 적극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단지 살생을 하지 않는 데에 그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을 방생해야 하며, 보시와 청정한 범행(梵行)을 행하고 유연한 언어와 서로를 화합시키는 말과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또 탐진치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정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탐진치를 대치할 수 있는 보시ㆍ자비ㆍ지혜의 마음을 일으켜야만 한다. 즉 십악업(十惡業)을 대치하는 그 자리에서 진일보하여 십선업(十善業)을 일으켜야만 한다.
모든 악업을 짓지 않은 데에 그치고 선업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소극적인‘止’방편에만 머물게 되므로 동시에 뭇 선업을 받들어 십선업을 실천해야만 적극적인 수행이 될 것이다.
이는 소극적인 자리에서 다시 적극적인 현실참여가 일어나야만 자리이타가 병진하고 자신의 구제와 세간의 구제가 동시적이어서 지관을 동시에 수행(止觀雙運)하여 불법을 진실하고 올바르게 배우는 보살행의 초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일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을 실천하라”한 이 두 구절이야말로 말은 지극히 평이하나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옛 선사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지만 팔십이 된 늙은 노인도 막상 실천하기란 어렵다”고 가르쳤는데, 참으로 깊이 음미해야 할 법문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 어떤 악업도 털끝만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서 악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의식은 고요한 호수처럼 안정되어 다시는 뒤바뀐 망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뭇 선 공덕을 받들어 실천에 옮길 수 있다면 지혜광명이 일어나 마음은 평화롭고 몸의 기운마저 조화되어 항상 유연하게 사리의 올바름을 훌륭하게 따르게 될 것이다. 마음가짐과 행동, 이 둘 모두가 거칠거나 급한 모습이 없게 되면 이를 두고 “그 의식이 자연스럽게 정화된다”고 하였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이 두 구절의 의미는 이처럼 심오하고,‘자정기의(自淨其意)’는 본질과 현상을 철저하게 꿰뚫어 일체의 의미를 해괄하였으며 그 이치는 대ㆍ소승불교에 두루 빠짐없이 통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무엇을 두고‘자정기의’라고 할까. 우리 중생들은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하는 일마다 찰나 찰나 집착을 일으킨다.
가령 보시행을 하면 나는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 되고 상대방은 보시를 받는 대상이 되며 그 중간에 오가는 물건이 있다. 이처럼 베푸는 자, 받는 자, 중간물질이라는 삼륜(三輪)이 수레바퀴 돌 듯 하면서 그에 대한 집착이 끊이지 않으므로 주고받는 가운데서 애증과 분별과 시비를 버리지 못한다. 이는 보시행을 하면서 일으키는 또 하나의 집착이고 번뇌인데 이를 두고 ‘견사혹(見思惑)’ 즉 아집을 일으키는 번뇌라고 한다.
육도범부는 진여성공(眞如性空)의 이치를 미혹하여 허망한 분별 번뇌를 내적으로 일으킨다. 이 번뇌를 견혹(見惑)이라고 한다. ‘見’은 분별의 의미이다.
내적으로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번뇌, 즉 견혹을 일으키면 일체 역순(逆順)경계를 마주했을 때 그 대상에 있어서 다시 탐심ㆍ진심ㆍ애증심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객관대상을 탐애하는 번뇌인 사혹(思惑)에 해당된다. ‘思’는 탐애의 뜻이다.
중생들은 ‘견사혹’을 따라서 끝없는 악업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삼계생사의 원인이 되어 끝내는 그에 따른 과보를 부르게 된다. 이것이 중생들의 생사윤회인과 관계이다. 즉 미혹을 일으키면 그에 상응하는 업을 짓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삼계생사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기혹조업수과(起惑造業受果)〕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세간에서 유루번뇌로 십선(十善)을 행한다면 그 마음에 집착이 일어나 설사 선행을 간단없이 행한다 해도 그 의식은 청정하게 정화되지 않고 그 모두가 다시 유루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두 말할 나위없이 반드시 집착없는 마음으로 악업을 그치고〔지(止)〕 견사혹을 제거해야만 진정한 ‘제악막작’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다시 무루의 계정혜 삼학을 닦아 중생이 본래없는 이치를 깨닫고 아집이 끊어진 자리에서 진공(眞空)의 지혜가 나타나야만 진정‘중선봉행’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승가대 교수
http://cafe.buddhapia.com/community/song
2008-02-27 오후 6: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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