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여여하게 우리는 놓고 가고 있습니다!
어두운 길을 밝혀 주실 부처님
문
산천초목의 푸르름이 온 산하대지를 생동감 넘치게 하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만 전에 있었던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이라든지 해외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피랍되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어김없이 초파일은 다가와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어두운 저희들의 마음에 밝을 빛을 내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연등처럼 저의 마음을 밝혀서 시비하거나 간택하지 않고 부처님의 환희광명세계를 체험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할는지요?
답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도 한세상, 저렇게 살아도 한세상이라면 좀더 우리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영원 불생불멸할 수 있는 그런 각오를 하시고, 불심을 좀더 돈독하게 가지시고, 진실하게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진실한 믿음을 가질 때, 부처님 앞에 와서 진심으로 삼 배를 올릴 때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부처님 몸이 내 몸이요 바로 부처님의 그 무한의 능력이 내 능력이기도 할 터인즉, 내가 아프다면 바로 내 지극한 마음속에서 바로 의사가 나올 것이고, 바로 지극한 마음에서 가난을 물리칠 것이고, 지극한 마음속에서 유생 무생(有生無生)이 다 한마음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까 병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의 그 능력의 빛이 바로 세균의, 보이지 않는 세균의 모든 것을 뿌리칠 수 있는, 즉 말하자면 빛에 의해서 녹아 버릴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생기고, 또 녹아 버리는가 하면 피해서 그것이 다시 몸이 화(化)해서 다른 걸로 창조가 되기도 하니 죽이는 게 죽이는 게 아니고 살리는 게 살리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미물의 짐승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억겁 전년서부터 우리는 이 몸뚱이를 사람의 몸뚱이로만 가져온 게 아닙니다. 뱀의 몸뚱이나 거북의 몸뚱이나 소의 몸뚱이, 어떤 벌레의 몸뚱이, 억겁을 거쳐 오면서 이 몸뚱이 저 몸뚱이로 그 모습을 바꿔 가면서 이렇게 또 인간으로서 성립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내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한데 합쳐서 수천 년 전,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거쳐 온 거를 생각할 때에 나 아님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모두가 나입니다.
그래서 석존께서 짐승의 뼈다귀나 사람의 뼈다귀나, 여자의 뼈다귀나 남자의 뼈다귀나 어린애의 뼈다귀나 어떠한 뼈다귀를 막론하고 예전에 그 뼈 무더기 있는 데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절을 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생자부(四生慈父)이신데 거기에 절을 하나이까?” 하니까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 지혜가 없느냐. 억겁 전년서부터 그 몸뚱이가 사람의 몸뚱이로만 가져온 게 아니니라. 저 몸뚱이가 뱀의 몸뚱이다 할지라도, 거북이의 몸뚱이 뼈다귀다 할지라도 그 거북이도 어미가 있었고 자식이 있었고 형제가 있었느니라. 우리도 억겁을 거쳐 올 때 그 모습의 형제가 있었고 부모가 있었느니라. 부모도 고정되게 있지 않고 자식도 고정되게 있지 않고 형제도 고정되게 있지 않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가 짚단과 같이 한 덩어리로 이렇게 인연이 돼서 인연에 따라서, 자기 마음 쓰는 데에 따라서, 업보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한데 질서 있게, 업보를 많이 지은 사람은 많이 지은 사람들끼리 모이고 적게 지은 사람은 적게 지은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거를 모르겠걸랑은 우리 세상을 잘 보십시오. 금방에 금이 있고 넝마전에 넝마가 있고…. 또 사람들 사는 걸 보십시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로,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지게꾼은 지게꾼대로, 그 외에 한 마디 더 안 해도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질서를 이렇게 만들어 놔서 질서가 지켜졌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질서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고만 볼 게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으로서 차원대로 질서를 이루어 가지고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잘못했다고 누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억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실을 볼 때, 현실의 ‘참나’를 깨달을 때 비로소 억겁 전년서부터 그 모습을, 수많은 벌레의 모습, 짐승의 모습, 무정물의 모습을 내가 지니고 거쳐 왔다는 거를 여러분께서 잘 아실 겁니다. 그거를 아시게 된다면 아마 자기 생명만 생명으로 알고 남의 생명이라서 우습게 생각을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어느 한 생명도. 그래야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고, 다른 생명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고, 너 나 할 것 없이 겸손하게 대할 겁니다. 스님네들에게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알고 겸손해진다면 아무렇게나 “저 스님은 저렇고 저 스님은 저래.” 하고 말을 해서 싸움을 붙이거나, 또 신도들끼리도 서로 말들을 전달해서 서로 이간질을 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예를 들자면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그렇질 못해요. 여러분 마음속에 물이 있고 불이 있고 흙이 있고 바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 쓰는 대로 바람이 일고 불이 일어나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는 대로 우리가 업을 짓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묵언하라!” 예전에 선조들께서 “묵언하라! 모든 잘못된 것은 안으로 돌려라!” 했던 거죠. 아주 괴로운 일이 있으면 ‘주인공, 당신이 일체 만법을 해 나가는 거고 당신께서 나를 끌고 다니는 거고 바로 당신이 운전수며, 나는 차일 수밖에 없으니 당신께서 기름도 넣고 이 몸뚱이도 잘 지도해서 이끌어가 달라.’고 그렇게 하셨던 거죠. 그렇게 하는 마음이 갸륵하고 진실하다면 여러분도 바로 체험하게 될 겁니다.
다 놓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데…
문
자식의 문제도 남편의 문제도 가계의 문제도 다 놓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매사 것이 걱정이고 신경이 쓰입니다. 스님 말씀처럼 내 근본에 모든 것을 다 맡겨 놓고 산다면 이렇게 속을 끓이지도 않을 것이고 몸도 건강할 텐데 다 놓지를 못해서 그런지 소화도 잘 안되고 짜증도 나고 짜증이 나면 가족들에게 퍼붓게 됩니다. 스님, 다 놓고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답
여러분은 그냥 그저 찰나찰나 살면서 응얼거리면서, 노래를 하면서, 아주 설거지를 하면서 탁탁 치워 놓고 이렇게 돌아가면서도 “난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럽니다. 다 놓으면 어떻게 사느냐 이거죠, 놓고 가면서도. 돈을 한 묶음을 쥐고 가더라도 그건 놓고 가는 겁니다. 금방 쥐고 있다고 해서 고정되게 그냥 그것만 쥐고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갖다가 놓습니다. 장 속에 넣든지 은행에 갖다 넣든지 증권에 갖다 넣든지 어디다 갖다 놓든지 하여튼 갖다 놓을 거 아닙니까? 쥐고 있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다면 그것은 놓고 가는 겁니다. 관리만 했다 뿐이지 놓고 가는 겁니다. 내 몸도 놓고 가고, 다 놓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도 놓고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다 놓으면 어떡하느냐?’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한번 바꿔서 생각을 할 때 내가 음식을 먹고, 먹고 싶은 대로 이거 먹고 저거 먹고 이러면서 이것도 소화가 되고 저것도 소화가 돼야 좋지 놓을 수가 없다니, 그러면 그것이 잔뜩 고여 있으면 좋겠습니까? 소화가 되는 게 좋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소화를 시켜서 스스로 소화가 된다는 거, 먹고 싶어서 우리가 먹으면 스스로 소화가 된다는 걸 아셔야 하고, 또 소화를 시키는 것이 바로 여기 공장에서 모두, 이건 우스갯소립니다만, 위장이니 간장이니 직장이니 소장·대장·방광·이자 이런 모두가, 심장이니 하는 모두가 공장에서 회전을 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게 소화를 하고 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얘기하듯이 ‘모든 것은 한마음 주인공에 놔라!’ 이겁니다. 거기다 딱 일임을 해라 이겁니다. 어디 신호가 왔다, 아프다 그런다면 이거를 거기다 딱 맡겨 놓아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아팠거든요, 이 몸에서. 그 자리에서 아픈 거 아닙니까? 그러니 신호가 온 겁니다. “지배인, 이렇게 여기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지배인이 “아! 그럼 그 안에서 해결을 해야지, 공장장이고 뭐고 다 이거는 서로 한마음으로 돌아가면서 파업을 막아라!” 하고서는 거기 주인공에다 탁 놨단 말입니다. 주인공이라는 건 한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파업이 일어나도 그 안에서 대처를 해야 금방 건강이 되찾아지죠. 그런데 예를 들어 이 가슴이 아픈데도 여기 이 형성시킨, 여기서 회전하고 있는 공장에다 맡기질 않곤 딴 공장으로 가요. 딴 공장으로 가서, 이 마음의 도리를 서로 벽이 없이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갖다가 맡기니까 이것은 어디서 나온 줄도 모르는 병세가 많고 유전성이라든가 업보성이라든가 영계로 인해서, 인과로 인해서 나오든가 또는 몸에서 솟든가 이러한 것도 누구나가 다 이것을 알아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70%가 모자란다고 봐야죠. 70%는 이 공부를 하는 여러분이 충당을 해야 되겠다 이겁니다. 70%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100% 다 가졌지만, 우리가 외관상 부러지거나 어디 잘못되거나 이러면 딴 기술자를 들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70%를 가지고 쓰되 100%를 다 가져라. 왜? 의사의 손이 가더라도 그거는 남의 손이 아니다 이겁니다, 이 도리를 알면.
옛날에 선혜보살(善慧菩薩)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보살은 너무도 착하고 어질고, 행을 너무도 참 정확하고 밝고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아주 불쌍한 사람을 보면 불쌍한 대로 이익을 주고, 아픈 사람을 보면 간호를 해 주면서 항상 마음을 위로해 주고 내 아픔같이 생각해 줘서 건져 주시고, 또 악한 자를 보면 악한 자도 이 물컵에 물 한 방울 넣듯이 내 마음으로 안아서 항상 착한 사람 되게 이롭게 해 주고,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착한 사람도 고정되지 않고 또 악한 사람도 고정됨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악하다고 해서, 모른다고 해서, 또 바보라고 해서, 거지라고 해서 병신이라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 이겁니다. 한 찰나입니다! 그것도 돌아가는 게. 그러니 잘나고 도도하고 위대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도 한 찰나예요. 그렇기 때문에 선혜보살은 모든 것을, 인간에게 어떤 꽃 한 송이도 돌 하나도 그냥 이렇게 버려 두지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그분의 마음의 스승이 연등(燃燈)으로 화(化)하시고, 연등으로 화하셔서 나중에는 그 연등부처님으로 하여금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는 부처님을 증명해 주셨고, 그러니 오늘날까지도 그 석가모니는 살아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살아 있는 한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 없는 이름은 아마도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모든 밝음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여러분도 절에 다니시면서 “아이구,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떤데….” 이렇게 말씀하지 마시고 그러한 말이 들리걸랑 그저 그 자리에 맡기시고 ‘그거는 그런 게 아니고 우리 공부하는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해도 그것이 또 오래 갈 것도 아니니 달라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으니 그런 걸 개의치 않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그런 마음씨를 가지고 우리가 행을 할 수 있다면 앞으로 정말 여러분은 진짜 부처님이 되시고 관세음이 되실 겁니다.
사대와 오온이 공했다는 말뜻
문
책을 보다 보니까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공(空)했는데 무엇을 가질 게 있고 놓을 게 있느냐?’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요? 이해하기 쉽게 일러 주십시오.
답
부처님의 이 말씀을 말만 알았지 뜻을 모를 때는 안 것 그 자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참작해서 한번 침착하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스님이 화두를 줬다 그러면 이차적으로 이 화두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들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납니다. 삼차적으로는 여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임하고서 앉으나 서나 끊이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좌선을 해도 이것을 꼭 가지고 ‘뭣고 뭣고 뭣고’ 하고 돌아갑니다. 자기가 스스로 벌써 공했기 때문에, 내가 공하고 세상이 공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마저도 공했고 내가 가질 것도 가진 것도 공해 버렸으니까, 모든 것이 가질 게 하나도 없다는 그 점은 뭐냐? 내가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질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걸 한번 침착하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내가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든 거를 나쁘다 좋다 해 왔고, 여러분이 다 움죽거리고 있고 여러분이 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단 못하고 남한테 이끌려 가는 것도 바로 자기 중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남이 준 화두, 바로 이것을 꽉 쥐고 굴리질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일 초도 머무르지 않고, 그냥 머물렀다가 돌아가고 머물렀다 돌아가고 이것이 한정 없이, 어느 한군데 고정적으로 국한된 게 없이 전부 변천해 돌아가고 부서져 버리고 상해 버리고, 또 만날 때마다 변하고 또 말할 때마다 딴 말 하게 되고 만날 때마다 딴 사람 만나서 딴 사람 생각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공했다는 얘깁니다. 갖가지로 소소영영하게 가지고 소소영영하게 하면서도 공했다는 얘깁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우리가 간다는 얘기죠. 놓고 간다는 얘깁니다.
그랬으니 항상 그릇은 비어 있다는 얘긴데, 마음으로 만들어서 지어가지고, 문도 없고 걸릴 것도 없는 것을 마음으로 지어 가지고 ‘큰스님이 이렇게 하시니까 이것이 불법이다.’ 하는 걸 쥐고서는 그거를 놓질 못하고 가기 때문에, 외려 자기 마음이 자기 문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열지 못하고 닫지 못하는 그런 이치가 허다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들을 했죠. ‘참선이라는 것은 꼭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주 제 일등으로 쳤죠. 그러면 어떤 것이 참선이냐? 참선은 행선도 참선이요 좌선도 참선이요 입선도 참선이요, 모든 행 전부가, 일거수일투족 전부가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 ‘아! 결제가 되면 한 철 선방에 가서 나야지. 앉아서 좌선을 해야 그것이 으뜸이지.’요렇게 변경이 돼 버렸단 말입니다, 마음이. 육신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지고, 마음 떨어지면 코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다 떨어질 것을 뭐가 그렇게 쓸모가 있다고 그렇게 이 육신을 가지고 매달리고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마음이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을 시켜서 놓는다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편안한 반면에 반드시 내가 생각을 하면 바로 자(子)가 되는 것이고 생각을 안 하면 부(父)가 돼서, ‘부와 자가 둘이 아니니라.’ 하는 뜻은 ‘부는 자로 가면 자가 돼 버리고, 자는 부로 오면 부가 돼 버린다’는 얘기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걸 어떻게 생략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마음을 가만히 두면 부가 되는 것이고, 즉 말하자면 부처님이다 이 소립니다. 또 마음을 내고 움죽거렸다 하면 그것이 바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법신(法身)이자 화신(化身)입니다.
내가 움죽거릴 때는 부처가 아들로 가고, 또 내가 가만히 있으면 움죽거렸던 게 바로 부로, 자부처로 온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체가 없는 거라 왔다 갔다 해도 왔다 갔다 함이 없이, 함이 없이 그냥 가고 옴이 없이 그대로, 그대로 자가 될 땐 자가 되고 부가 될 땐 부가 되고 이런단 말입니다. 그 도리를 아실 것 같으면 우리가 수많은 유생(有生)이나 무생(無生)이나 전체, 즉 말하자면 이런 게 있죠. 저 물이나 산이나 들이나 어느 곳을 막론해놓고 보이지 않는 데 영계, 유령, 유체 또는 세균이나 또 사람들 사는 마음, 천차만별로 마음 차원에 따라서 우리가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하는 겁니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 하나 척 들었다고 하니까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는데, 손가락이 아니라 우주를 든 겁니다, 전체를.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손 든 것도 방편이니 손 들 것도 없이 내가 ‘아! 이런 건 이렇게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되자 바로 주인공과 함께 하는 거죠. ‘승보(僧寶)도 그러하니라. 불(佛)과 법(法)이 둘이 아닐지언대 승보도 그러하니라. 승보는 그냥 따라가느니라.’ 이러거든요. 이 육신은 그냥 따라가는 거죠. 마음이 생기는 대로 그냥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불과 법과 승보가, 불과 법이 즉, 아비와 자식이 둘이 아니게 돌아갈 때는 승보도 그러하니라. 몸은 그냥 따라가느니라 이런 거죠.
그렇다면 참, 그 도리를 안다면 어떠한 거든지 못할 게 없고, 어떠한 거든지 주인공이 하는데 내 거라고 할 것도 없고 남의 거라고 할 것도 없을 겁니다. 모두는 내 것도 아니면서 전체 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내 것이 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일체 한생각에는 나도 건질 수 있거니와 남도 건져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의 능력이 샘솟듯 한다. 그래서 감로수가 돼서 그 감로수로서 양식을 삼는다는 얘기입니다.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은
문
이 어두운 사바세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서 삶의 의지처로 삼고 살아가는 저희들이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진정 올바르게 부처님 법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답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꼭 말을 해야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부를 해 나갈 때 학식이나 지식이나 권세나 어떠한 이름으로써 이론으로써 공부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역대에서부터, 즉 말하자면 ‘인간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왔고, 어디를 향해 지금 그대로 여여하게 걷고 있나?’ 이런 것을 우리는 지혜롭게 탐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수화풍 이 자체 내에서 우리가 지수화풍을 먹고 산다는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아서는 아니 됩니다. 일체 생명이 다 지수화풍에서 생겼고, 그 생명으로 인해 진화가 돼서 이렇게 무정물이나 또, 일체 생물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거기서 나와서 거기서 사라지고 거기서 사라졌다가 다시 뜨고 하는 이 진리, 허공에 뜬 꽃잎 한 잎이 바람이 너무 세면 이지러지고, 또 어떠한 개체가 바람을 막아 주면 이지러지지 않고 이러다가 떨어지곤 하죠.
이 모두가 뜬구름 같은 이 환상천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여러분과 더불어 이렇게 항상 한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항상 풀포기 하나 버리지 않고 같이 하고 있다는 것, 곤충 하나 버리지 않고 또는 축생 하나 버리지 않고 무정물이나 식물 하나 버리지 않고, 우리 인간의 그 내면세계의 한마음 속에 같이 항상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함께 운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같이 운행을 하고 있으나, 너 나는 분명히 있습니다. 너 나가 있긴 있는데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공(空)해서, 그 가운데 무엇이 특출하게 꼭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을 여러분이 발견을 하기 위해서 같이같이 서로서로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첫째도 죽어야 하고’ 했습니다. 일체를 놔라! 맡겨 놔라! 어디다 놓느냐? 내가 있으니까 상대가 있는 것처럼 바로 내가 있으니깐 일체가 있고 천지와도 직결돼 있으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자가발전소가 있는 거와 같은 겁니다, 밝은 자가발전소! 그래서 여러분의 자가발전소는 이쪽에서 전력을 끌어오면 발전소에서는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 하지도 않고 이쪽에서 끌어오는 대로 자동적으로 전력이 옵니다. 오지만 그 전력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여러분한테 일체의 생활이 참선이며 좌선이라고 합니다. 몸을 꿇어앉혀서 좌선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다 놓게 되면 그것이 좌선이며,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톡톡한 주관적인 내 중심이 없이 그대로 공(空)에 빠지라는 건 아닙니다. 중심이 있기 때문에 참선이라고 하고 편안한 마음도 편안치 않은 마음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지혜를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도 맡겨 놔라, 일체를. ‘일체’ 하면 여러분, 아시겠죠? 고독과 가난과 외로움, 또는 우환과 병고 같은 모든 일체 말입니다. 일체 생활을 닥치는 대로 거기 맡겨 놓고 가시라. 이것이 바로 방하착이며 이것이 죽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죽어야 한다 하는 것은 바로 무조건 이유를 붙이지 말고,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다 놓고, 내 마음에 이루어져서 참 좋다 할 때는 감사하게 놓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때는 그것도 고정됨이 없으니 ‘그것도 거기서 하고 거기서밖에는 길을 인도할 수가 없으니까.’ 하고 놓고, 이렇게 해 나가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거수일투족을 다 놨을 때에 비로소 과거의 나와, 즉 말하자면 주인공의 성품을 부(父)라고 한다면, 현재에 사는 나의 마음을 자(子)라고 한답니다. 자와 부가 한데 합쳐졌을 때에 바로 내 정통의 마음은 탄생하는 겁니다. 그거를 견성이라고 하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견성을 했어도 했단 말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린애를 방금 낳은 거와 같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애를 낳은 것을 돈오(頓悟)라고 한다면, 어른이 될 때까지 길러지는 것은 점수(漸修)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 길러져서 어른이 된다면 그거는 성불이라고 하겠죠, 어른이 됐을 때.
그런데 어른이 돼 가지고도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를 합류화시켜서 용무를, 작용함이 없이 작용할 줄 알아야만이 또 그것은 구경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 죽어야 하는데, 즉 다 죽어야 한다 이런 겁니다. 거기까지 당도할 때는 어떤 이름이 붙여지느냐 하면 돈수(頓修)가 붙여집니다. 돈오·점수, 그것이 합류화돼서 화했을 때는 바로 돈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으로써 이것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거를 우리가 제쳐 놓고 생활하는 데서 얻어라. 생활하는 데서 당신이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모든 것이 벌어졌으니 그 벌어진 생활을 하되, 모든 것이 그렇게 바람결처럼 나툰다 이런 거죠.
우리가 부처님의 그 길을 따른다면 올바르게 자력 신앙으로서, 모든 것을 놓고 참자기의 중심에 의해 이리로도 흔들리지 않고 저리로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갈 길을 똑똑하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