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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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일본 차산지
일본의 많은 차산지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지역은 교토와 시즈오카다. 교토는 역사적으로 차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는 주로 우지(宇治)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 에이사이 선사가 차씨를 가져와 묘에(明惠) 스님에게 전해주어 우지(宇治)에 심으면서 차나무가 전해졌다고 한다.
14세기 후반에 아시카가 3대 장군 요시미츠가 우지칠명원(宇治七名園)이라고 불리는 다원(茶園)을 조성했다. 다원 중심으로 만들어진 우지차의 명성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장군가문의 두터운 비호를 받으면서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하자 장군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우지차 업계가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다도(茶道)를 좋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우지차는 명성을 유지하였다.
우지에서 생산되는 우수한 품질의 갓 수확한 신선한 차는 매년 일정한 시기에 쇼군에게 진상되었다. 차를 진상하기 위해 교토와 에도를 오가던 차 운반 행렬이 있었다. 차를 운반하던 관리들은 권력을 휘둘러 마을을 지날 때 마다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들에 대한 원한이 담긴 노래까지 유행하였다. 차를 나르는 행렬이 지나갈 때는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이들은 연을 날리지 못하였으며, 모두 길 옆에 엎드려야 했다. 이러한 악명 높은 어차(御茶) 행렬은 후에 개선되기도 한다.
한편 차의 명소로 알려진 시즈오카 현은 고승 쇼이치 국사가 송나라에서 종자를 가져와 차 모종을 심은 것이 최초라고 한다. 이 때문에 쇼이치 국사는 시즈오카 현의 차 시조로 알려져 있다. 요코야마 개항 이후 차는 일본의 주요 수출품이 되어 시즈오카 현의 각지에서 많은 다원이 조성되고 이 지역 차의 존재가 서서히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메이지유신을 맞이하여 일자리를 잃은 도쿠가와 번사(番士)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 등이 다원을 개간하여 차밭을 크게 발전시켰다. 수익 증대를 위하여 제다 방법과 품종 개량에 노력을 기울인다. 다원을 운영하던 사람들은 품종을 개량하여 우량품종인 ‘야부기다’를 발견하였다. 이 종(種)은 일본차의 70~80%를 차지하게 된다.
이 밖에도 가고시마 현은 예부터 자생하는 차나무가 있다는 설이 있다. 사람들이 차나무 잎을 상처 치료에 이용하고, 무사들의 저택에 차나무를 울타리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가고시마 현의 차는 서서히 일본 전국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 지역은 기온이 따뜻하여 일본에서도 가장 일찍 생산되는 ‘빠른 차’가 생산된다.
전차(煎茶)를 만드는 방법에서도 변화를 가져온다. 찻잎을 따서 솥에서 덖어 돗자리에서 손발로 비벼서 햇빛에 건조시켰으나 1738년 소엔은 제다법을 개량하여 차를 손으로 비비고 불로 건조시키는 등 차를 만드는 방법을 개량한다. 차를 만드는 방법이 개량되면서 일본 녹차 기술의 기초가 된다. 점차적으로 차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차를 따는 것에서부터 만들기 까지 모든 과정이 기계화 되어갔다. 차 재배와 제다의 기계화에 몰두한 타카바야시 켄조의사는 찻잎을 찌는 기계화에 성공하였다. 종전의 수작업이었던 것이 기계화됨에 따라 차의 생산량이 증가된다. 차 생산량의 확대와 보급을 위하여 기계화에 의한 차의 제조법이 확립되었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2008-02-27 오후 3:2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