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상상력으로 삶의 원리 통찰
백무산은 1973년부터 조선, 전기, 금속 노동자로 일을 하면서 시 쓰기를 한 시인이다. 그는 1984년 <민중시>에 노동자 정서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연작시 ‘지옥선’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1988)에서 “무슨 밥을 먹는가가 문제다/ 우리는 밥에 따라 나뉘었다/ 그 밥에 따라 양심이 나뉘고/ 윤리가 나뉘고/ 도덕이 나뉘고/ 또 민족이 서로 나뉘고”(‘만국의 노동자여’)라며 밥에 따라 지금까지 영호남과 인종과 종교와 남북을 다시 나누어야 한다고 외쳤다. 밥이야말로 계급적인 것이라며, “그대들은 무슨 밥을 먹는가”라며 애매한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는 현재 시에 노동계급의식이라는 당파성과 계급투쟁 정서를 온존시켜오고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노래하여 오던 그의 시에 최근 들어 불교 제재가 많이 발견된다. “자본주의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불교적 상상력을 통해 통찰하는 것이다.
폐사지의 가을
서 있는 것은 오직 돌탑 하나뿐
천지만물은 허물어진다는 걸
뱉고 나면 허물어질 말로 말해야 하고
허물어지기 전에 이미 무상함을
상을 지어 소리쳐야 했던 것은
세월의 풍상이란 건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허물고
허망을 허망으로 허물고 나서
긴 세월
돌탑 하나 남김 뜻은
허망에 머물지 말라고
마음 한 그루 남겼는가
- ‘마음 한 그루’ 전문
폐사지에 가서 남아있는 돌탑을 보고 창작 동기를 얻어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이는 이 시의 주제는 “허망에 머물지 말라”이다. 창작자는 천지만물의 무상함을 폐사지에 남아있는 돌탑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다. <반야경>에 모든 존재의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 그러니 모든 존재의 형상이 실존의 형상이 아닌 줄을 알면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시인은 “세월의 풍상이란 건 없다”라고 단언한다. 모든 존재가 원래 허망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경주 남산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머리가 없는 돌부처를 보고 서정적 충동을 일으켜 시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발상이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게 읽힌다.
머리 없는 돌부처님 바위에 앉으셨네
그 무슨 상관이냐고 처연히도 앉으셨네
놓아라 전부 내려놓아라 하셨으니
眼, 耳, 鼻, 舌, 身, 意
어느 것 하나 들고 계실까
여섯 도적을 때려잡아라 하셨으니
스스로 머리를 내려놓으셨나
그 어깨 위로 밤이면 달이 앉았다 가고
구름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고
봄밤 꽃 향기도 머물다 가고
지나가는 토끼 노루 머리도 잠시 얹히고
아침엔 새들이 앉았다 가더니
저녁엔 흰 눈이 소복이 내리고
나를 내려놓으니 나 아닌 것이 없노라는데
내 어쩌다 오가는 산길에 계신
머리 없는 부처님
그 길 지날 때면 나는 조심을 하네
내 머리가 어쩌다 저기 얹히면
몸통이 얼마나 괴로우실까
- ‘머리 없는 돌부처’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