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의 사구게는 어느 경전에 출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구게의 근거는 <능가경>권3에 ‘일자불설(一字不說)’과 <대품반야경> 권7의 ‘일자불설’ 혹은 ‘무자무설(無字無說)’ 등에 나타난다. 석가모니의 처음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초기 선종의 이슈였다. 곧 불교의 근본정신에 복귀하자는 실천불교로서 황매현 쌍봉산 일대와 강서, 호남 지방의 산사에서 일어난 대중적인 불교운동이다.
가르침 밖에 따로 전한다 (敎外別傳)
가르침 밖에 특별히 전할 것이 있는가가 문제다. 사실 별로 다르게 전할 것이 없다. 바로 이것을 전할 뿐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선을 공부하고 선시를 이해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명제다. 3조 승찬도 그의 <심신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분별하고 선택하는 마음만 꺼릴 뿐이니 단지 미워하고 좋아하는 양변의 견해만 버리면 대낮처럼 뚜렷하고 환해진다(至道無難 惟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고 노래하듯이 있는 그대로 평상심을 벗어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럼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단경>의 선화를 음미해보자.
이야기는 이렇다.
5조가 노행자에게 비밀히 의발을 전했다는 것을 듣고 진혜명은 동지 수십 명을 데리고 대유령에 이르러, 혜능을 먼저 발견하였다. 노행자는 혜명이 오는 것을 보고 의발을 돌 위에다 던지면서 말했다.
“이 옷은 믿음을 표시하는 것, 어찌 힘으로 다투겠는가. 마음대로 가져가시오.”
“제가 온 것은 법을 구하기 위한 것이오. 옷을 위한 것이 아니니 행자는 저에게 일러 주시오.”
“그럼 모든 연(緣)을 다 버리고 한 생각도 내지 마시오. 내 말하리라.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이러할 때, 어떤 것이 상좌의 본래면목인가?”(不思善 不思惡 正與 時 那箇是明上座 本來面目)
이 말을 들은 혜명은 바로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몇 차례 절하고 물었다.
“그 외에 조사께서 보이신 비밀한 뜻이 있습니까?”
“내가 이제 말한 것은 비밀이 아니다. 스스로의 본래면목을 돌이켜 비쳐보면 비밀함은 도리어 그대 자신에게 있다.”(與汝說者 卽非密也 汝若返照 密左汝邊)
“저가 비록 오래 동안 황매에 있었으나 사실은 아직도 자신의 본래면목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이제 가르침을 받으니 마치 스스로 물을 마셔 보고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육조단경> ‘오법전의’. <전등록>권4)
흔히 지식을 선가에서는 알음알이라 한다. 머리 하나만 이해되고 통달되어 아는 기술적 지식과는 달리 선적체험은 정신적 지혜와 육체적 경험, 머리와 마음을 모두 통하여 증장(增長)시킴을 의미한다.
이 선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량분별(思量分別)하지 않는 평상심 그대로가 조사들의 입각처(立脚處)다. 이것을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전할 것이 없는 것을 전하니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한다.
이 소식을 단하순이 염하였다.
선조들이 남을 위하던 방법 전혀 수긍 할 수 없구나. 看他先祖爲人 終不肯
이리 오너라, 여러분은 알겠는가?
過這邊來諸人還會
별 뜨기 전에 나선 사람 천봉우리 틈에 누었으니 星前人臥千峯室
불조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구나, 했다. 佛祖無因識得渠
(<선문염송>28칙 ‘본래면목’)
착어 : 불조는 불조니까 알지 못한다.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