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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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수행자로서 사람 몸을 잃는 것
부처님께서 어느 날 아난에게 물으셨다. “깊은 바다 속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눈먼 거북이가 있다. 눈먼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마셔야만 했다. 이 바다에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가 하나 떠다니는데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 머리를 내밀 때 그 나무판자 구멍 속으로 머리를 내밀고 숨을 쉴 수 있겠느냐?” 이에 아난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대답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이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으니 바로 중생이 잠깐이나마 사람 몸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잡아함경>에 나오는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이야기다. 부처님 말씀에 세상에는 아주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부처님의 법을 만나는 일이다. <선가귀감> 67장에서 말한다.

故 古語 亦有之曰 三途苦 未是苦 袈裟下失人身 始是苦也.

그러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지옥 아귀 축생계에서 받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니, 수행자로서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괴로움이다”라고 하였다.

삼악도는 지옥 아귀 축생계를 말한다.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나쁜 업 때문에 과보를 받기 위하여 중생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지옥에서는 언제나 뜨거운 쇳물이 펄펄 끓고 시뻘건 숯불이 활활 타오르며 날카로운 칼들이 숲과 산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인간세계 육십 겁(劫)이 지옥의 하루라고 하는데 여기서 형벌을 받는 지옥 중생들의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들은 살아생전에 자비로운 마음이 없었고 늘 성내는 마음을 품고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게 된 것이다. <지장경>에서 지옥의 고통을 설명하기를 “칼날 같은 이빨과 번갯불 같은 눈을 가진 많은 야차와 악귀들이 구리로 된 손톱으로 죄인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도 합니다. 또 어떤 야차는 커다란 삼지창 날 사이로 죄인의 몸이나 입과 코를 사정없이 찔러 대기도 합니다. 등과 배를 창끝에 꿰어 공중 높이 마음대로 이리저리 휘젓다가 뜨거운 평상 위에 내려놓기도 합니다. 또 쇠로 된 송골매는 죄인들의 눈을 쪼아 먹기도 합니다. 쇠로 된 뱀은 죄인들의 목을 칭칭 감아 조이기도 합니다. 몸 마디마디에 긴 못을 빠짐없이 박기도 합니다. 혀를 가느다랗게 쭉 뽑아서는 밭을 가는 것처럼 그 위에서 쟁기질을 하고 창자를 후벼내어 토막토막 자르기도 합니다. 구리를 녹여 그 구리물을 입안에 사정없이 붓기도 하고 뜨거운 쇠줄로 몸을 꽉 조여 묶고 만 번 죽였다 만 번 살아나게 하기도 합니다. 지은 업의 과보는 이러한데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거기에서 빠져나올 기약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아귀 세상은 귀신들이 사는 곳이다. 야차나 나찰 귀신들도 이곳에 살지만 아귀들의 숫자가 제일 많으므로 아귀도(餓鬼道)라고 부른다. 아귀라고 불리는 까닭은 속이 비어 늘 굶주리고 두려움과 겁이 많기 때문이다. 이 귀신들은 여위고 수척하여 추악하게 생겼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한다. 굶주린 아귀들은 그들의 과보가 끝나 다른 몸을 받기 전까지는 음식을 보아도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 깊은 바다 속이나 음침한 숲 속에 살면서 온갖 고통을 받고 살아가야 할 세월이 언제 다할지 모른다고 한다. 이들은 살아생전에 탐욕과 질투심이 많아 자기가 갖고 있던 재물이나 법을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했기 때문에 아귀도에 떨어져 늘 굶주린 채로 칼질이나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한다.
축생이란 이름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집에서 길러 양육시킨다는 뜻에서 얻어진 것이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나 새들을 주로 가리킨다. 짐승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해치고 힘센 짐승들이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면서 입가에 핏덩이를 물고 으르렁거린다. 또한 사람들이 짐승들을 기를 때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새끼를 빼앗기도 하며 잡아먹기도 하니 온갖 극심한 고초를 받을 수밖에 없다. 축생이 된 까닭은 살아생전에 도둑질을 하기, 남의 돈을 빌리고 갚지 않기,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온갖 수단으로 남의 공부를 방해하기 등 나쁜 행동들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경전을 여는 첫머리에 나오는 개경게(開經偈)에서는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고 하여, 깊고 깊은 미묘한 부처님의 법은 백천만겁이 되어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만나기 어려운 법을 만나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는 ‘가사’를 걸친 수행자로서, 인과를 믿지 않고 신도의 시물만 탐내어 짓게 되는 온갖 죄악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지은 삼악도의 죄악보다도 더 크고 무겁다고 한다.

故人云 今生未明心 滴水也難消 此所以袈裟下失人身也 佛子佛子 憤之激之.

옛 어른께서 이르기를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의 물이라도 그 시주 은혜를 갚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가사 입은 수행자로서 사람의 몸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여, 분발하고 분발할지어다.

<영소무벽기(英邵武壁記)>에 이르기를 “깨달음을 얻고 후학들을 잘 이끌 수 있는 데에 대장부의 뜻을 둘 일이지, 함부로 사욕을 부려 한 몸의 영달을 꾀하다가 만겁의 재앙을 만들지 말라. 삼악도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니 가사 아래서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큰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또 동산양개(洞山良价) 스님이 어떤 학인에게 “이 세상에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가장 괴롭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가사를 입은 수행자로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 이것이 가장 큰 괴로움이다”라고 하였다.
야운 스님도 <자경문(自警文)>에서 “가사를 입은 수행자로서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의 물이라도 그 시주 은혜를 갚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니, 법복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아침저녁으로 그 뜻을 마음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 알림 : 지난호(625호) 본 연재의 제목은 ‘<66> 수행자는 한 덩어리 숫돌과 같아’입니다.
2008-02-27 오전 1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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