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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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징자(칼럼니스트. 본지 논설위원)
‘민족주의’ 품격을 높여라
‘민족’ ‘민족주의’란 단어의 수난 시대다.
한국 서울의 종로에서 10년을 살면서 한국에 대한 잡지와 책을 내고 있다는 한 미국인 문명비평가가 최근 펴낸 책, <대한민국 사용 후기>에는 ‘한국에 천박한 민족주의가 넘친다’고 일갈한다.
‘사용 후기’라니? 대한민국이 무슨 일용잡화나 전자제품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탈북자에겐 도도하면서 축구시합만 있으면 한민족 수호자나 된듯하고, 편파판정이라도 있으면 해외 사이트를 마비시키고…. 독도문제만 나오면 반일시위를 하고….’ 등등을 천박한 민족주의의 본보기로 내 놓았다.
독도문제가 나오면 위정자들에게 ‘그 문제를 국제재판소로 가져가 해결하라’ 해야지 왜 손가락 자르고 일장기 불태우고 그러느냐며 한국인들에게 제법 민감한 부분까지 건드린다.
여기서 그의 불쾌한 발언에 ‘흰 눈’만을 뜰 수 없는 것은 그가 오늘의 한국 민족주의 일면을 거울에 비추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는 우리 사회에서도 제법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독일의 히틀러나 세르비아의 전 대통령 밀로셰비치 등이 ‘민족 감정’을 선동해 잠시나마 재미를 보았던 그런 민족주의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민족’이 모든 가치를 초월하는 지고 지선의 것도 아니며 그 개념 자체가 근대에 들어 형성되었을 뿐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었다. 세계화 시대에 무슨 민족? 이라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어느 작가의 ‘용감한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의 품격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품격에 따라 정해진다. 예를 들어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진정 정의로운 사람이 내 걸었다면 ‘정의’의 품격은 분명 고귀해 질 수 있었을 것인데 불행히도 지난 군사정권 가운데 하나가 내 걸었던 구호였으므로 ‘정의’의 품격이 상당히 추락한 경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민족’과 ‘민족주의’도 최근 몇 년 동안 순수성이 의심되는 정치적 구호와 선동에 시달리다 보니 그 품격이 이제 ‘천박함’으로 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누군가 우리에게 ‘한민족은 무엇이며 한민족적인 것은 또 어떤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의 내용을 ‘민족’ 또는 ‘민족성’ 우리의 ‘정체성’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동안 이용당하기 쉬운 ‘민족 감정’을 부추겨 권력 추구의 정치적 선동에 써 오고, 여기에 생각 없이 동조해 온 사람들이 있었으니 ‘민족주의’가 천박해 질 수밖에….
그러니 단어의 품격, 즉 그 단어를 쓰는 사람들의 품격을 높여야 한다.
다행이랄까 요즘 한국적인 것, 5천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선택,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체화시켜 온 원형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그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뜻과 품위도 업그레이드 될 것으로 믿는다.
풍류나 선도 무속 등 자생적인 것은 물론 밖으로 활짝 열린 창으로 받아들여 체화한 유불도 삼교, 여기에 근대에 서양 종교까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정신적으로 이처럼 평화롭게 열린 민족이 어디 그리 흔한가. 이른바 ‘한류’라는 것이 이런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며 이를 잘 발전시키면 ‘한국적인’ 그 무엇들이 차츰 세계성을 얻어 갈 수 있을 것이며 이미 얻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세계화는 이렇게 남과 나를 섞으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편협함이나 배타성 같은 부정적인 것을 찾을 수 없다. 하물며 남과 담을 쌓아 이득을 얻으려는 식의 선동이 끼어 들 자리도 없다.
천박해진 ‘민족주의’에 원래의 품격 찾아주는 일이 급하다.
2008-02-26 오후 5: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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