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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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것을 다 놔라!
자고 깨고 반복하는 이 생활이 그대로 진리이며 참선!

잠자면서도 놓치지 않으려면


제가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공부해 나가다 보니 어떻게 하면 평상시에도 마음을 놓치지 않고 잠자면서도 참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불현듯이 ‘아, 잠자면서도 내가 자는 게 아니고 주인공이 잔다고 생각하고 자면 그게 24시간 다 가동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바른 깨달음인지요?


깨달음이라는 말을 함부로 그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느꼈다 이거지, 깨달음이라는 언어는 아무 데나 함부로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잠자면서도 가동이 된다고 하는 건, 이 몸은 바로 내 마음의 수레이기 때문입니다. 끌고 다니는 차와 마찬가집니다. 차는 세워 놓고 주인은 나가서 이 일도 보고 저 일도 보듯이. 안 그렇습니까? 그렇듯이 꿈에서도 몸뚱이는 재워 놓고 자기는 나가서 막 돌아다닙니다. 그러면 꿈이 생시고 생시가 꿈이니 여러분이 마음을 가지고 차를 끌고 다니든 차를 세워 놓고 다니든 여러분이 다니는 건 똑같습니다. 몸을 끌고 왔든 몸을 세워 놓았든 당신 마음이 다니는 거지, 육체가 다니는 게 아니에요. 육체는 마음에 의해서 따라다닐 뿐입니다. 따라다니다가 마음이 쉬면 몸도 쉬죠. 그래서 저녁이 되면 ‘자는 시간이다’ 하고 자니까 자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지 않아요. 자기 몸은 잔다 할지라도 자기, 즉 말하자면 유전자라고 할까요? 하여튼 혼백은 자지 않습니다. 영혼은 자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낮에도 잔다 안 잔다 할 게 없어요. 쉬면,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마음을 냈다 하면 법신입니다, 활용. 즉 말하자면 마음을 냈다 하면 법, 능력이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활용이에요. 그러니까 언제나 불이 켜졌다 꺼졌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는다 이겁니다.
얘기 하나 할까요? 어느 나라에서는 불이 항상 켜져 있거든요.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밝았다가 컴컴했다 이러질 않고, 캄캄하지도 않고 밝지도 않아요. 전깃불은 항상 켜져 있는 상태죠. 그러니까 거기는 전기가 나갔다 들어왔다, 켜라 꺼라 이런 언어가 없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가서 “불은 껐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그 언어를 모릅니다. ‘불을 켰으면 좋겠다’ 해도 모릅니다. 그렇듯이 이 나의 영원한 자기, 근본적인 자기 실(實)은 참이란 말입니다. 자기의 근본은 켜졌다 꺼졌다 이러는 바도 없다 이 소립니다. 예를 들어 에너지가 있으면 에너지일 뿐이고 기름이면 기름일 뿐이에요. 갖다 쓰는 것은 운전수가 갖다 쓰게 되죠. 기름일 뿐이지, 기름이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쓰는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걸 쓸 뿐입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능력은, ‘부처님의 능력은’이라고 하는 것은 온 누리의 우주간 법계가 다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그 말 자체는 전부 공해서 공력이 바로 그렇게 무수하다는 얘깁니다. 쓰고 안 쓰는 거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거지 부처님의 능력이 없다 있다가 없습니다,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없고.
그러니까 밤에 자기를 재워 놓고 돌아다니는 그 나의 그림자의 또 그 마음의 그림자, 이것도 그림자고 그것도 그림자인데 이게 그림자의 또 그림자거든요. 자기가 만들어서, 모습을 만들어 가지고 밤중에 다니거든. 그런데 자기가 또 만들어 가지고 낮에도 다니거든요. 이것도 자기가 형성시킨 거니까 자기가 만든 거거든요. 진화돼서 창조를 시키는 것도 자기의 근본이 없으면 안 되죠. 만약에 지금 유전공학을 하는 데도 유전자가 없으면 그것은 물질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물질도 변화를 시킬 수 없고 만들 수도 없고, 크게 만들 수도 없고 작게 만들 수도 없어요. 근본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좋다 나쁘다 즐겁다 사랑한다 하고, 종교도 이 종교 저 종교 가지고 싸우고,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모두 붙죠. 여러분 각자 내가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그 근본으로 인해서 모든 게 생기는 겁니다. 이 진리가 이렇게 쉴 사이 없이 돌아가듯이 여러분도 자고 깨고 자고 깨고 반복하는 이 생활이 그대로 진리며 그대로 참선이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잠잘 때도 그렇게 쉬지 않고, 자지 않을 때도 쉬지 않지 않습니까. 자는 것도 참선이요 이렇게 깬 것도 참선이요 먹는 것도 참선이요 똥 누는 것도 참선이요, 모든 게 참선 아닌 게 없는 거라. 그런데 왜 참선이 끊어집니까? 끊어지는 것은 댁의 마음이 끊어졌다고 하니깐 끊어진 거지 아니, 살림살이가 그냥 끊어진 게 어디 있습니까? 세상이 끊어졌습니까, 어디? 그냥 돌아가는 거지.
그래서 여러분을 탑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탑을 만들어 놓고 탑돌이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여러분이 그걸 모르기 때문에 탑을 만들어 놓고 탑돌이를 하라고 그런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만날 탑돌이를 하고 계십니다. 이리로 왔다 저리로 갔다, 쌀 푸러 갔다 똥 누러 갔다, 그게 탑돌이 아니고 뭡니까? 그렇게 돌다가 살다가 죽죠. 죽었는데 그것이 뭘로 나오든 또 돌아서 나오니, 인간의 씨가 있기 때문에, 뿌리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이렇게 돌다 보면 항상이지, 어디 끊어지는 데가 있습니까? 이 도리를 아시란 말입니다. 이해만 하고 알기만 해서도, 이론적으로 알기만 해서도 아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는 그 자체를, 모든 것을, 일체 나쁘고 좋은 것을 다 자기 주인공에다, 공(空)에서 나온 거 공에다 놔라 하는 겁니다. 맡겨 놓고 믿어라. 지켜봐라. 그러면 홀연히 ‘참’이라는 게 거기서 흘러서, 그 생명수의 맛이라는 것은 정말 옆의 사람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천차만별로 그 맛이 이렇게도 나고 저렇게도 나고, 이거는 천차만별로 좋은 맛이 나는데 도대체 그 맛은 정말 어디다 비교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 참선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눈 하나 깜빡거리고 이렇게 도는 것도 다 참선이에요, 다! 그런데 “불경스럽게 변소에서 어떻게 부처님 생각을 합니까?” 이러거든요. 아, 자기가 변소에 있으니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아, 저 해가 똥구덩이는 안 비칩니까? 똥구덩이라고 해가 요렇게 돌아서 깨끗한 데로만 가서 해가 비추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과 똑같은 이치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삼재가 들었다는데…


저의 남편이 삼재가 들어서 집을 사도 안 되고 땅을 사도 안 되고 사업도 안 되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어느 용하다는 분이 그렇게 말을 했다는데 정말 그런 것인지요? 마음이 불안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거는 하치않은 말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가정에서든지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높은 말을 따로 하는 것보다도 생활에서 돌아가는 이런 구질구질한 말들을 타파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 생활에서 삼재가 들어서 집도 못 사고, 벌이할 운도 못 되고, 또 이사 갈 운도 안 되고 이렇게 한다면 아니, 부처님 법이 그렇게 죽으라고 하는 겁니까? 그 말을 곧이듣는 당신도 그르지만 그렇게 일러 주는 그분도 그릅니다. 그런데 그분도 모르니까 그러겠지, 알면 그럴 리가 없죠. 당신도 또 모르니까 그걸 곧이듣고 걱정을 하고 고민을 하는 거지, 알면 그거 들으러 갈 것도 없고 또 듣고 그것을 고민할 필요도 없죠. 그런데 모르기 때문에 그걸 듣고서 고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사 가려면 그냥 가는 것이 법이요, 내가 집을 살 처지가 된다면 집을 그냥 사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게 부처님 법입니다. 여러분의 법이 부처님 법이지, 그거를 부처님께서 진실하게 가르쳐 주셨지, 무슨 이사를 가면 나쁘다 좋다, 내년이 나쁘고 올해가 좋고 또, 삼재가 들었고, 삼재가 도대체 뭐 말라빠져 죽은 게 삼재입니까? 그거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겁니다. 사람들이 삼재라고 만들어 놨기 때문에, 삼재가 들면 그렇게 나쁘다는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한생각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아십니까? 어떤 분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올해 삼재가 들어서 누구든지 죽는다고 그러던데 몸이 지금 아픕니다.” 하고요. 내가 그래도 몸이 건강했는데 아, 그거 보고 와서 삼재가 들었다고 그러는 해에 얼마 안 돼서부터 병이 들어서 이렇게 아프니 이걸 어떡했으면 좋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백 일을 기도를 드리고 또 백 일을 드리고 또 백 일을 드려야만 삼재를 면한다고 했답니다. 그분이 그렇게 말을 하자 난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그분이 잘못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다고 하는 것도 모르니깐 그렇겠지.” 하고 역시 그 보살님한테 그랬습니다. 삼재가 따로 있고 삼재가 없고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렸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어느 분이 그렇게 말을 하기에 “보살님, 죽지 않으면 되고 병 앓지 않으면 돼. 그리고 이사를 가도 일요일날 식구가 다 모여서 아주 편안하게 먹을 거라도 지어 가지고 이러고 놀러 가는 것처럼 이사를 가라.” 그랬어요. 아니, 왜 날짜를 정해 놓고 그 날이 좋다고 해서 남자들도 하나도 없을 때 고생을 합니까? 내 마음의 부처가, 모든 부처가, 이 세상의 모든 일체 만생 만물이 다 내 한마음에 들어 있다면 구태여 어디 걸릴 게 있느냐. 그러니 내가 가는 날이 너무나 좋은 날이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내가 오늘 가면 좋겠다 하면 그 날이 좋은 날이다. 뭐든지 걸리지 말고 하세요. 그렇게 얘기했더니만 그 소리 듣고요, 사흘도 못 돼서 병이 나았어요. 병도 나았거니와 그 해에 얼마나 장사가 잘됐는지 말입니다, 삼재가 들어서 죽기는커녕 장사가 잘돼서 아주 고맙다고 시주를 하러 왔습디다.
그러니 그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죽이고 자기가 자기를 바로 그 속에서 빼내는 겁니다. 그러니 보살님도 그 속에서 빨리 벗어나십시오. 마음이 벗어나면 육신도 편안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허이구, 살기도 바쁘게 벌어다가 애를 쓰고 살고 있는데, 그 보람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나쁜 일도 맡기기만 하면 되는지


학생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철역에 내려서 절에 오려면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그걸 건너다 보면 신호등이 있는데요, 볼 때마다 항상 빨간 불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고 그냥 도로를 가로질러서 오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건너가면서도 ‘이것도 다 주인공이 하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듯 좋지 않은 일을 하면서 맡기기만 해도 되는지요?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고등 동물인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 상식이나 인간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나쁘고 좋은 것을 안다는 겁니다. 본래 그렇기 때문에 모르고 저지른 죄가 있다면 회개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 모르고 저지른 것이 테이프에 녹음 돼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알았다면 그것이 지금 녹음된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을 바로 지금 현재의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워라 이겁니다. 즉 말하자면 그 테이프에다 다시 녹음을 한다면 바로 그 앞서 것은 없어지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그 도로를 잘못 건너고 하는 그런 것도 자기가 저지르고 주인공에다 모든 걸 놓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하는데, 이왕 저지른 걸 어떡하느냐 이겁니다. 이왕 저지른 거라면 다시 앞으로는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왕 저지른 거라면 바로 앞으로는 저지르지 않는다고, 그 마음에서 순수하게 깨달았으면 가면서 그 녹음테이프에다 다시 녹음을 한다면 그 모든 게 없어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겨 놔라. 안되는 건 믿고 놓고, 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모르는 거는 모르니까 놓고. 그래서 모든 것을 몰락, 자기가 한 발 한 발 떼 놓는 거를 다 놔라 이랬는데, 또 잘한 것도 감사하게 놔라 이랬는데 하물며 잘 안된 거를 갖다가 놓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녹음테이프는 24시간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일 초도 못 돼서 또 녹음이 되고, 일 초도 못 돼서 녹음이 또 되고, 그러니깐 앞서 녹음된 거는 자꾸 없어지면서, 또 녹음이 되면서 없어지면서, 되면서 없어지면서,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도 그렇게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할 때 ‘아이구! 그놈의 거’ 하고 가슴에 담아두니 그렇게 해서 자기 가슴에 못이 되고 그것이 몇 해를 두고, 10년 20년이 가도록 있다는 겁니다. 그거는 자기 생각이지, 세월이 자기가 그렇게 붙들고 있는 그것대로 그렇게 가만히 있나요? 그러니깐 또 걸리는 거죠. 그러니 세월 가는 대로 그것도 놔라 이겁니다. 어차피 잘못된 거를 알면 벌써 잘해 나갈 것을 예약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거기다 놓고 그러면 그것은 없어지고 또 그게 들어오고, 앞으로 잘해 나간다면 잘해 나가는 것이 녹음이 또 돼서, 앞서의 녹음이 죄 지워져 버리고 잘하는 것이 녹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잘하는 것은 잘하는 것대로 녹음이 되고, 또 그 다음에 남이 잘못한 걸 보고 원망한다 하면 또 그놈의 잘된 녹음은 지워지고 원망하는 것이 또 녹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원망하고 이런 거, 잘못되고 잘되고 하는 것 모조리 놔 버리세요.
그리고 자기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내 마음의 근본인 그 상식을 알아야 하고, 나와 더불어 이 세상이 돌아간다는 걸 알고 모든 것을 겸손하게, 위로는 부모를 섬길 줄 알아야 하고 아래로는 자기 아래 사람들을 섬길 줄 알아야 하고, 자기 몸으로 비유한다면 바로 자기 육신을 올바로 잘 끌고 다닐 줄 알아야 하고, 자기 마음을 잘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내가 잘못해도 거기다 놓기만 하면 됩니까 한다면 그건 억지지 그거는 말이 안 되죠. 도둑질 열 번 하고도 신부한테 고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랬거든요. 신부한테 고하면 죄가 다 사해진다고 그러니까 아, 이건 잘못해 놓고 만날 고하네. 근데 그게 나는 모두 시원치 않았어요. 고하면 뭘 합니까? 찌꺼기는 연방 남아 있는 거를.
그렇게 남한테 사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나한테, 나한테서 나온 거니까 나한테다 놔 버려라 이겁니다. 그러면 벌써 나한테서 잘못된 거니까, 잘못되게 한 놈도 나니까 앞으로 내가 이렇게 잘못되지 않겠다 하는 거를 다짐하면서 또 거기다 놓는 거거든요. 그러니깐 이건 잘못될 일이 없는 거예요. 그게 정말 고해성사지, 내가 잘못한 걸 타인에게 고한다고 해서 그게 고해성사가 아닙니다. 어디서 나온 건데 어디다가 고해를 합니까? 여기서 나온 거 여기다가 반성을 하고 여기다가 놔야지. 그리고 고해하기 이전에 잘못하지 않으면 고해할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 잘들 생각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오무간지옥이란?


사람의 몸을 받아서 살다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한 차원 넘어서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차원의 세계인 오무간지옥이라는 것은 따로 정해진 장소가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마음 상태를 말씀하신 것인지요?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고만이다’ 이럽니다. ‘에이, 죽어나 버렸으면 고만이지, 이거 정말 살기가 고역스럽고 죽겠구나.’ 이럽니다. 그러나 죽어도 말입니다, 그냥 몸뚱이만 없어졌지 아주 죽지를 않기 때문에 죽어도 허탕이에요. 그 어리석게 ‘죽어야 한다.’ ‘이거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죽을 생각이 있으면 빠져나갈 생각을 하세요. 이게 일어난 것도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삼세심은 어떻게 해서 삼세심이 되느냐. 왜 삼세심이라고 했을까요?
예를 들어서 쉽게, 작년 콩씨를 올해 심었는데 올해 심은 콩씨가 또 많이 열려 가지고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그 콩씨 하나가 되남아서 내년 봄에 또 심습니다. 그러니 어저께 오늘도 오늘이요, 오늘의 오늘도 오늘이요, 내일의 오늘도 오늘이니까 이것이 삼세가 연결된 삼심이 연결되지 않으면 지속되지 못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게 삼세심이 한데 연결되기 때문에 그게 진리라고 합니다, 지속되고요.
그런데 삼세심이 공했다, 이 공한 자체의 나 주체의식 그 근본에서 보게 되면 ‘이것은 하천세계로 가고 이것은 중천세계로 가고 이건 상천세계로 간다.’ 이것은 주체의 의식 그 자체의 근본에 의해서 세 갈래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로 나가는 그 원리가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 네 마음을 그렇게 쓰면 그렇게 되고, 이렇게 쓰면 이렇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하천세계를 비유해서 봅시다. 딴 데서 보지 말고 우리 지금 현재에 보세요! ‘오간지옥에 떨어진다’ 하는 것은, 얼른 쉽게 말해서 종합된 인간의 탈을 못 쓴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화탕지옥, 그 펄펄 끓는, 즉 말하자면 ‘끓는 지옥’ 이런 문제들이 나오는데 그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건 어디서 보느냐? 우리가 소를 잡되 도끼로 잡거나 몽둥이로 잡거나, 하여튼 그렇게 잡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갖다 구워 먹든 볶아 먹든 끓여 먹든 합니다. 그러면 이 짐승들의 의식 자체는 떠나질 못합니다, 자기 육에서. 사람도 만약에 그 육에서 떠나지 못하면 그 지경이죠. 그 육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내 삶에 의해서 떠나질 못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육 안의 모든 내 생명체들이, 5억이라는 생명체들이 한데 붙어서 있다가 그게 여기에 주둔돼 있다 이겁니다. 그렇게 주둔돼 있으면 이 고기를 끓이면 끓이는 대로 이게 살생이 되는 겁니다. 왜? 거기에 붙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뜨거운 맛을 보는 것이 한 번의 맛이 아니라 거기에서 착을 떼지 못하면,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내 윤회에 돌고 돌며 뜨거운 꼴을, 화탕지옥 꼴을 수만 수억 번을 겪어야 합니다. 이거 참 자세히 말하자면 아주 복잡합니다, 이게.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거든지 미생물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우리 인간이 먹는 짐승들이 몇 종류입니까? 그러면 종류마다 그것이 한 번 맞아서 죽었으면 그뿐으로 그게 떠났으면 괜찮습니다마는, 그 아픔을 당하면서 또 아픔을 당하고 또 아픔을 당하는 겁니다. 몇몇 번씩 아픔을 당하는 거예요. 왜? 거기에서 착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고기가 고기로 보여서 못 먹는다는 소리도 나왔고,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씩 아시듯이 짐승의 종류가 수많은데 인간들이 다 그것을 끓이고 굽고 볶고 때리고 자르고 야단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지속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오간지옥이다 이 소립니다. 이게 다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나가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안의 종교가 다른데요


저는 절에 다니고 있는데 저의 며느리는 천주교엘 나가요. 그래서 며느리는 마루에다가 십자가를 걸어 놓고 있고 전 제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집안에서 다른 종교를 가지면 이게 영적인 면에서 어떠한 충돌이 있어서 혹여나 가정불화가 생기는 건 아닌지요?


나 같으면 말입니다, 며느리가 천주교를 믿든지 내가 불교를 믿든지, 그 마음으로 듣기 좋게 “야, 우리 한 가정에서 화목하게 한군데로 나가자!” 이렇게 위에서 존엄성 있게 웃으면서 말씀 한마디 하시면서, 나쁘게는 하지 마시고 그렇게 한마디 튕겨 놓고 마음으로 자기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겨 놓겠습니다.
맡겨 놓으시고, 본인이 하는 것도 경을 봐서 소상히 이걸 따지지 마시고, 경을 보되 그것을 자기가 본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 주인공에 모든 것을 놓고 함이 없이, 책이 나를 보게 하지 마시고 내가 책을 보지 마시고 그냥 보십시오. 그리고 살아나가는 생활도 당신 몸뚱이가 하는 게 아니니까 마음으로는 항상 진짜 당신한테, 공한 당신한테 공한 이치를 다 놓으세요. 맡기세요. 그리고 믿으세요. 그런다면 그 며느리도 한 번만 데리고 와서 서로 대화를 하게 되면 아주 참신한 사람이 될 겁니다. 그러니 걸리지 마세요. 사람의 마음이 걸려서 걸리는 거지 진리는 걸림이 없는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독송을 하는데


주위의 스님들께서 불경을 독송을 하면 좋다고 해서 제가 『금강경』을 아침저녁으로 몇 년째 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뜻도 모르고 독송을 해도 복덕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게 있습니다. 옛날 얘기 또 해야 되겠군요. 옛날에 어느 도량에서 학인들이 결제가 되면 한 절에 모여서 참선을 하든가 경을 읽든가 이러다가 해제가 되면 나가서 또 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가서 공부를 하다가 결제가 돼서 다들 들어왔는데 그 절의 주지 스님께서 “너희들은 무슨 공부를 하고 들어왔느냐?” 하니까 전부 무슨 경을 읽었다 무슨 경을 읽었다 하는데 한 분만 “저는 잠자고 밥 먹고 똥 싸고 있었습니다.” 하거든요. 그렇게 똥 싸고 밥 먹고 잠잤다고 하는 말에 “얘 이놈! 공부도 안 하고 그렇게 잠만 자고 똥만 싸고 그렇게 했으니 너는 부목이나 해라.” 하고 내쫓았습니다. 그래 부목을 하면서 나무를 패서 그 스님 방에 불을 때느라고 그 앞엘 자꾸 돌아다니거든요. 그러면서 노래를 불렀답니다.
벌이 어쩌다가 방에 들어가서, 그건 입산한 걸 말하는 겁니다. 어쩌다가 벌이 방에 들어가서 유리가 반사가 되는 거를 보고 그것이 문인 줄 알고 자꾸 입으로 거기를 쪼니까 고만 입이 뭉그러져 그만 떨어졌거든요. 떨어져서 몸이 떨어지니까, 그렇게 쪼다가 몸이 떨어지니까 입도 떨어지더라. 즉 말이 떨어지더라는 얘깁니다. 몸이 떨어지니깐 입도 떨어지고 입이 떨어지니깐 말이 떨어지더라는 얘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몸으로, 사량으로 책을 보고 이론으로다가 알고 그런다면 이 몸이 없어지면 그것도 없어질 거 아닙니까? 그러나 내 내면세계의 참나를, 주인공을 믿고 물러서지 않고 거기다 모든 것을 맡겨 놓을 수만 있다면, 몰락 맡겨 놓을 수 있다면 바로 그 속에서, 그 가운데서 바로 내 참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량적인 마음으로 물질을 보고 그것을 글자 풀이를 하고 소리를 내서 읽는다고만 하는 것은 진짜 금강경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경을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경을 누가 읽나?’ 그것을 찬찬히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누가 읽고 있을까?’ 하고요.
2008-02-26 오후 5: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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