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무사(武士)사회가 도래하자 중국의 문물을 배운 유학승들은 막부와 손을 잡고 수묵화와 조원(造園) 건축 외에 예술 분야에서도 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은 단순히 종교인이 아닌 문화와 기술에 밝은 지식인이며 관료였다.
선종 사원에서는 광대한 자연을 좁은 공간에 압축하는 상징적인 수법으로 새로운 양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무사의 방에 꽃꽂이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처럼 무사사회에서 선종은 사원을 중심으로 무사들을 결집하여 하나의 문화를 형성했다.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는 풍조와 다실에도 영향을 주었다.
남북조 시대 무렵의 다회(茶會)는 사치스러웠고 무사와 승려들 사이에 투차(鬪茶)가 유행했다. 차 잎의 생산지와 물을 길어온 장소를 맞추는 등의 투차 놀이는 무사들 사이에서 도박으로 발전하여 퇴폐적이 되었다. 무라타 주코(1422~1502)는 승려의 아들로 어려서 출가를 하였으나 투차에 빠져 한때 쫓겨나기까지 했다. 후에 참선을 하면서 차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깨닫고 다다미 4개 반 넓이의 다실(茶室)을 만든다. 귀족들이 병풍을 쳐놓고 열던 다회가 좁고 허름한 방에서 풍류를 만끽 할 수 있는 대중적인 문화로 개혁하는 계기가 된다.
무라타를 계승한 다케노 조오(1502~1555)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다구와 장황한 장식을 배격하고 한적한 아름다움을 차와 결합시켜 와비 차의 정신을 창시해냈다. 그의 제자 센노리규(1522~1591)가 일본의 다도를 집대성한다. 부유한 상인인 센노리규는 다다미를 2개 반 넓이로 줄인 다실과 무명 도예가의 다구(茶具)와 도기를 선호했으며 가이세키 요리도 간소화 한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궁중 다회에서 후견인으로 명성을 얻어 최고의 다인(茶人)이 된다. 하지만 그는 도요토미로부터 할복을 명령받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3년이 지난 후에 손자 센소탄이 가문을 다시 일으키게 되어 일본의 다도는 오모테 센케와 우라 센케, 무샤노코지 센케로 나누어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규정하고 다인(茶人)이라는 직책을 따로 두었다. 쇼군가문의 다도 스승은 다인들 중에 신분이 가장 높았다. 신분이 낮은 다인들은 주로 젊은 승려들로 막부에서 잡다한 일을 하였다. 다이묘들도 다인들을 초빙하여 배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중에는 소년들에게 전문적인 교육을 시켜 다인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머리를 깎아 승려로 불리었으나 정식 승려는 아니었다. 이들 중에 다도를 관리하는 책임자를 두어 봉록을 지급하였다.
이처럼 본래 취미와 기호의 영역에 속하던 다인의 신분이 직위로 제도화 되자 이들은 자연히 계급의식이 생겨 지위를 튼튼히 하기위해 특정 유파의 사가(師家) 혹은 고도(高徒)등의 자격을 따야 했다. 무사와 다이묘와 귀족들 사이에 다회가 성행하자 상인들까지 틈만 나면 다회를 열어 손님을 초대했다. 하지만 에도중기에 이르러 유학이 국학(國學)으로 크게 자리를 잡자 불교도 점점 쇠퇴하여 다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렇게 되자 다인들은 관직에서 물러나 상인과 서민들을 대상으로 다도를 교육하여 유파를 만들기 시작한다. 조용하고 작은 다실에서 차를 마시고 즐기는 모임이 이루어지고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