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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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공양이나 시주물을 독약이나 독화살처럼
원효 스님은 “베푸는데 인색하고 재물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마구니 권속이요,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아들이다[ 貪於物 是魔眷屬 慈悲布施 是法王子]”라고 하였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부처님 말씀을 널리 베풀어야 할 수행자가 시주물을 탐한다면 이는 마구니임에 틀림없다. 승복을 입고 재물을 탐하는 수행자는 공덕을 많이 닦아 놓았다 하더라도, 수많은 칼을 갈다 닳아버린 숫돌처럼 그 공덕이 다 없어질 것이니 그 뒤에 오는 과보를 어찌 할 것인가? <선가귀감> 66장에서 말한다.

故曰 修道之人 如一塊磨刀之石 張三也來磨 李四也來磨 磨來磨去 別人刀快 而自家石漸消 然 有人 更嫌他人 不來我石上磨 實爲可惜.

그러므로 말하기를 “수행자는 칼을 가는 한 덩어리 숫돌과 같다. 장 서방의 셋째 아들이 와서 칼을 갈고 이 서방의 넷째 아들이 와서 칼을 갈면 그들의 칼이야 예리하게 잘 들겠지만 숫돌은 점점 닳아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내 숫돌에 칼을 갈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장에서는 칼을 가는 한 덩어리 숫돌에 수행자를 비유하고 있다. 커다란 숫돌에 이 사람이 와서 칼을 갈고 저 사람이 와서 칼을 갈음으로써 그 사람들의 칼이야 잘 들겠지만, 반면에 숫돌 덩어리는 점점 닳아서 없어지게 될 것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는 중국 송대(宋代)의 속어이다. 중국에서 흔한 성씨들인 ‘장씨네 집안의 셋째 아들[張三]’과 ‘이씨의 집안의 넷째 아들[李四]’이란 뜻이니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장공이공(張公李公), 장삼여사(張三呂四), 갑남을녀(甲男乙女), 모갑모을(某甲某乙) 이라는 말들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공덕을 지으려고 수행자에게 공양 올리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공부 잘하는 수행자를 복전(福田) 삼아서 그에게 공양하고 시주함으로써 많은 공덕을 지을 수가 있다. 그러나 수행자가 시은에 보답할 수 있는 공부를 이루어 그들에게 많은 공덕을 회향할 수 있는 부처님의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숫돌이 닳아서 없어지듯 그동안 스스로 쌓아놓은 공부만 잃게 되어 마침내는 부처님의 세상과 멀어지게 되고 만다.
신도들이 공덕을 지으려고 공양을 올리는 것이야 아무리 많이 해도 좋은 일이지만, 공부해 놓은 것이 보잘 것 없어 더 큰 공부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수행자로서는 시은이 두터워져 마침내 그 빚에 눌리게 된다. 끝내는 도의 결실은 거두지 못하고 삼악도에 떨어져 무거운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인과법의 원리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숫돌에 갈아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처럼, 자기에게 의복이나 음식, 재물 같은 공양물을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못마땅해 하면서 출가인의 본분에 힘쓰지 않는 수행자들이 많이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산 스님은 말한다.

如此道人 平生所向 只在溫飽.

이런 수행자가 평생 바라는 것은 오로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사는 것이니라.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애욕을 떨쳐낸 사람을 우리는 수행자라 하고, 세속의 삶을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이를 일러 우리는 출가라고 한다[離心中愛 曰沙門 不戀世俗 曰出家]”
출가한 수행자란 이미 모든 애욕을 끊고 세속의 삶을 떠나 부처님처럼 맑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다. 수행자가 세간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고 좋은 옷 입고 따듯하게 사는 것에만 급급하여 부처님 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 모른다면 이는 아름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남의 복전이 되려 함이니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무거운 거북이를 등에 업고 하늘을 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커녕 자신의 업도 닦지 못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업장을 녹여 줄 수 있겠는가. 세상의 즐거움이 뒷날에는 괴로움인 줄 모르고 욕심내고 집착하여 업을 쌓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옷을 입고 번뇌를 벗어나는 지름길로 접어들어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야할 수행자가 세속의 삶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재물이나 이성(異性)에 대한 집착을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재물이나 이성을 보면 반드시 이들을 바른 생각으로 대해야 한다. 야운 스님이 이르기를 “몸을 해치는 것은 이성보다 더한 것이 없음이요, 도를 잃게 하는 근본은 재물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이다[害身之機 無過女色 喪道之本 莫及貨財]”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도 수행자가 재물과 이성을 가까이 못하도록 이르시기를 “수행자는 이성을 호랑이나 독사 보듯 해야 할 것이요, 비싼 패물은 나무나 돌처럼 여겨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재물이나 이성 때문에 세속 사람과의 인연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도를 닦는 마음은 더욱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스스로 세상의 즐거움을 버릴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이 믿고 존경하는 것이 성인과 같을 것이다. 남이 하지 못하는 어려운 수행을 해낼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존중 받는 것이 부처님과 같을 것이다. 출가한 뜻을 저버리지 않고자 하는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모든 반연부터 떨쳐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서 끝까지 실천해야 한다. 세상사람 그 누구인들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을 마음이 없겠는가?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함은 욕망 가득한 세속의 삶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의 인연을 끊고서 늘 검소한 옷차림과 간단한 살림살이로 굶주림과 배부름에 무심하다면 도는 저절로 닦아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세상이 저절로 완성되어 갈 것이다.
야운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爲他爲己雖微善 皆是輪廻生死因 願入松風蘿月下 長觀無漏祖師禪

나와 남을 위하는 일 좋다고 해도
모든 일이 알고 보면 생사의 끈들
솔바람에 밝은 달빛 벗을 삼아서
맑디맑은 조사선을 닦아 가리라.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2008-02-26 오후 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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