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 어떤 것이 혜명인가?
혜월 스님,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무심삼매(無心三昧)에서 짚신을 삼아 놓고 신골을 치는 망치 소리에 ‘이 한 물건(一物)이 무엇인가’하는 의심이 환하게 해소된 혜명(慧明: 혜월의 법명) 스님은, 그 길로 경허 선사를 찾아갔다. 경허 스님은 한눈에 뭔가를 간파하고 물음을 던졌다.
“그래 참선은 무엇 하러 하는가?”
“못에는 고기가 뛰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 지금 어디 있는가?”
“산꼭대기에 바람이 지나갑니다.”
“목전(目前)에 고명(孤明: 뚜렷이 밝은)한 이 한 물건이 무엇인고?”
이에 혜월 스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 섰다.
“어떤 것이 혜명(慧明)인가?”
“저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천성인(一千聖人)도 알지 못합니다.”
경허 선사께서는 여기에서, “옳고 옳다” 하시며, 혜명을 인가했다.
‘한 물건’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서, ‘이 뭣고?’화두의 참구 대상이다. 육조 대사가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 땅을 괴었으며, 밝기는 일월 같고 검기는 칠통(漆桶)과 같아서 항상 나의 동정(動靜)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하고 제시한 공안이다.
이 한 물건은 그 어떤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어서 부처님과 조사도 입을 뗄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달마 대사는 ‘불식(佛識: 모른다)’이라고 말했으며, 육조 스님의 인가를 받은 회양 스님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設使一物也不中)”고 했으며, 숭산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도 했다. 마찬가지로 혜명 스님은 ‘혜명의 본래면목’을 묻는 질문에, 역대 성인도 이치로는 알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황벽 스님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지혜로써 알 수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경계인 사물을 통해서 이해할 수도 없고, 또 힘써 노력한다고 다다를 수도 없는 이것”을 “모든 불ㆍ보살과 일체 꿈틀거리는 미물까지도 똑같이 지닌 대열반의 성품(大涅槃性)”, 또는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듯이 이 ‘각성(覺性)’을 깨닫는 참선은 물고기가 물을 찾고, 광화문에서 서울 찾는 것처럼 자명한 평상(平常)의 일이다. 또 각성은 주객(主客)과 자타(自他)가 사라진 경지여서 찾으면 찾을 수 없지만, 찾지 않으면 없는 곳이 없어서 산꼭대기의 바람이 지나가는 가운데도 있다. 이 ‘한 물건’은 무엇이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혜명 스님은 ‘한 물건’ 자체가 되어 언어와 생각을 떠나 경허 스님의 질문에 척척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경허 스님은 전법의 표시로 비로소 혜명에게 ‘혜월(慧月)’이란 법호와 전법게송을 지어주었다. “일체법 사무쳐 알면 자성에 또한 소유가 없는 것/ 이와 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노사나부처님 곧 보리라/ 세상의 생멸법 쉬어 생사 초월한 도리 부르짖으니/ 청산 다리 한 빗장으로써 서로 우물쭈물 하도다.”
경허 스님은 혜월 스님에게 “남방이 인연 있는 땅이니, 이 길로 남쪽으로 가도록 하라” 했다. 혜월 스님은 하직하고 곧 양산 미타암으로 가게 된다.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