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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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 선언식은 앞으로 2011년까지 추진될 여러 행사와 기념사업의 계획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지나간 천 년이라는 시간과 그 오랜 시간을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전해지고 있는 초조대장경을 생각할 때 이는 실로 위대하고 기념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아닌 마치로 톡톡 때려서 모든 걸 근본에 놔라!

부처님을 숭상해야 하는 이유


내 안에 근본이 있고 그 근본이 이 우주 전체의 근본과도 둘이 아니라면 왜 부처님을 숭상해야 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 하나요? 내 근본을 믿는 마음 하나면 될 것 같은데요.


가정에서 변소엘 가나 법당엘 가나 어디를 가든지, 딴 사찰엘 가든지 딴 기독교엘 가든지 간에 내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여여하게 가짐 가짐을 그대로 갖기를 원했고 또 부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남이 그런다고 해서 덩달아 부처님 불상을 불신하거나 또는 모른다는 사람을 갖다 업신여긴다거나, 아는 사람을 높이 본다거나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존경은 해야 합니다. 항상 겸손하고 그런 가짐 가짐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왜? 누구나가 불성이 다 똑같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여러분이 실생활이나 또는 이 현실 속에서 생활을 하시는 데 모든 문제에 대해서, 누구나 다 내가 있는 그 자리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역력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하는 그 장소에서 벌써 우주간 법계에서나 여러 부처님들이 다 아시고 계신 것이 아마 증명될 것입니다.
그래서 법당에 올라가서 예배를 올린다 할 때, 예라는 것은 우리 각자 사람마다 다 주인공이라는 그 자체에 내공이 있는 겁니다. 내공이 없다면 바로 송장이 될 것이고 분별이 없다면 목석이 될 것이고, 또 육신이 없다면 보이지 않으니 이 삼합이 바로 삼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종합돼서 우리가 한데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인간이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 마음, 내공에 모든 걸 예배 올린다 하는 건데, 어디 가나 자기가 있는 자리에 내공의 부처님은 계시겠지만 우리가 사원에, 어느 도량에 갔다 하면 벌써 법당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올리게 돼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혼자 해서 혼자 먹는 거 보셨습니까? 혼자 일해서 혼자 먹고 혼자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자기 개별적인 능력이 아니라 같이, 불성도 똑같고 같이 움죽거리고 같이 해서 같이 먹는 것입니다. 먹을 때는 각각 먹지만 하는 거는 다 같이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당에 올라가서도 예배를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당에 올라가서 예배를 올릴 때에, 예라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 내 내공의 마음이니, 내 내공과 부처님의 내공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그 위에다가 예배를 올리는 거죠. 예를 하는 거죠. 그리고 자기 몸뚱이는 바로 항복을 시키는 겁니다. 숙연하게 항상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고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자기 혼자 무엇을 조금 알았다고 해서 그것을 주장하고 내세운다면, 우리가 자기 혼자만이 그렇다고 생각을 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은 자기 지금 육신과 더불어 망가지는 법입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뜻이 그겁니다. 혼자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부처님께서도 49년 설하시며 여러분을 위해서 불태웠건만 ''''나는 그렇게 불태운 사이도 없고 말한 사이도 없고 그러니 너희들 잘 생각을 해라.'''' 하는 뜻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조금 안다고 해서 내세울 게 도대체 뭐 있습니까? 겸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조건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법도 조금도 없습니다. 예배는 예배대로 올리면서 바로 자기 주인공과 부처님의 주인공, 그 마음과 마음이 한데 합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풍기고, 온 누리를 비춰 줄 수 있는 그런 빛을 받을 수 있는 자기 자격을 갖추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만 믿고 하다가는 큰코다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내공의 그 주인공 자체가 바로 전체 부처님이 계신 자리에 예배를 올리는 겁니다. 그럼 부처님 앞에 올라가서 예배 올릴 때 말도 없고 행동도 없고 그냥 앉아 계신 그 부처님이 왜 그렇게 높고 광대무변하느냐 하는 거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은 아무렇게나 보시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말하고 행하는 것보다도 더 행을 잘하시고 말도 더 잘하시고 더 우주법계를 싸고 뒤집었다 제쳤다, 뒤집었다 제쳤다 하는 것입니다. 그 도리를 안다면 바로 여러분과 부처님의 그 내공에, 그 마음 자체와 부처님의 마음 자체와 둘이 아닌 자리에 예배를 올리는 겁니다.
여러분이 거기 가서 삼 배를 올릴 때, 예전 같으면 삼 배를 올리고 난 뒤에 뒷걸음질을 일곱 번을 치고 다시 돌아서서 돌아 나왔습니다. 그건 왜 그랬느냐? 나는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과 둘이 아닌 윗자리에다가 예를 올리고, 배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육신과 마음, 사량적인 이 마음과 육신이 거기 그저 ''''예배 올립니다'''' 하고 자기가 자기한테뿐만 아니라 삼세 부처님들, 조사들, 선지식들한테 위로는 예배를 올리고 아래로는 자기를 자기가 굴복을 시키는 것이 그것이 부처님의 도리라고, 진정한 부처님의 도리라고 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마음으로만 하지 어째서 갖다가 올려야만 하느냐. 그럼 마음으로만 먹지 밥을 왜 먹습니까? 아, 마음으로만 먹지 왜 밥을 먹어요? 마음으로만 먹어도 배부르다면 그냥 마음으로만 잡숴요. 그리고 벌이 할 것도 없고 일할 것도 없죠. 어디까지나 부처님 법을 아시는 분이라면 밥을 먹되 내가 한 그릇을 갖다 놓고 예를 올리고, 한마음 도리라는 게 무엇입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역대에 삼세의 부처님들을 다, 유생 무생의 어떠한 생명도 빠짐없이 한데 합쳐서 내 내공에 있으니까 그저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밥 한 그릇을 먹는다면 삼천대천세계에 그 공양을 다 올리고도 남음이 있는 예배가 됩니다. 집에서는 그렇게 하되 절에 오면, 벌써 법당에 올라가면 밥 한 그릇을 올리고 공양 한 그릇 올리는 것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안팎이 없이 그렇게 겸손하고 알뜰하게 해야만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법당에 와서 아무렇게나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여러분이 아무렇게나 생각한 것만치 아무렇게나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잘못 쓴다면, 향 한 개비, 초 한 자루를 꽂는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불의 심지가 바로 댁의 마음인 줄 알아야 하고, 불의 심지가 마음이면 그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 줄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몸뚱이가 불을 켜지 않으면 어떻게 따뜻한 기운이 나오며 어떻게 빛이 비칠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켜지 말고 마음으로만 켜세요, 잘 켜질 겁니다. 그러나 그걸 모르기 때문에 안팎이 없이 켜라 이 소립니다, 안팎이 없이.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가 다 됐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기가 배를 하고 예를 올리는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자기 자성불에, 포괄된 자성불에게, 우주를 덮고 있는 자성불에게 예를 하고 배는 자기 몸뚱이, 육신이 다, 사량이 하는 것입니다.

나무를 벨 때의 마음가짐


도로 공사를 할 때 땅을 파고 길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랍입니다. 요 근래에 봄이 되어서 서울 외곽의 공사를 하느라고 산의 나무를 여러 그루 베어 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일 또한 살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를 벨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요?


이게 우리가 소나 돼지나 사람이나 나무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무의 목신(木神)이라는 것도 마음이 있고 생명이 있고 다 그렇습니다. 사람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듯이. 그런데 그냥 이렇게 자르게 되면 이게 상대성으로 아픔을 느끼고 상대성으로 원수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살생이 되죠. 살인마가 되는 거죠. 남의 거 돈 안 내고 훔쳐 오면 도둑이 되는 거고요.
그런데 내가 관법(觀法)을 가르치는 것은, 즉 말하자면 공동 분담이 되는 거거든요, 이게. 즉 말하자면 이 일체 주인공에다 모두 놓는 거는 주인공이 포괄적인 주인공이기 때문에 공동 부담이 되는 거죠. 분담이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사람이 살생을 했고 어느 사람이 살생을 안 했고 이게 없어요, 공동 분담이 됐기 때문에. 그런 데다가 거기다가 놓고 하면, 그냥 주인공에다 놓고 하면 그냥 그 목신(木神)의 무명이, 나무라는 목신의 무명이 벗겨지죠. 그건 잘라서 다른 걸로 쓰고, 그 생명의 근본은 그냥 여기다 넣으면 그냥 한 찰나에 사람이 돼 버려요. 사람이 돼서 그냥 또 다시 배출이 되죠, 인도환생으로. 사람의 이 마음에다가 천만 개의 영령(英靈)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나 하나가 공(空)했는데 뭐가 있습니까? 나 하나가 공했는데. 그것도 공이에요. 그러니까 넣은 사이가 없어요. 그래서 두드러지지 않죠. 그리고 꺼내고 꺼내도 줄지도 않는 법이고요.
그러니까 살생이 되는 게 아니라 바로 무명을 벗겨 주는 일이요, 또 우리가 병원에 가서 마취를 하고 나면 다리를 잘라도 아픔을 느끼지 않죠? 그와 같이 나무를 갖다가 이 내 주인공에다 맡기고 한다면 마취한 거와 마찬가지로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아픔을 느끼지 않고 나무라는 그 자체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사람으로서 화(化)하게 되는 거죠. 나무도 몇백 년 내려오면서 사람의 그 마음과 접한 그런 나무가 있고 또 아주 단생의 나무가 있고 그런데, 모두 생명은 똑같으니까 똑같이 그렇게 해서 무명을 벗겨 주는 것이 원칙이고요.
또 그건 그것대로 나무로 쓰고요, 또 소는 소대로 고기로 약으로 쓰고요, 또 소의 무명은 벗겨 주고요. 그러면 에누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고받았으니까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그죠? 상점에 물건 사러 가서 그 돈 주고 물건 가져왔는데 도둑놈으로 몰릴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와 똑같아요. 그러니까 일거양득이 아니라 일거삼득이 되는 거죠. 그러니 모든 게 생각해 보면 아주 정의정당하고 질서적이고 도의적이고 의리적이고 빈틈이 요만큼도 없는 삶의 진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상천세계로 넘어서려면…


불교 교리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로 이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삼계를 하천, 중천, 상천으로 표현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인 중천세계에서 벗어나 상천세계로 넘어서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나가는 겁니다, 지금. 그게 화탕지옥이 따로 있고 오간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간지옥은 그 안의 지옥고를 말하는 겁니다. 그 안에 화탕지옥이고 무슨 지옥이고 무슨 지옥이고 다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중천세계는 어떠한 거냐? 이 중천세계는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거,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면 중천세계를 뜻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종류도 많지만 차원도 많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의해서 창살 없는 감옥에서 얼마나 헤매고 돕니까? 또 내 마음으로 잘못해 가지고 지금 이 교도소에 얼마나 많습니까? 또 내 마음으로 잘못해 가지고 얼마나 지금 고를 당하고 있습니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도 얼마나 고가 많습니까? 자식들이 괴롭혀서 괴롭고, 부부지간에 괴로워서 괴롭고, 부모자식지간에 괴로워서 괴롭고 여간 많지 않습니다, 종류가. 사업에 실패를 해서 괴롭고, 남이 나를 떨어뜨려서 괴롭고, 내가 남을 떨어뜨리니 괴롭고. 연방 같이 상대로 이어져 가면서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 올라가면 밑에서 치받히고 위에서는 떨어뜨리고, 이렇게 하는 이 지속된 중세계의 이 맛을 우리 지금 인간들이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두 건이 아니고, 한두 가지가 아니고 헤아릴 수 없는 이 세파에서 왜 이렇게 중두난발로 내 마음이 이렇게 변했다 저렇게 변했다,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이게 중심을 잡지 못하게끔 만들어지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이 몸체에 생명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개 각자 인연에 따라서 5억이라는 생명이 자기한테 부합이 된 겁니다, 이게. 자기 인연에 따라서. 금은 금대로 부합이 되고 은은 은대로 부합이 되고 무쇠는 무쇠대로 부합이 되고. 이렇게 부합이 되다 보니까 이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한 단체가 된 것이죠. 단체가 돼서 이룬 것이 이 집입니다. 바로. 여러분 각자, 이 집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인연에 따라서 집을 지어 가지고 딱 내가 거기서 한생각에 이것이 잘되면 몽땅 이게 한데 합쳐서 하나로 뭉쳐져서 상천세계에 이르고 부합이 된단 말입니다, 하나로.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상천세계가 아니라 중천세계에서 윤회에 끄달리면서 돌아간다면 이 씨가 그냥 중천세계에 떨어져서 그냥 모두가 화합니다. 내가 죽으면 죽는 대로 이것도 같이 부합이 돼서, 만약에 내가 넝마의 차원이라면 넝마의 차원으로 이 씨가 여기의 모든 것이 부합이 돼서, 모든 게 인연에 따라서 내가 나의 그 씨를 만든 것이 바로 넝마씨니까 내가 가는 대로 또 쫓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내 뱃속에다 넣고 또 이 세상에 태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죽어도 마찬가지, 살아도 마찬가지죠.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니까요. 결국은 집합된 한 단체에서 내가 한생각에 이것이 은이 되느냐 금이 되느냐, 무쇠가 되느냐 넝마가 되느냐의 문제에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이 갈림길입니다, 이 중세계라는 이 뜻이. 갈림길인데 이 갈림길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겁니다. 내 생각을 어떻게 해야 상천세계에 가느냐 이겁니다. 상천세계에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면서도 상천세계를 응시한다 이겁니다. 우리가 공부를 안 하면 대학을 못 가고 대학원을 못 가듯이. 어떤 여건에 의해서 인연에 따라서 내가 공부를 못하게 돼서 못하는 결과도 있죠. 그것도 자기 업보니까. 그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모두 중두난발을 해서 이렇게 되는데도 질서 있게 차원대로 잘 이끌어서 돌아가고 있죠. 우리 콩팥에서 돌아가고, 또 간에서 돌아가고, 또는 직장에서 돌아가고, 위에서 돌아가고 이 오장육부에서 다 세포를 통해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지구 벌레가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이 지구도 우리 한 몸뚱이로 비유해 보세요. 꼭 우리 몸뚱이와 한가집니다, 지구 한 혹성이. 인간은 왜 불성이라고 했을까? 요건 작게 모인 단체입니다. 생명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그런데 이건 큰 단체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혹성, 불성 이렇게 말을 하죠.
뾰족한 수는 없지만, 여러분은 이렇게 상천세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나? 당신 몸에 5억이라는 그 생명체가 당신의 인연에 따라서 모든 게 한데 합쳐졌어요. 그러니 모든 것은 그네들이 다 나로부터 같이 모여진 자체의 하나로 뭉쳐서, 예를 들어서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서 돌아갈 때에 그 난소를 통해서 자궁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것이 5억이 돈다 이겁니다. 5억이 돌아서 하나 골인될 때에 전부 물체는 없어지고 자기 근본만 한데 합쳐집니다. 근본에 근본이 한데 합쳐지면서, 이 물체는 하난데 이 근본이 한데 합쳐지니까 하나로 될 수밖에. 하나로 돼서 이것이 임신을 해서 낳을 때 다시 자기 인연에 따라서 뭉친 그, 영혼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것이 바로 한데 합쳐져 가지고 자랄 때 다시 분배돼서 소임을 맡아 가지고, 우리 뱃속에서 지금 오장육부에서 세포를 타고 또 자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제각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제각기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하여금 내가 지금 이렇게 움죽거리고 있다 이겁니다, 작용을 하고. 모든 걸 작용을 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이 작용을 내게 하는 고놈이 누군가 하는 거는 바로 그 5억이라는 게 한데 융합이 돼서, 한데 합쳐져 가지고 공해서 돌아가니까 바로 그 능력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라는 것을 어떠한 데다가 기준을 두느냐. 어떤 데다 기준을 둘 수가 없습니다, 하도 많아서. 그러니까 간에서 생각이 나오고 콩팥에서 나오고 이렇듯이, 이게 어느 한 콩팥 동네라면 이 동네에서 야단 저 동네에서 야단 이러니까, 이것이 여기서 돌아가는 대로 여기는 자꾸 생각이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탐지기나 컴퓨터나 이 영사기나 녹음기나, 이 문제가 여기에 오관을 통해서 다 있다는 얘깁니다, 무전기도.
그러면 이 우주간 법계가 다 뚫렸다는 얘깁니다. 통했다 이 소립니다. 그대로 우리가 여여하건만 우리는 모르니까 자꾸 마음이 나는 대로 요동이 나는 거죠. 자꾸 망상이 생기고 그러는데, 망상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오직 거기서 일어나는 대로, 즉 말하자면 마치 아닌 마치로 톡톡 때려서 그냥 모든 걸 거기다가 놔라 이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주인공으로 이름을 했다면 주인공에다 모든 걸 놔라 이겁니다.
그러면 주인공이 누구냐? 여러분이 다 그렇게 5억이라는 것이 나한테 실체로 지금 이렇게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면서도 5억이고 5억이면서도 하나 아닙니까? 그런데 그 하나마저도 없는 겁니다. 왜? 여러분이 고정되게 한 일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장육부 속에서도 고정되게 한 분야만 맡아서 일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몇 번씩 말하고 몇 번씩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달라요. 만나는 대로 마음이 달라지는 걸요. 그게 근본적으로 아주 자동적이죠. 즉 말하자면 이 작용을 하는 것이 근본 이 장소에서만 작용을 한 게 아니라 옛적에, 즉 말하자면 억겁 천년 전에서부터 작용을 해서 나온 장소도 이 장소요, 억겁 천년 전에서부터 그 작용을 하고 나온 사람들도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옛 물도 없고 옛 사람들도 없고 옛 산도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 지금 내 화두, 이 자체가 바로 공입니다. 이 내 몸뚱이 자체가 그대로 공입니다. 색이라고 표현할 것도 없고 공이에요. 색이라는 건 누구든지 다 알고 있으니까, 자기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게 있다는 이 자체가 바로 공이라 이 소립니다. 공해서 돌아가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면 공해서 돌아가고 있는 자기 공에다가 모든 걸 놔라 이겁니다. 믿고 놔라! 믿지 않으면 놓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이거를 놔야만이 상천세계에 등장할 수가 있다. 삼세심이라고 하고 삼세심을 일심으로 부합시킨다면, 일심! 즉 말하자면, 이렇게 여러분이 먹으려고 애를 쓰고 살 양으로 애를 쓰고 어린애를 낳을 양으로 애를 쓰고 낳느라고 아파서 애를 쓰고 이렇게 하지만, 일심으로 돌아가는 그 일심 자체도 없는 그 상천세계에서는 생각해서 먹고 생각해서 살고 생각해서 갖고 생각해서 모든 걸 가고 오니 얼마나 편리하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이 발버둥이 쳐야 할 일이, 이건 죽는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산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니, 이왕지사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면 전쟁터에 칼을 빼고 나온 셈이나 똑같은 얘깁니다. 이왕지사 이 세상에 나왔으면 그냥 돌아갈 수는 없죠. 그죠? 그러니 잘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기와 불법 공부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수행법 중에는 몸의 기를 다스리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기공법을 수련하는 것과 불법 공부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쭙고자 합니다. ‘기’란 무엇이며 불법 공부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기’라는 건 옛날에도 그렇고, 스님네들 아니더라도 학자들이나 이런 분들은 기를 가지고 몸을 다스렸습니다. 몸을 다스리는 거는 기를 단전으로 해서 기를 이렇게 모아서 풀어 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지금 세상에 어려우냐. 지금 단전을 하고 기를 모아서 제대로 하질 못했기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머리로 기가 그냥 올라가서 영 일을 못하고 그러는 사람이 없나, 몸이 비틀리는 사람이 없나, 그냥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귀로다가 그냥 그 뜨거운 게 막 쏟아져 나온답니다, 또.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게 됐고 가정이 아주 파탄이 오게 되는 사실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 것은 왜냐하면 몸의 기를 다스리기 때문에 그 몸의 기를 잘 다스리려면, 정돈을 하고 잘 다스리려면 바로, 몸에 들어있는 의식들이 작용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거는 몸을 다스리는 거지 마음을 다스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들어 있는 그 의식들, 생명들 그것들이 아랑곳 없습니다. 같이 동일하게 작용을 해 주지 않습니다. 선원에서는 관법(觀法)을 가르칩니다. 이 마음으로써 내가 꼭 ‘너만이 알아.’ 할 때에 ‘아, 너고 나고 없구나. 모두 나야!’ 하고 작용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에다 놓으면 이 누진(漏盡), 머리로다가 통신이 돼서 그 머리로 통신이 되면 하달이 돼 가지고 사대(四大)로 통신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육신이 작용이 됩니다.
그런데 왜 믿을 만하냐? 이거는 그 속에서 이 주인공 자체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디가 잘못됐는지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걸 작용을 해 주는 거죠. 저기서 모자라면 여기서 보태고, 여기서 모자라면 저기서 보태고 그렇게 해서 작용을 해 주는 거죠. 그러니깐 몸을 건강하게 다룰 수가 있고, 예를 들어서 살이 쪘으면 살을 뺄 수도 있고, 살을 찌게 할 수도 있고 그건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기만 가지고 하다가 보면 잘못되는 일이 많죠. 그러니까 몸뚱이 떨어지면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러나 몸이 떨어지고 말 떨어지고 행 떨어지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라는 건 영원한 겁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무정물들도, 또는 저런 과일 나무들도 서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 가지고 사랑을 하면서 열매를 맺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거와 같이 이 마음도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사랑하면서 서로 도와 가면서 작용을 하는 거니까, 그게 중용이죠. 그러니 몸도 얼마든지 자재로이 할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모두 잠재의식이 관습에 의해서 돼 있고, 그거를 못 믿기 때문에 못하는 거지 진짜로 믿는다면 죽고 사는 것도 다 그냥, 그냥 탁 맡길 수가 있습니다.
2008-02-25 오후 6: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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