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일본은 서구인들의 기호에 맞는 홍차를 제조하여 홍차와 녹차의 수출에 총력을 기울인다. 계속적으로 각국에 사람을 파견해 그 지역 국민들의 기호와 판매 방식 등을 자세하게 조사한다.
이러한 결과로, 차를 많이 마시는 러시아는 일본의 차 주요 수출국이 된다. 본래 러시아 사람들은 귀족에서 가난한 농민에 이르기까지 차를 좋아해 하루에도 5~6번씩 많은 양의 차를 수시로 마신다. 금속으로 만든 사모바르라는 찻물을 끓이는 주전자는 러시아 여성에게는 필수품으로, 가정마다 있어 주로 홍차나 중국산 벽돌차를 끓여 마셨다. 일본은 주로 홍차와 벽돌차를 수출하여 차의 수출량을 꾸준히 증가시킨다. 19세기 말에 러시아는 영국에 이어 차 소비량이 2위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차가 품질이 떨어져 오래 우려먹을 수가 없고 향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수입을 중단한다. 인도ㆍ실론 차에 뒤떨어진 일본 홍차는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러시아 차 시장 진출에 실패를 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 녹차의 최대 수출국인 미국은 본래 차보다는 커피를 더 선호했다. 1898년~1902년에는 커피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차에만 관세를 부과하기도 한다. 일본의 차 관세 폐지 요구가 관철되지만 미국 시장에서도 녹차와 홍차가 다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일본차는 중국과의 경쟁 속에서 수출 증가를 가져오지만 차의 양을 늘리기 위하여 이물질 첨가와 우려먹은 차에 색소를 첨가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또한 일본차에서 검출된 착색용 색소가 유해하다는 보도로 인하여 일본의 차는 신용이 떨어져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미국에서 일본의 차는 몰락하고 불경기를 맞이한다. 따라서 일본은 제다협회를 설치하여 제다와 포장에 까지 섬세한 노력을 기울여 캐나다와 미국에 새롭게 수출하여 성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을 통하여 수입되는 홍차는 미국 시장을 서서히 넓혀가고 있었다. 1909년까지는 녹차 소비가 홍차에 비하여 2배 정도 많았다. 하지만 1910년 이후부터는 홍차 소비가 더욱 증가하게 된다.
홍차와 녹차의 경쟁은 만국박람회에서도 드러난다. 실론관에는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으나 일본식 분위기를 살린 실내와 정원을 갖춘 일본관은 성행을 이루지 못한다. 설탕의 단맛에 익숙한 서구사람들은 일본 녹차보다는 홍차를 더 선호하였고 서구인들에게 일본식 녹차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영국은 이미 건강에 좋은 홍차 성분에 대하여 광고를 했다. 홍차에 대한 반응은 더욱 커졌다. 그 당시 미국의 여성들은 건강에 좋은 음료를 더욱 선호하였으며 녹차 보다는 홍차를 더욱 마시게 되었다. 일본의 차는 미국에서도 높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인의 대중화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차는 서구인들의 입맛에는 어울리지 않게 되자, 일본은 차를 물질이 아닌 정신적 측면으로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의 동양부 고문으로 있는 오카쿠라 덴신은 <차의 책>을 저술하여 차의 정신과 차가 단순한 음료가 아닌 동양의 아름다움이 들어있는 문화라고 소개했다. 차츰 다도(茶道)가 일본 문화로서 국제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인들이 다도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