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 그 한 물건을 일러라
혜월 스님, 신골 치는 ‘탁’ 소리에 환해져
혜월 스님은 19세부터, 은사인 혜안 스님 부탁으로 서산 천장사에서 경허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을 즈음, 스님은 경허 스님을 졸라서 보조 국사의 <수심결>을 배우게 된다.
이 <수심결> 서두에 임제 선사의 “지ㆍ수ㆍ화ㆍ풍의 네 가지 물질적 요소는 법을 말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러하거니, 다만 네 눈앞에 항상 뚜렷하여 홀로 밝고 형상 없는 그것이라야 비로소 법을 말하고 법을 듣느니라” 라는 구절에 이르러, 혜월 스님은 큰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목전에 뚜렷하고 형상 없이 홀로 밝은 것(歷歷孤明 物形段者),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화두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때 경허 스님은 다시 “어느 물건이 설법하고 청법하느냐? 형상 없으되 뚜렷한 그 한 물건을 일러라.”
답을 이르지 못한 혜월 스님은 이로부터 늘 ‘대체 이 한 물건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에 꽉 차서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오직 이 한 생각 뿐이었다. 1주일이 되던 날, 스님은 짚신 한 켤레를 다 삼아놓고 마지막으로 신골(틀을 짚신에 넣고 두드려 모양새 고르는 것)을 치기 위해 ‘탁!’ 하고 자신이 친 망치소리에 그렇게 찾던 ‘한 물건’이 환하게 드러났다.
혜월 스님이 타파한 ‘한 물건(一物)’은 남악회양 스님의 깨달음과 유사하다. 육조 대사가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고 할 때, 회양은 어쩔 줄 모르다가 8년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한 공안이 그것이다.
여기서 ‘무슨 물건’이 바로 ‘이뭣고’ 화두의 근원이 된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다는 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설명하기 위해 마음이니, 불성(佛性)이니, 주인공이니, 무일물(無一物)이니,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니 하는 등의 이름을 붙이지만 실은 설명이 불가한 ‘그 무엇(거시기)’이다. 모양과 형상이 없기에 말이 끊어지고 마음 길이 사라진 곳에서 스스로 체험하는 수밖에 없는 ‘물건 아닌 물건’인 것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바라제 존자가 이견왕(異見王)으로부터 불성에 관하여 질문을 받고 ‘불성은 작용 속에 있다’는 취지로 대답하여 왕을 깨닫게 했다는 이런 게송이 전한다.
“태내에 있으면 몸이요, 세상에 살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며, 귀에 있으면 듣는다는 것이며, 코에 있으면 향기를 분별함이요, 입에 있으면 말하는 것이며, 손에 있으면 잡는 것이요, 발에 있으면 걸어가는 것이다. 두루 드러내면 모래알 같이 무수한 세계를 다 아우르고,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에 있다.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자는 그것을 불성이라 알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는 정혼(精魂)이라고 한다.”
이견왕도 이 게송에 깨달았는데 그 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는 우리는 왜 깨닫지 못할까? 그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당체(當體)에 대해 진실로 의심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와 인생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깨달음의 성품’(覺性)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의심해야만 화두가 저절로 들리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생각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김성우 객원기자